# 536
“현재는 영지 접경 근처에 주군하고 있습니다. 기사 120명과 영지군 12,000명, 용병 5,000을 동원하여 왔습니다. 단숨에 우리 영지를 쓸어버릴 심산인 것 같습니다.”
로니안 자작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이쪽의 군사는 기사 20명에 병사 1,700명뿐이다.
본시 유카리안 영지군이었던 기사 10명과 병사 1,000명은 현재 수감되어 있다. 교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이다.
유사시 이들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병력 자체가 비교되지 않는다. 드워프가 제작한 무구를 걸치고 있지만 저쪽이 일제히 진군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접촉은 아직 없는 겁니까?”
“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우리 쪽 탐문 결과 내일 아침 일제히 진군한다고 합니다.”
“흐음, 그럼 시간이 조금 있군요. 알겠습니다. 한번 적정을 살펴보지요.”
현수가 임시로 쳐진 군막을 벗어나자 롤랑 마법사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로드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네?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롤랑은 매우 조심스런 표정이다. 하긴 하늘같은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는 자리이니 어찌 긴장되지 않겠는가!
“적정을 살피고 올 것이니 편히 있게. 플라이!”
현수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는다. 그러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이 구현된 것이다.
“후작님, 오늘 밤이라도 진군을 명하시지요.”
“아냐. 진군은 내일 아침에 실시한다. 로니안 자작군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렇게 해도 돼. 오늘 밤 병사들의 배를 든든히 채우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후작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자넨 나가보게. 내일 아침에 보세.”
“네, 후작님!”
기사단장인 듯한 자가 군막 밖으로 나가자 후작의 눈에 음침한 빛이 감돈다.
“시종장은 그 계집을 들이게.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않도록 해.”
“네, 후작님!”
명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 하나가 군막으로 들여보내진다. 방금 목욕을 마쳤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상태이다.
“흐으음, 역시 괜찮군. 흐흐,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좋아, 좋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
후작의 명에도 여인은 바르르 떨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어허, 가까이 오라는데 왜 움직이질 않느냐?”
버럭 노성을 지르자 그제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간다. 19세 정도 된 예쁘장한 아가씨이다.
“호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구나. 좋아, 마음에 들어! 크흐흐, 네 이름은 무엇이더냐?”
“저, 저는 엘리사라고 해요, 후작님. 근데 저 그냥 놔주시면 안 되나요? 흐흑! 무서워요.”
“무서워? 크흐흐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후작은 음흉한 시선으로 엘리사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군침을 삼킨다. 튀어나올 곳을 튀어나오고 들어가야 할 곳은 확실히 들어간 글래머는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흐흑! 흐흐흑!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무서워 마라. 잡아먹진 않을 테니. 더 가까이 오너라.”
“네?”
“어허! 가까이 오라 하지 않느냐. 정녕 네 아비와 어미가 죽어야 말을 듣겠느냐?”
“아, 아니에요. 갈게요.”
“그래, 그래야지. 아암! 크흐흐!”
손만 뻗으면 바로 품속으로 끌어당길 거리가 되자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술잔을 든다. 마치 아주 먹음직스런 음식을 앞에 둔 늑대 같은 표정이다.
쭈우욱―!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눈짓을 한다. 잔이 비었으니 채우라는 뜻이다. 엘리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덜덜 떨며 술을 따랐다.
“좋아, 좋아! 이제 내가 이 잔을 비우기 전에 너는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야 한다. 알겠느냐?”
“네?”
“못 알아들었다면 알아듣도록 네 아비를 죽여주지. 그럼 잘 알아듣겠지?”
“흐흑! 아니에요. 알아들었어요. 버, 벗을게요. 흐흐흑!”
미구에 닥칠 끔찍한 상황을 떠올린 엘리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후작은 술잔을 든 채 조금씩 드러나는 엘리사의 육감적인 몸매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제 곧 벌어질 육체의 향연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심보이다.
미판테 왕국의 다섯 후작 가운데 하나인 칼멘 후작은 여자 욕심이 대단한 자이다.
하여 케일론 성에는 하렘이 차려져 있다. 여기엔 국법으로 정한 일곱 명의 부인이 있고, 열한 명의 첩이 기거한다.
이 밖에 이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들인 90명의 시녀가 있다. 언제든 후작의 노리개가 될 수 있는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외출을 하면 영지민 가운데 반반한 처녀들을 물색한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부하들에게 줄 것인지 하렘에 들일 것인지를 결정한다.
오늘 잡혀온 엘리사는 목마른 후작이 우물을 찾았다가 눈에 뜨이는 바람에 끌려온 처녀이다.
아직 사내를 모르기에 너무도 부끄러워 옷을 벗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럼에도 칼멘 후작은 음흉한 괴소만 지을 뿐이다. 이런 것 자체를 즐기는 놈이기 때문이다.
칼멘 후작이 잔을 비우고 스스로의 옷을 벗으려는 순간이다.
“깊은 잠에 빠질지어다. 딥 슬립!”
“슬립!”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들린 두 마디에 칼멘 후작과 엘리사가 그대로 쓰러진다.
“돼지 같은 놈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수의 신형이 드러난다.
쓰러진 채 코까지 골고 있는 칼멘 후작은 보니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퍼머넌트 플라토닉 커스!”
이 한마디로 칼멘 후작은 영원히 아무리 예쁘고 육감적인 여자를 봐도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고자가 된 것이다.
옷을 거의 벗은 채 쓰러진 엘리사를 본 현수는 나직이 혀를 찼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본 것이다.
“플라잉 브랑켓!”
나는 담요 마법을 구현시키고는 엘리사를 얹었다. 그리곤 군막 밖으로 나가려다 돌아선다.
임시로 만든 군막이지만 안에는 웬만한 것은 다 있다.
침대 곁 협탁2)으로 다가간 현수는 종이와 펜을 꺼내 다음과 같이 썼다.
6장 금괴 처분 작전
테세린의 영토를 침범하면 케일론 성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 믿고 못 믿는 것은 네놈의 판단에 맡기노라.
―이실리프 제2대 마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추신)엘리사에게 200골드를 내리도록 하라.
아울러 그 일가가 테세린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하라.
후작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현수는 그 자리에 엘리사를 눕혔다. 그리곤 군막 밖으로 나갔다.
영주는 발정난 개 같은 놈이지만 휘하 기사와 병사들은 잘 조련되었는지 군기가 엄정하다는 느낌이다.
그냥 놔뒀다면 테세린이 함락되었을 것이라 생각한 현수는 자신의 조치가 마음에 들었다. 이실리프 마탑의 보복이 두려워서 영구히 테세린을 넘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침에 눈을 뜬 칼멘 후작은 현수가 남긴 메모를 보고는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퇴각 명령이 내려졌고, 현수의 지시대로 엘리사에게 200골드를 하사한다. 아울러 테세린으로의 이주를 명한다.
이실리프 마탑주의 명령을 감히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테세린으로 되돌아온 현수는 로니안 자작에게 침공은 없을 것이라 이야기해 줬다. 당연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꼼짝없이 영지를 빼앗길 판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작님,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이웃도 없습니다. 영지가 넓어졌으니 그에 걸맞은 무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자작이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내일 다시 뵙지요.”
“네, 알겠습니다.”
영주성에서 나온 현수는 예전의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으로 향했다. 지금은 하인스 상단 테세린 지부로 쓰이는 중이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인님!”
그간 잊고 있던 로즈와 릴리 자매이다.
“얀센은 자리를 비웠나?”
“네, 이레나 상단과의 상담이 있어 외출했습니다. 로사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있고요. 불러올까요?”
“아냐. 쉬는데 그냥 둬.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
“저흰 얀센 아저씨와 로사 아주머니가 잘 보살펴 주셔서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 마탑주님 덕분입니다.”
롤랑 덕분에 테세린 전역에 소문이 번진 모양이다.
“마법 성취는?”
“저는 3서클 유저가 되었고, 릴리는 이제 막 3서클에 발을 걸쳤습니다.”
“그래? 상당히 빠르군.”
마나 스캔을 해보니 로즈는 3서클 유저가 맞고, 릴리는 2서클에서 막 3서클로 넘어가는 중이다.
세실리아 여관은 현재 하인스 상단과 이레나 상단 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이다.
손님들을 위한 요리는 로사와 애니가 맡는다. 애니는 현수와 용병행을 같이하다 목숨을 잃은 테일러의 아내이다.
아무튼 늦은 밤이기에 손님은 아무도 없다.
“로즈.”
“네, 주인님.”
“이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몸과 마음 다 편합니다. 모두 주인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릴리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네? 저, 저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내심이 짐작된다.
“언제까지 너희를 이곳에 둘 수는 없어. 고향으로 갈 수만 있다면 가야 하지 않겠어? 보내줄까?”
“아뇨! 저는 안 갑니다.”
로즈가 입술을 질끈 깨문다.
“왜지?”
“어머니,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과 어찌 같이 있겠습니까?”
“으으음! 묻지 않으려 했는데 그럴 수 없군. 로즈, 어떻게 해서 노예가 되었는지 말해주겠어?”
“주인님의 명이시라면 말씀드리지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
“나중에 저희가 복수할 힘이 생기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릴리의 눈이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아픈 과거를 들추면 한바탕 눈물바다가 될 것 같기에 한 말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될 거예요.”
“그래, 그건 그렇고, 마법에 대해 묻고 싶은 것 있어?”
“네, 마법을 구현시키고자 마나를 배열할 때…….”
로즈와 릴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마법에 관한 여러 질문을 했다. 현수는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마무리되었을 때쯤 생각난 듯 이야기했다.
“조만간 거처를 옮겨야 할지도 몰라.”
“주인님, 저희는 노예입니다. 어디든 주인님께서 가라는 곳으로 가야지요.”
“아니, 너희는 노예가 아니야. 지금 당장에라도 노예 인장을 지워줄 수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야.”
노예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함은 주인이 있다는 뜻이다.
로즈와 릴리가 얀센의 보호하에 있기는 하지만 테세린엔 많은 불한당이 있다.
무력이 약한 얀센이 막아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불한당들이 미모가 빼어난 로즈를 그냥 놔둔 이유는 현수 때문이다. 코리아라는 제국의 백작이면서 영주의 딸인 로잘린과 맺어질 것이란 소문이 나돈 지 오래이다.
타국이지만 고위 귀족인 백작을 잘못 건드렸다간 치도곤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껏 별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저희는 주인님의 뜻대로 할 테니 언제든 명만 내려주세요.”
“그래, 알았어.”
말을 마친 현수는 여관 뒤쪽 빈 창고 건물에 마나 집적진을 그려주었다. 그곳에서 마법 수련을 하면 보다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에 배려해 준 것이다.
릴리와 로즈를 보낸 뒤 늘 쓰던 방으로 올라간 현수는 이곳에서의 상황을 점검하곤 지구로 귀환했다.
“디멘션 트랜스퍼!”
샤르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또 한 번 아르센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 * *
“흐음! 제대로 도착했군.”
현수가 나타난 곳은 킨샤사 저택의 옥상이다.
아르센은 서늘한 10월이지만 이곳은 무더운 적도 아래이다. 하여 얼른 의복부터 갈아입었다.
“어머, 자기야! 언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