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0
아무튼 일련의 일을 하러 급히 귀국해야 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도 그렇지만 이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인상을 찌푸린 것이라 이야기한 것이다.
연희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며 목에 매달려 뽀뽀세례를 퍼붓는다. 잠시 후 둘은 또 한 번 진한 키스를 나눴다.
“당장 오라고 성화이니 할 수 없이 또 떠나야 하는 내 마음 알지?”
“네, 여기 걱정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참, 우리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
“네, 그것도 걱정 마세요. 착착 준비 중이니까요.”
“여기 대통령님과 내무장관님 등이 오실 거야. 인원수 넉넉하게 잡고 준비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현수는 연희와 이리냐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곤 현관을 떠났다.
공항까지 다섯 대의 리무진이 간다. 중간에 현수가 탔고, 전후에 두 대씩 경호원들이 탔다.
피터스 가가바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경호원들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긴 이 세상 어떤 보스가 부하들의 거처까지 일일이 마련해 주겠는가!
공항에 당도한 현수는 가가바가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텔레포트했다.
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중간 기착지가 있어야 했다.
킨샤사→우간다→에티오피아→예멘→오만→이란→파키스탄→인도→미얀마→지나→서울.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켈레모라니의 비늘은 얻은 이후 총 열한 단계였던 것이 네 군데로 줄었다.
킨샤사→에티오피아→이란 →미얀마→서울.
아디스아바바에 당도한 현수는 생각난 김에 코리안 빌리지를 찾았다. 한창호 건축사가 보낸 직원이 에티오피아 현지 건설사 직원과 천지약품 건설에 관한 협의를 하는 모양이다.
“아스토우 할아버지 계세요?”
“누구?”
“접니다. 미스터 킴.”
“미스터 킴? 아, 성자님이 오셨구려. 어서 오시구려.”
여전히 어두컴컴한 아스토우 할아버지 집이지만 사람은 달라져 있다. 기력이 많이 좋아진 듯 제법 빠른 걸음으로 나온다.
“이거 몸에 좋은 것이니 드십시오.”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정말 고맙습니다, 성자님.”
현수가 정관장에서 만든 6년근 홍삼 농축액 박스를 건네자 아스토우 할아버지가 지나치게 황송해한다.
비싼 건지 아시는 모양이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 성자님 덕분에 안녕했다우. 자, 어서 안으로…….”
“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안으로 들어가니 자리에 앉게 하고는 부엌으로 사라진다. 그곳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향 커피 향이 풍겨온다.
“흐으음!”
현수는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내가 아픈 바람에 솜씨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유.”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얼른 이빨 빠진 잔을 받아 들며 환히 웃었다.
“그나저나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죠?”
“그럼! 성자님 덕분에 이젠 아주 팔팔하다우.”
“제가 잠시 살펴도 될까요?”
“그러시구려.”
아스토우 할아버지가 진맥해 보라고 손목을 내민다.
“흐음, 마나 디텍션!”
아스토우 할아버지의 체내로 흘러들어 간 마나는 금방 상태 보고를 시작한다. 연세가 많아 기능이 약간 저하된 것을 빼면 이상 없다.
“괜찮으시네요. 그래도 집안에만 계시지 말고 많이 움직이세요.”
“누구 말씀이라고. 알았네.”
“참, 리야 아가씨는 아직 퇴근 전인가요?”
“리야? 금방 올 것이네. 조금 전에 왔다가 떼프 좀 사 온다고 가게에 갔거든.”
“떼프요? 아! 에티오피아의 주식인 인제라 만드는 재료요?”
“그래. 오면 맛있게 만들라고 할 테니 먹게.”
“하하, 네. 그러지요.”
잠시 담소를 나눈 현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천지약품 건설 현장을 조금 더 눈에 담아 가기 위함이다.
부지에 당도해 보니 기초 공사 중이다. 현장사무소에 들르니 한창호 건축사사무소 직원이 반갑게 인사한다.
“어서 오십시오.”
“아, 네. 여기서 또 뵙네요. 많이 불편하시죠?”
“현장이란 게 다 그렇죠. 평생 여기 있을 것도 아니라 생각하니 불편한 건 참을 만합니다.”
“네, 그렇죠. 그나저나 현지에서 건축 허가는 받은 겁니까?”
“그럼요! 전 여기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요? 뭘요?”
“건축 허가 접수를 했더니 다음 날 떨어졌어요. 세상에 이렇게 빠른 행정 절차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건 우리나라에도 긴급히 수입해야 할 겁니다.”
“하하! 그랬군요.”
어떤 상황이 빚어졌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천지약품 아디스아바바 지사는 에티오피아의 대통령 기르마 올데 기오르기스가 기대를 품고 있는 계획 중 하나이다.
의약품을 다루는 주무부서인 의무부의 장관 로마우 바이할 역시 천지약품이 들어오길 고대하고 있다.
질 좋고 값싸며, 친절하고 투명하며, 발생된 이익을 결코 독식하지 않는 바람직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천지약품은 다른 기업에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할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건축 허가 신청이 접수되자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행정 절차를 밟은 것이다.
“우리 설계대로 하려면 이곳에 없는 자재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체크하여 본사로 보냈습니다.”
“네, 기왕에 짓는 것이니 제대로 지어보십시오.”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창호 건축사사무소 직원이 환히 웃는다. 이때 저쪽에서 치맛자락을 너풀거리며 다가오는 여인이 있다.
바샤 아스토우 할아버지의 손녀 리야 아스토우이다.
“성자님, 오랜만이에요. 그간 안녕하셨죠?”
“리야 양도 잘 있었나요? 그동안 많이 예뻐졌네요.”
“어머, 그래요? 호호! 칭찬, 고맙습니다.”
“리야 양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아요?”
“그럼요. 근데 여기서 이야기할 건가요?”
“물론 아니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근사한데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둘의 대화는 처음부터 암하라어이다. 그렇기에 한창호 건축사사무소 직원은 멍한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한국 사람이 어떻게 아프리카 토속어를 이토록 잘하는지 어안이 벙벙한 것이다.
“잘 봤습니다. 나중에 또 들를게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현장을 떠난 현수는 택시를 불러 아디스아바바 시내로 들어갔다. 둘이 당도한 곳은 아디스아바바에서도 가장 유명한 카페라는 ‘토모카’이다.
리야의 말에 의하면 토모카에선 원두도 판매하고 로스팅도 하며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추출해 준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찾을 정도로 커피 애호가들에게 잘 알려진 카페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리가 없다.
리야가 피식 웃으면서 조금 기다리자고 한다.
잠시 후, 두 명의 관광객이 나간다. 얼른 들어가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은근히 기대되네요.”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오신 김에 여기서 로스팅한 커피도 좀 사 가세요.”
“그럼 그럴까요?”
현수가 웃음 짓자 리야 역시 환히 웃는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여기 와서 가끔 사거든요.”
“아, 그래요? 그러니까 더 기대되는군요.”
잠시 후, 둘은 커피 잔을 사이에 두게 되었다.
“역시 좋군요.”
“그렇죠? 이 집 커피 정말 괜찮아요.”
리야가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는다.
“참, 고강철이란 분이 왔지요?”
“네, 며칠 전에 가족 분들과 같이 오셔서 제가 안내해 드렸어요. 천지약품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촌장님 댁에서 머물기로 했구요. 전화도 새로 놨어요.”
“잘 대해주신 모양입니다. 고마워요.”
“어머, 아니에요. 성자님이 저희에게 베푸신 게 얼마나 큰데요. 집이 너무 누추해서 오히려 미안한걸요.”
“누추해요? 촌장님 댁, 아담하니 괜찮던데요?”
“저도 TV를 봐서 한국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요. 그런 데다 비하면 우리 코리아 빌리지는 그냥…….”
뭔가 자기 비하하는 말이 나올 듯하다. 하여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8장 커피 농장의 발판을 마련하다
“고강철 씨는 이곳 책임자가 될 거예요.”
“그럼 천지약품 아디스아바바 지사장님이 되시는 건가요?”
“네.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에요. 천지약품은 우리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회사이니 당연히 그래야죠.”
리야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참, 리야 양과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돕겠어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단위 농장을 조성하는 중이에요.”
“대단위 농장이라고요?”
“네, 두 군데에 동시 개설되는 중인데, 하나는 3,000㎢이고 다른 하나는 1,500㎢쯤 되는 거예요.”
“네? 뭐라고요?”
리야의 눈이 커진다. 리야가 근무하는 커피 농장은 에티오피아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그런데 그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 것이다.
“두 군데 모두 산지가 있어 커피 농장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맞는 커피 묘목 또는 종자가 필요합니다.”
“……!”
“묘목이나 종자뿐만 아니라 재배 유경험자도 많이 필요하구요. 리야 양이 나서서 알아봐 주었으면 합니다.”
“그 넓은 델 다 커피 농장으로 만든다고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커피 재배에 적합한 곳만 골라서 할 겁니다. 나머진 다른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 돼지 같은 가축들을 사육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규모가 엄청나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리야 양이 좀 도와주세요.”
“성자님의 말씀이시니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럴게요.”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려면 이쪽 농장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지요?”
“그래야겠죠. 콩고민주공화국도 가봐야 하고 그러니까요.”
현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례의 말이겠지만 리야 양의 현재 임금은 얼마나 되죠?”
“2,000비르예요. 달러화로 환산하면 85달러쯤 돼요.”
속으로 환산해 보니 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이다. 상당히 깨어 있고 능력도 있지만 임금이 싼 편이다.
“리야 양이 데리고 올 사람들 급여도 그 정도인가요?”
“저보다는 조금 적어요. 1,600∼1,800비르 정도예요.”
“그 사람들을 스카우트하려면 얼마나 줘야 할까요?”
“여기서 일하는 거라면 비슷하게 줘도 되지만 콩고민주공화국까지 가서 일하려면 더 많이 주셔야 할 거예요. 가족들까지 다 가야 할 테니까요. 주거 문제도 있구요.”
“좋아요, 그분들 급여는 리야 양이 정하는 대로 하죠. 그럼 될까요?”
“정말요? 금액이 상당히 많아질 수도 있는데요?”
“일단 저쪽으로 가면 주택은 제공해 줄 거예요. 가족 단위로.”
“네? 집을 줘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다. 근로자에게 집을 주는 개념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거저 주는 건 아니고, 일하는 동안 살 집입니다. 새로 지어서 괜찮을 거예요. 웬만한 것은 갖춰져 있을 거구요.”
서울의 원룸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붙박이 가구와 주방 기구, 그리고 냉장고와 TV, 세탁기가 갖춰진 집을 제공할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항온 마법진이 적용된 작업복도 준다.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이실리프 농장에서 주택을 제공한다는 소문을 들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너도나도 가겠다고 신청을 한다.
급여는 에티오피아에서 받던 것의 세 배에서 다섯 배이고 집은 공짜다. 그러니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리야 아스토우 역시 첫 월급을 받고는 깜짝 놀란다.
봉투에 든 돈이 무려 200만 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급여가 20배나 수직상승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현수가 이런 파격적인 급여를 준 이유는 딱 하나이다. 그런 급여를 받을 만큼 정말 열성적으로 내 일처럼 일했던 것이다.
현수와 리야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조성될 커피 농장에 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때마다 리야는 일일이 메모했다.
이 정도면 커피 재배에 관한 전권을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꼼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