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
“친구, 고마워. 다 친구 덕이야.”
“고마운 걸 알아주니 그것으로 됐어. 그나저나 부장이 되었으니 한턱내려면 돈 많이 들겠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나저나 자네 신혼 예물 맞췄지? 어디서 맞췄어?”
“그건 왜?”
“베아트리체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려고. 근데 예쁜 반지가 눈에 안 띄어서.”
“반지? 흐음, 내가 한번 알아볼게.”
베아트리체가 평생 전호만 바라보고 살게 할 반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고마워! 아, 날 부르시는 모양이야.”
테이블 저쪽에서 최 회장이 손짓하고 있다.
“어서 가봐. 하늘 같은 회장님이시잖아. 이 기회에 점수 좀 확 따놔.”
“알았어. 조금 이따가 봐.”
전호가 사라지자 권철 부사장이 환히 웃으며 다가선다.
“오랜만입니다, 전무님! 참, 부사장님!”
“아이고, 조금 쑥스럽네요. 그나저나 고맙습니다. 다 김 전무님 덕분입니다.”
“고맙기는요. 도와드릴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
“나중에 한턱내겠습니다. 시간 좀 내주십시오.”
“하하! 물론입니다. 거나하게 내셔야 합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코가 삐뚤어지도록 사겠습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현수가 웃자 권 부사장 또한 환히 웃는다.
리셉션이 끝난 뒤 현수와 이연서 회장은 곧장 천지건설 본사로 향했다. 수행비서가 미리 연락을 했기에 신형섭 사장 등 임원들이 로비까지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아, 다들 바쁠 텐데 왜 여기 와 이러고 있어? 어여 올라가.”
이 회장이 부러 역정을 내자 임원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난 김 전무와 할 말이 있어 온 거니 다들 일 봐.”
“네.”
신형섭 사장이 마지막으로 물러간다. 둘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34층으로 올라갔다.
벌컥―!
“헉! 회, 회장님!”
문이 열리고 이연서 회장이 들어서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박진영 과장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당탕탕―!
이 바람에 뒤로 밀린 의자가 집기와 부딪치며 소음을 낸다.
“왜 그렇게 놀라? 죄진 거 있어?”
“아,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여길……. 아, 전무님!”
화장실에 갔다 온 현수가 나타나자 어찌 된 영문인지를 깨달은 박진영 과장이 얼른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김지윤 대리 등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이때 이 회장의 시선은 전무실 앞 책상에 머물고 있다.
“흐음! 비서는 자리를 비웠나?”
비서 자리가 빈 것이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다.
“회장님, 강연희 비서는 지금 킨샤사에 주재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
현수의 비서가 손녀인 강연희라는 것을 깜박 잊은 듯하다. 슬쩍 계면쩍어진 이 회장이 김지윤 대리에게 시선을 돌린다.
“미안하지만 자네가 냉수 한 잔 떠다 주겠나?”
“네? 아, 알겠습니다.”
“허흠! 들어가지.”
“네, 회장님!”
전무실로 들어가려던 이 회장이 박 과장에게 시선을 준다.
“흐음, 자넨 사장실에 연락하여 내가 보잔다고 하게. 10분쯤 있다가 이리로 오라고.”
“네, 회장님!”
박진영 과장이 전화기를 드는 순간 전무실의 문이 닫힌다.
“휘유! 너무나 긴장되었습니다.”
“그러게요. 그룹 총괄 회장님이 오실 거라곤…….”
황만규 주임과 구본홍 사원의 대화를 들은 박 과장이 한마디 한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 늘 긴장해야 할 거야. 여긴 실세 중의 실세인 전무님의 아지트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깨닫는 중입니다.”
황만규 주임이 진땀난다는 듯 소매로 이마를 훔친다.
“태백그룹엔 무얼 줄 생각인가?”
“태백엔 조선 이외에도 음료, 주류, 철도, 기계, 방위산업이 계열사로 있습니다.”
“조선과 방위산업은 어렵지만 음료, 주류, 철도, 기계는 콩고민주공화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행히 우리 천지그룹과는 겹치는 부분이 없군.”
“네, 당연하지요. 천지그룹이 우선입니다. 다만 천지그룹의 역량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건 나눠야지요.”
“좋아, 백두그룹엔 무엇을 줄 건가?”
“비료, 광업, 사료, 제철 분야입니다.”
“백두건설도 있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감당 못할 상황이 되기 전까진 천지건설이 우선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참! 아까 감사장 말고 뭐 받았나?”
“뭔가 끼워준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한번 보게나.”
“네!”
가방 속의 감사장을 꺼내보니 봉투가 들어 있다. 안에는 태백조선소 주식 10,000주가 들어 있다.
주당 30만 원이 넘으니 30억이 넘는다.
“쯧쯧! 짠돌이 같으니.”
“……!”
이 회장이 슬쩍 이맛살을 찌푸린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짠 건 똑같아. 회사가 바닷가에 있어서 그러나?”
“……!”
현수는 말없이 있었다. 보아하니 이 회장과 최 회장은 같은 기업인이라는 것 이외에 무언가가 있다.
하여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태백그룹 일 줄 때 쪼잔한 것만 주게. 알았나?”
“네? 하하, 알겠습니다.”
현수가 웃음 짓자 이 회장이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천지기획으로 할 건가, 아님 개발로 할 건가?
“저는 천지기획이 어떨까 합니다. 개발이라는 말뜻 자체는 좋지만 부동산 쪽과 연관이 되면 투기 냄새가 나서요.”
“좋네, 자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게. 천지기획은 우리 천지그룹의 신 성장 동력원이 될 것이니 잘 이끌어주게.”
“네, 제 힘 닿는 한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이제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군.”
“네, 이제 금방이죠.”
“연희 그 녀석, 혼수는 어찌 되었나? 예단도 있어야 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다며?”
아들 녀석이 챙겨주지 못함을 알기에 묻는 말이다.
“예단은 없이 하는 걸로 이야기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나 말고는 나설 수 없고,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아는 바도 없으니 이걸로 어떻게 해결해 보게.”
이연서 회장이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넨다. 아마도 돈이 들었을 것이다. 확인하지 않고 품에 넣었다.
“전에 유니콘 아일랜드의 별장을 50채나 주셨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튼 손녀가 결혼하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그러는 거니 거절치 말게.”
“네, 알겠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받지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네. 연희를 많이 아껴주게. 그나저나 언제 출국하지?”
“그날 광장동 성당에서 5시에 혼배 미사가 있습니다. 그거 끝나면 바로 출발할 겁니다.”
“알겠네. 인천공항인가, 아님 김포공항인가?”
“김포입니다. 여덟 시 출발이니 늦지 않게 오십시오.”
“알겠네. 근데 신 사장도 못 데리고 가나?”
“네, 그래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네. 그리함세.”
현수는 이 회장과 담소를 나눴다.
잠시 후엔 신형섭 사장이 왔다. 그 자리에서 현수를 부사장으로 진급시키는 문제가 결정되었다.
전처럼 대대적인 행사는 없다. 인사 발령 결과를 천지건설 본사 로비에 게시하는 것이 전부이다.
아울러 천지기획 사장으로 겸임하는 것도 결정되었다.
신 사장은 이제 같은 사장급이라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농을 친다. 현수는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이 회장은 천지기획이 쓸 건물을 새로 매입하겠다고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천지건설 34층 전무실을 쓰기로 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비서실 공인규 서기관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공 서기관을 따라 들어간 곳은 본관 2층 대통령 집무실이다.
“어서 오세요.”
“네.”
대통령이 권한 자리에 앉자 비서실 여직원이 차를 내온다.
두어 모금을 마실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먼저 말문을 연 것을 대통령이다.
“국방장관님으로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획기적인 전투복을 개발했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음고생 했다고 들었는데 앞으론 걱정 안 해도 된답니다.”
“네?”
“중간에서 농간 부리던 사람 전부 조사 중에 있어요. 국익에 반한 행위를 했거나 부당했다면 처벌받을 겁니다.”
“아, 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통령은 잠시 뜸을 들인다.
“나라 밖에서도 큰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실리프 농산과 축산, 그리고 농장에 관한 일일 것이다.
“네,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성사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콩고민주공화국 반둔두 지역에 개설될 이실리프 농산 및 축산은…….”
잠시 설명이 이어졌다. 대통령은 엄청난 규모의 농장이 조성되는 것에 대단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개발 자금은 어떻게 조달되는 거죠?”
“천지약품 및 이실리프 무역상사 등으로부터 버는 제 돈 전부와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 많이 출연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뿐이지요.”
“다른 나라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니 대단하네요. 모쪼록 잘되어 그쪽도 좋고 우리도 좋아졌으면 합니다.”
“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대꾸를 하니 또 침묵이 흐른다. 이 침묵을 깬 것 역시 대통령이다.
“참, 해군에 도움을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
“참모총장께서 말씀하시길 천군만마를 얻은 것 이상이라고 하던데 자세한 내용은 언급을 피하더군요.”
“아, 네에.”
“그래서 깊이 묻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당부 드려요.”
“제 힘이 닿는 한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것이니 그건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북한에 들어가게 되죠?”
“네, 수일 내로 들어갔다 나올 생각입니다.”
“그때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친서 전달을 당부하려 오시라 했습니다. 해줄 수 있나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대통령이 집무 책상의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온다. 두 마리 봉황이 그려진 것을 보니 대통령 전용 봉투인 듯싶다.
“이걸 전해준 이후의 반응을 잘 살펴주세요. 아울러 답신을 받을 수 있으면 그래 주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특급 보안을 요구합니다. 김 전무님 이외의 인사들은 몰랐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대통령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현수는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내용이 뭔지는 가보면 알 것이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주는데 정작 나라에선 김 전무님께 부탁만 드리는군요.”
“그게 국민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영광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이라도 그리해 주시니 고맙네요. 모쪼록 잘 다녀오시고, 좋은 성과 있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수는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나가시면 공 서기관이 명함을 드릴 겁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그 번호로 전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현수가 청와대를 나선 것은 오후 다섯 시 경이다.
대통령과의 면담은 불과 5분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국정원 사람 등과 보냈다.
북한에 들어갔을 때 주의할 사항 등을 알려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