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3
“여기 있는 미스터 드미트리가 표도르의 친형이랍니다.”
“오오! 그런가? 하하, 어떻게 이런 인연이……!”
로그비노프가 환히 웃으며 둘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았다. 표도르의 체중이 20㎏쯤 늘고 10살쯤 더 먹으면 영락없는 드미트리이다.
“하하! 하하하! 이봐, 표도르!”
“네, 특임대사님!”
“조금 전에 자네에게 내렸던 명령은 미하일에게 전하게.”
“네? 자넨 지금부터 형님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도록! 형님 일행이 갈 때까지 자넨 휴가네.”
“……!”
“대사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일행을 위해 이런 선처를 해주다니. 고맙습니다.”
명령을 받은 표도르는 놀란 토끼마냥 눈만 크게 뜨고 있다. 이때 드미트리와 현수가 동시에 말한 것이다.
“대사님! 멋지셔요.”
“하하! 하하하하!”
까차의 칭찬이 더해지자 파안대소하며 즐거워한다.
“어서 가서 명을 정하게. 참, 내 이름으로 초빙한다고 하게.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양복을 입고 있지만 표도르는 거수경례를 한다.
로그비노프가 알았다는 듯 손을 살짝 흔들자 바로 자세를 취하곤 밖으로 향하며 입을 연다.
“형! 여기서 조금 기다려. 명령 전하고 돌아올게.”
“그래! 그래!”
드미트리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배어 있다. 친동생이지만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할 말이 매우 많은 듯하다.
표도르가 나가자 로그비노프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가스전 공사 때문에 장 부위원장을 만나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성사되면 러시아, 북한, 한국 모두 득이 되는 일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선을 넣어보죠.”
말을 마친 로그비노프가 다시 인터컴을 눌러 장성택과의 연결을 지시했다.
따르르르릉―!
“흐음.”
전화를 집어 들자 송화음이 들린다.
“대사님, 장 부위원장님과 연결되었습니다. 통화하십시오.”
비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굵직한 음성이 들린다.
“안녕하십니까?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네까?”
“오랜만입니다. 요즘도 건강하지요?”
“하하! 특임대사님 염려 덕분에 괜찮습네다.”
모스크바 대학을 나왔다더니 러시아어가 제법 유창하다.
“부위원장님의 오늘 스케줄은 어떻습니까?”
“제 일정이요? 하하, 특임대사께서 시간을 내라 하면 만사를 제쳐야디요. 아암, 기럼요!”
상당히 우호적인 느낌이 든다. 하긴 북한 입장에선 이제 마지막 남은 끈이 러시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싫어도 그런 내색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에잉! 뭐 급한 일이라고 벌어진 겁네까?”
음성이 올라가는 걸 보면 느긋한 자세로 전화를 받던 장성택이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중요한 일로 부위원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시간 내줄 수 있는지요?”
“아, 대사님께서 이리 말씀하시면 당연히 시간을 비워야디요. 알갔습네다. 기럼 지금이라도 오시라요.”
“그러지요. 그럼 잠시 후에 만납시다.”
통화를 마친 로그비노프는 ‘들어서 알지?’하는 표정이다.
삐이이잉―!
“네, 대사님!”
“외출하겠네. 차 대기시키게.”
“알겠습니다.”
“한 대가 아니고 두 대 준비시켜.”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말 나온 김에 가자는 뜻일 것이다. 현수와 까차, 그리고 드미트리는 로그비노프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대의 검은색 벤츠가 서 있고, 기사들이 운전석 곁에 서서 대기 중이다.
“미스트르 킴! 타시지요.”
“네.”
현수가 승차하자 로그비노프가 올라탄다.
쿵―!
운전사가 문을 닫고는 얼른 운전석에 오른다. 같은 순간 까차와 드미트리는 다른 차에 탑승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장성택 부위원장을 만나러 갈 거야. 그쪽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운전사가 시동은 걸곤 곧장 출발한다. 기다렸다는 듯 대사관의 정문이 활짝 열린다.
두 대의 벤츠가 나오자 인근에서 교통 정리하던 여경이 수신호로 다른 차들의 진행을 막는다. 외교사절에 대한 편이를 제공하려는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벤츠의 뒤쪽에 두 대의 휘파람이 따라붙는다. 최철 상좌일 것이다.
“정지!”
국방위원회 건물에 당도하자 위병이 손을 든다. 그러더니 차 번호를 확인하곤 얼른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수신호를 한다.
차가 많지 않기에 웬만한 번호는 다 외우는 모양이다.
벤츠가 현관 입구에 당도하자 두 명의 정복 군인이 얼른 다가와 문을 연다.
“어서 오시라요. 특임대사 동지!”
“흐음, 수고가 많네. 부위원장 안에 계시지?”
“네, 지금 기다리고 계십네다. 제가 안내해 드리갔습네다.”
“좋아! 그러게.”
로그비노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좌 계급장을 단 사내가 앞장선다.
뚜벅, 뚜벅, 뚜벅!
복도를 딛는 군화 소리가 크게 들린다. 현수는 복도 중앙에 놓인 각종 조형물과 벽에 걸린 그림 등을 보며 따랐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휴우! 결혼식 날짜는 맞출 수 있겠구나. 다행이야.’
현수는 이곳이 김정은의 집무실이 인근에 있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2호 청사인 것을 모르고 있다. 이곳의 지하엔 김정일이 자주 이용하던 대연회장 두 개와 소연회장이 갖춰져 있다.
현재 1호 청사는 김정은의 집무실과 비서, 그리고 경호원들이 사용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평양시 중구역 해방산동 지역이며 만수대 언덕에서 남쪽 기슭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똑, 똑, 똑―!
“뉘기래?”
“부위원장 동지! 러시아 특임대사님과 일행이 오셨습네다.”
“아! 기래? 기럼 날래 뫼시라우.”
“네에.”
딸깍―!
문이 열리자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인다. 뉴스 시간에 자료화면으로 여러 번 본 얼굴이라 익은 것이다.
“핫핫! 어서 오시라요. 반갑습네다, 특임대사 동지!”
“하하! 네에. 나도 반갑습니다. 부위원장님은 여전하군요.”
“기럼요! 이제 겨우 67세밖에 안 되었습네다. 내레 아딕은 팔팔하디요. 긴데 뒤쪽의 일행은 누구디요?”
“성미 급한 걸 보니 팔팔하긴 팔팔한 모양입니다.”
“아! 그랬나요? 하하, 맞습네다. 내레 성미가 좀 팔팔한 편이디요. 자아, 오셨으니 일단 앉으시라요.”
“네에.”
장성택의 손짓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로그비노프가 앉자 명실상부한 서열 2위이지만 러시아 특임대사보다 상석에 앉을 수 없는지 맞은편에 착석한다.
“다들 편히 앉으시라요.”
어정쩡하게 서 있던 현수와 까차, 그리고 드미트리는 로그비노프의 좌측에 일렬로 앉았다.
1대 4인 불균형적인 모습이 된 것이다.
“이봐, 귀빈이 오셨으니까 가서 음료 좀 내오라우.”
“네, 근데 뭘로…….”
비서가 얼른 허리를 굽히며 묻는다. 이때 장성택의 시선은 로그비노프에게 닿아 있다.
“아직 좀 이르긴 하디만 백두산 들쭉술 어떻겠습네까?”
“들쭉술? 하아, 아직 대낮인데……. 흐음, 나야 좋지요.”
백두산 들쭉술은 남자가 마시면 신선이 되고, 여자가 마시면 선녀가 된다 할 정도의 약술이다.
40도의 브랜디형과 16도 와인형이 있다. 둘이 말하는 품새를 보니 40도짜리를 마실 생각인 듯하다.
“들었디? 가서 날래 내오라우. 독한놈으로. 안주도 내오고.”
예상대로 40도짜리를 주문한다.
“네. 알겠습네다.”
비서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는 이내 밖으로 사라진다. 장성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그비노프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특임대사님 신수가 훤해 보입네다.”
“하하, 그래요? 다 부위원장님 덕입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산삼을 달여 먹고부터 기운이 나는 듯합니다.”
“아! 기거요? 기거 참으로 다행한 일입네다. 기나저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뉘기디요?”
장성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수에게 닿는다.
까차와 드미트리는 누가 봐도 서양인이다. 로그비노프와 같이 왔으니 러시아인일 것이다. 하지만 현수는 남한 사람 같다.
러시아에도 고려인들이 살기는 하지만 현수처럼 세련된 모습은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쪽은 김현수 전무이사입니다.”
로그비노프의 소개가 끝나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천지건설 전무이사 김현수입니다.”
허리를 펴곤 공손히 명함을 건넸다. 직책을 떠나 아버지뻘인 어른이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집무실에서 남한 기업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는지 어정쩡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친다.
“아! 기래. 기래! 거 티전지 뭔지 하는 거에 나온 그 사람이구만. 반갑네. 내레 장성택이네. 내가 누군딘 알디?”
장성택도 신화창조 티저 영상을 본 모양이다.
그런데 초면에 대놓고 반말이다. 워낙 연치가 차이 나기에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기색인데 어찌 얼굴을 붉히겠는가!
“그럼요. 저도 부위원장님을 방송에서 여러 번 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래, 기래! 긴데 방송에서 보니까 러시아어가 제법 유창하더군. 딘쨔인가? 아님 누가 대신 말해준 건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기에 러시아어로 대꾸했다.
“저는 혼자 러시아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방송에 나왔던 제 대사는 제가 한 게 맞습니다.”
“우와! 이 친구래 러시아어가 나보다 낫구만.”
진짜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유창하게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많이 듣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알기로 부위원장님께선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저보다 경험도 많고 하니 지도편달 바랍니다.”
“허어! 이 젊은 친구래 나를 등말 놀라게 하는구만기래. 하하! 이 친구 이거 아주 걸물이네. 안 그렇습네까? 하하하!”
장성택이 파안대소하며 로그비노프를 바라본다. 자네가 데리고 온 사람을 내가 칭찬했으니 기분 좋아해라라는 표정이다.
그런데 특임대사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대사님! 왜 그러십네까?”
“부위원장님! 내 곁에 계신 이분은 우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님의 친서를 지니고 오신 준외교관 신분입니다.”
“네에……?”
장성택은 확연히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김정은보다 훨씬 카리스마 넘치던, 김정일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푸틴이다. 그리고 그의 친서를 소지했다 함은 그 사람을 대신한다는 뜻도 조금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그런데 방금 로그비노프가 한 말은 자신이 현수를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는 뜻의 우회적인 질책이다.
“험! 미안합네다. 이 늙은이가 잠시 주책을 부렸습네다. 사과드립네다.”
현수에게 시선을 주는 장성택은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때문이다.
이래서 좋을 일 없다. 그렇기에 얼른 나섰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별로 실례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특임대사님 말씀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짜 괜찮습니다.”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요.”
로그비노프가 또 나서서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 양반은 여기까지 잘 도와줬는데 이제부턴 초를 치는 역할을 맡겠다는 듯 엄한 표정이다.
그렇다 하여 뭐라 할 수도 없다.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인식시키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장성택의 표정은 굳어 있다.
현수가 별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로그비노프의 말은 이어진다.
“미스트르 킴은 우리 러시아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현재는 러시아의 준위교관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