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74화 (574/1,307)

# 574

“알겠습니다. 다시는 결례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장성택의 고개가 살짝 숙여진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상당히 딱딱해지는 순간이다. 현수는 괜찮다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위원장님,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중대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특임대사님 말씀대로 푸틴 대통령님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걸 확인해 주실 분이 여기 계신 특임대사님이라 같이 찾아뵌 겁니다.”

혹시라도 특임대사의 직위로 찍어 누르려는 의도가 아니었느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에 미리 말한 것이다.

“……!”

장성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현수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수는 품속에서 친서를 꺼냈다.

“여기 이걸 봐주십시오. 푸틴 대통령님의 친서입니다.”

“아! 네에.”

장성택이 얼른 몸을 일으켜 친서를 받는다. 봉투의 뒷면을 보니 붉은색 밀랍으로 봉해놓았다.

밀랍에는 러시아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 모양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 촛농으로 봉해놓고 러시아 대통령의 철인을 찍었다는 뜻이다.

장성택은 진중한 표정으로 칼을 꺼내 조심스레 밀랍을 떼어냈다. 쌍두 독수리 문양이 파손되지 않도록 밀랍의 밑을 떠낸 것이다.

13장 장성택을 만나다!

친애하는 조선인민주의공화국 최고지도자께.

귀국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최근 우리 러시아는 대한민국의 천지건설에 차얀다 가스전 개발공사 및 파이프라인 연결공사를 도급한 바 있습니다.

아국에서 출발한 파이프라인은 귀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에 이르도록 하고자 합니다.

부디 귀국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해를 당부 드립니다.

파이프라인 연결공사가 마쳐지면 아국은…<중략>

이 친서는 천지건설 김현수 전무이사만이 소지할 수 있고, 친서의 진위는 귀국에 파견되어 있는 그리고리 로그비노프 특임대사가 해줄 것입니다.

귀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러시아와 조선인민주의공화국 간의 우애가 더 깊어지길 바랍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친서의 말미엔 친필 수결이 있다. 북한과 러시아가 오랜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대통령의 친서가 당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 장성택은 친서의 무게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친서의 첫 줄 때문이다.

‘조선인민주의공화국 최고지도자께’라는 구절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건 조카인 김정은이 맨 처음 개봉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먼저 열었다.

내용을 모르기에 한 일이지만 어느 땐가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권력암투가 치열한 때문이다.

“흐음, 김현수 동지!”

“네, 말씀하십시오.”

장성택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친서를 내게 준 이유가 뭡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현수는 친서의 내용을 안다. 다른 건 몰라도 첫 줄은 이렇게 써달라고 본인이 요구했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친서의 첫 줄에 친애하는 조선인민주의공화국 최고지도자께라고 쓰여 있습네다. 최고 지도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인데 왜 내게 이걸 주었느냐는 말씀입네다.”

“아! 거기에 그렇게 써 있습니까?”

현수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같은 순간 장성택의 눈빛이 빛난다. 조금 전 밀랍 봉인을 떼어낼 때 아주 조심스럽게 밑을 떼어냈다. 그래서 러시아의 문장인 쌍두독수리가 멀쩡하다.

이 밑에 열을 가해 다시 붙이면 감쪽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용을 몰랐습네까?”

“네, 그건 푸틴 대통령님께서 집무실 책상에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는 모르지요. 그런데 첫 줄에 친애하는 조선인민주의공화국 최고지도자께라고 쓰여 있습니까?”

“흐음. 그렇습네다.”

“그럼 제가 제대로 배달한 거군요.”

“뭐라구요?”

“장성택 부위원장님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고모부가 아닙니까? 여기선 어떤지 몰라도 남한에선 부위원장님이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판단…….”

“아! 잠깐만, 잠깐만! 잠시만 말을 멈추시라요.”

“네? 왜요?”

왜 이러는지 잘 알면서도 짐짓 모른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장성택을 바라보았다.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그리고 누가 듣거나 봤으면 어쩌나 하는 기색이다. 그러면서 새삼 본인의 집무실 사방을 살핀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설치한 도청장비가 있으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로그비노프와 까차, 그리고 드미트리는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지만 현수는 아니다.

장성택이 현재 어떤 마음인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시라요. 김현수 동지!”

“네, 말씀하십시오.”

“내레 잠시 동지와 단독 면담을 했으면 합네다.”

“…네, 그러시죠.”

장성택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현수가 따라 일어서며 로그비노프 특임대사에게 시선을 준다.

“장 부위원장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 네에.”

로그비노프가 대꾸하는 바로 이때 비서가 술과 안주를 준비해 들어온다.

“특임대사님! 기다리시는 동안 백두산 들쭉술 한잔하시라요. 금방 돌아오갔습네다.”

“네에.”

장성택과 함께 부속실로 들어갔던 현수가 되돌아온 것은 대략 10분이 지나서였다.

들어갈 땐 안 그랬는데 나올 땐 아주 화기애애하다.

“핫핫! 이거 죄송합네다. 김현수 동지와 갑자기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예가 아니지만 자리를 잠깐 비웠습네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 술 꽤 맛이 좋습니다.”

“기래요? 기럼 이따 가실 때 몇 병 싸 드리갔습네다. 가져가셔서 맛이나 보시라요.”

“네에, 고맙습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장성택은 밝은 모습이다. 그러다 까차에게 시선을 준다.

“여성 동무를 아직 소개해 주지 않으셨습네다.”

“그렇군요. 제가 소개드리겠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입니다.”

“아! 기래요? 하버드 대학이라면… 미국에 있는 그거 맞습네까? 대단하십네다.”

장성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세상물정마저 어두운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하버드 대학 로스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때 로그비노프가 한마디 거든다.

“우린 까차라고 부르지만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가 본명입니다.”

“브레즈네프? 설마……? 설마가 진짜인 겁네까?”

장성택의 눈이 확연히 커진다. 자신이 모스크바 대학에 다닐 때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 바로 브레즈네프였던 때문이다.

“그분은 제 증조부님이세요.”

“허어, 세상에나. 맙소사!”

장성택은 너무 놀라 온몸의 기력이 빠졌다는 듯 털썩 주저앉는다.

그에게 있어 브레즈네프는 정신적인 태두이다. 그의 정치적 노선을 높이 평가하며 본받으려 애쓰던 시절도 있었다.

장성택이 이러는 이유는 젊은 시절의 어떤 사건 때문이다.

1964년에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 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우주, 무기공학, 철강산업의 발달을 꾀했다.

그 결과 서방의 최고 수준과 맞먹을 만큼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최고수준의 두뇌들이 모여 있는 모스크바 대학을 방문하곤 했다.

장성택이 재학해 있던 어느 날, 브레즈네프가 소수의 경호원만 대동한 채 캠퍼스의 가을을 거닐었다.

이때 장성택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미리 학생들을 몰아냈지만 나무가 커서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그때 읽은 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쓴 ‘사적 및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련 철학계뿐만 아니라 세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때 브레즈네프와 장성택은 이 책에 대한 토론을 했다. 그리곤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날 밤, 소련 비밀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이 돌아간 뒤 장성택은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에는 브레즈네프가 하사한 금일봉이 든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안에는 돈뿐만 아니라 브레즈네프가 친필로 쓴 메모가 있었다. 낙후된 북한을 일으켜 세울 훌륭한 인재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이다.

졸업 후 귀국하여 김일성의 딸인 김경희과 결혼하여 김정은의 고모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 봉투와 메모이다. 소련 공산단 서기장이 친필로 격려한 인물이기에 승승장구한 것이다.

장성택에게 있어 브레즈네프는 오늘날이 있을 수 있게 해준 은인인 셈이다.

그런 은인의 증손녀라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하아! 이거 반갑네. 내가 서기장님의 증손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정말 반갑네.”

“네? 아, 네에. 근데 저희 증조부님을 아세요?”

“기럼, 내레 1969년에 모스크바 대학에 다닐 때…….”

잠시 그때의 일화가 이야기되었다.

물론 까차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경청했다. 로그비노프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장성택이 까차의 손을 잡고 흔든다.

“에고, 제가 한 일이 아니라 증조부께서 하신 일인데요. 뭘!”

“세상 인연이라는 게 이런 거군요.”

현수가 끼어들자 얼른 시선을 돌린다.

“기럼, 기럼! 기래서 내레 가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곤 했디. 거기서 똘똘한 아새끼들 만나면 칭찬도 해주고, 금일봉도 주곤 했어.”

브레즈네프 흉내를 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위원장님같이 공화국을 책임지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 학생들이 있습니까?”

결과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모두가 바라본다.

“있냐고? 기럼, 있디! 있어. 그렇게 해서 큰 아이들 전부 내 밑에 있디. 기래서 그런지 내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들디. 암튼 서기장님 덕분이야.”

장성택은 저도 모르게 반말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은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로그비노프는 이를 지적하려다 만다.

현수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쪽의 덩치 큰 친구도 누군지 모릅네다.”

“아! 미스터 드미트리는 이번 공사에서 러시아 인력 공급을 담당할 레드 마피아 보스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겁니다.”

“뭐어? 레드 마피아……?”

이번에도 놀라는 표정이다. 레드 마피아가 어떤 존재인가!

러시아 공권력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조직이다.

구소련의 군 출신들이 다수 포진해 있으며 소련 붕괴 시 습득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보유한 집단이다.

현재에도 러시아 군부와 선이 닿아 있어 핵잠수함도 팔아치울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핵배낭과 핵무기 또한 돈만 주면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그런 레드 마피아 보스의 대리인이라면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다.

“인사드립니다. 드미트리 알렉세이 다닐로프라 합니다.”

짐짓 무게 잡으며 예를 갖춘다. 장성택뿐만 아니라 로그비노프도 놀랍다는 표정이다.

레드 마피아 보스의 대리인이라면 권력 서열 최상부라는 뜻이다. 그런 자의 동생이 자기 밑의 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아까 휴가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본인의 처사에 스스로 만족한 것이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성택은 오늘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평상시엔 잘 만나주지도 않던 로그비노프가 먼저 전화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공식적인 일이 아니면 거동조차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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