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5
현수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친서를 지닌 러시아의 준외교관이라 한다.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인물이다.
대통령의 친서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다. 하지만 기록물로서 길이 보존되는 것이다.
훗날엔 역사로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친서에 아예 이름까지 딱 집어서 써놨다. 이런 인물을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까차도 놀라운 인물이다. 존경해 마지않던 서기장의 증손녀라 한다. 게다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다.
드미트리는 또 어떤가!
레드 마피아 보스의 대리인이란다. 이 또한 가볍게 봐선 안 될 인물이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한 잔씩 합시다.”
로르비노프 역시 깨달은 게 있어 그러는지 먼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준다.
쪼르르륵! 쪼르르륵! 쪼르르륵! 쪼르르륵! 쪼르르르륵!
“자, 나는 우리 모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하겠소.”
“저는 장성택 부위원장님의 건강을 위해 건배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을 위해 건배하갔습네다.”
“저는 우리 일이 잘 되길 빌면서 마실게요.”
“저도 모두를 위해 건배하겠습니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러시아 사람들은 남녀불문하고 웬만하면 두주불사이다. 까차도 이에 해당된다. 장성택 역시 술이 세다. 현수는 넷이 마신 술의 열 배라도 끄떡없다.
불과 30분 만에 백두산 들쭉술 네 병이 비워졌다. 그러는 동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면담 시간이 정해졌다. 비서들을 통해 서로의 일정을 조율한 결과이다.
면담은 내일 오전 10시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공식적인 입국이 아니었는지라 영빈관(백화원 초대소)은 쓸 수 없다. 대신 그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춘 송전각 초대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로그비노프는 러시아 대사관 내의 숙소를 쓰라고 했지만 공화국을 방문한 귀빈이라면서 장성택이 우긴 결과이다.
송전각 초대소는 북한군 인민무력부의 최고급 휴양소로, 대동강변의 소나무 밭에 있어 송전각(松田閣)이라고 불린다.
1980년대 중반에 건립됐으며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내부는 대리석으로 치장됐으며, 2007년 11월에 이곳에서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이 열렸다.
초대소로 가는 건 언제든지 갈 수 있다면서 소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술판을 벌였다. 제2청사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김정일이 자주 사용하던 곳이다.
술을 마시면서 연료, 비료, 전기, 식량, 의약품 등에 대해 찔러보았다. 그때마다 장성택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의 부족으로 많은 인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어펜시브 참 마법을 쓰지 않고도 장성택의 마음을 얻은 셈이다.
화기애애했던 술판이 끝난 건 오후 7시가 조금 넘어서이다. 주는 대로 받아 마시던 장성택과 까차가 취한 때문이다.
“모두 모였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비서가 몹시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로그비노프에게 취기가 엄습한 때문이다.
말은 알아듣고 대답은 하는데 눈동자가 약간 풀려 있다.
“난 괜찮아. 다 모였다고?”
“네.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모였습니다.”
“좋아, 가지. 미스트르 킴! 같이 갑시다.”
“네.”
로그비노프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서서 걷는데 위태위태하다. 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디 리프레시!”
샤르르르르릉!
흠칫거리는가 싶더니 비틀거리는 것이 확연히 줄어든다.
“바디 리프레시!”
샤르르르르릉!
덜 깼다 싶어 한 번 더 마법을 구현시키니 확실히 달라진다.
“미스트르 킴! 왜 거기 있어요? 같이 갑시다.”
“아! 네에.”
문이 열리자 현수는 로그비노프와 나란히 서서 리셉션 장으로 들어섰다.
정복 차림 북한군인 이십여 명이 형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별이 세 개인 상장 2명, 별 두 개인 중장 7명, 별 하나인 소장 7명과 사복 차림 6명이다.
로그비노프는 연단으로 향해 마이크 앞에 섰다.
“험험, 늦은 밤 여기까지 오시라 하여 미안합니다.”
“……!”
모두 대답이 없다. 얼른 다음 말을 하라는 표정이다.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남조선 천지건설의 김현수 전무이사입니다.”
로그비노프가 손으로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이에 현수는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김현수 전무는 러시아와 조선인민주의공화국, 그리고 남한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
모두 한밤에 불러서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참고로 김현수 전무는 러시아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받은 준외교관 신분입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짝짝짝짝!
잠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장성들의 시선은 여전히 현수에게 고정되어 있다. 젊디젊은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김현수라 합니다. 남한의 건설사 직원이지요.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현수는 차얀다 가스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한을 통과한 뒤 남한으로 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겉보기에 북한은 이득이 없는 공사이다. 오히려 손해이다.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곳에선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화기를 다룰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이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많은 고용 효과를 누릴 수 있음을 주지시켰다. 북한이 러시아에 진 채무가 탕감될 것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이 공사가 끝나고 북한은 토지사용료를 받을 수 있음도 알렸다.
장성택을 만났음을 이야기했고 내일 오전 김정은과의 면담이 있음도 알렸다. 그러면서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을 당부했다.
장성들의 태도는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에게 이득되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에 공화국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뒤를 봐주던 지나가 등 돌리기을 시도하는 중이라는 말에 모두 이맛살을 찌푸린다. 모두 지나가 싫어 친 러시아 인사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나와 멀어지면 누구와 가까워지겠느냐는 물음에 모두 로그비노프를 바라본다.
남한, 일본, 미국은 지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러시아뿐이다.
러시아가 북한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나서면 친 지나 인사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럼 누가 권좌에 앉겠느냐는 말에 모두 눈빛을 빛냈다. 로그비노프가 왜 불렀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현수와의 대담이 끝난 후 술과 음식을 즐겼다. 자연스럽게 다가가니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개중엔 신화창조 티저 영상을 봐 현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설명 덕분에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 가스전 개발 공사와 파이프라인 연결공사도 김현수 동지가 이룬 업적이오?”
“에구, 업적이라 하기엔 조금 그렇습니다. 아무튼 제가 공사를 수주한 것은 맞습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자주 뵈었지요. 식사도 여러 번 했구요.”
“……!”
“콩고민주공화국 반군들이 우리에게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걸 압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정예화된 반군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과도 만났습니까?”
“당연하죠.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대통령과도 만났습니다.”
“허어! 젊은 친구가 대단하구만기래.”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아, 잔이 비었는데 제가 한 잔 따라드리지요.”
“이거 영광이외다. 나중에 남조선 역사책에 나올 인물인데. 하하! 오늘 집에 가믄 일기에 써야겠습네다.”
“에구, 영광은 무슨……. 과찬이십니다. 저, 사실은 그냥 평범한 청년입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다보니 행운이 겹쳐 우연히 몇몇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주 겸손하고만. 젊은 친구가 인성이 되었네. 우리 공화국 청년들도 저래야 하는데 요즘 아새끼들은 영 약해빠져가서리. 에잉! 마음에 안 들어.”
“아새끼들만 그렇습네까? 에미나이들은 싸가지가 점점 없어지고 있습네다.”
“길티요. 모두 잡아다 집단교육이라도 시켜야 하는데…….”
장성들과의 주연이 끝난 것은 12시가 넘어서이다.
로그비노프는 또 취했다. 하여 11시 반쯤 침소로 향했다.
현수는 최철 소좌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송전각 휴양소로 향했다. 장성택의 명령에 따라 체류하는 동안 수행비서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밤이 깊었지만 휴양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귀빈이 오지 않았기에 모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는 서둘러 룸으로 올라갔다.
웬만한 호텔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잘 갖춰진 룸이다.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
잘생긴 청년 하나가 웃고 있다.
“잘될 거야. 시작이 좋았잖아.”
까차의 증조부가 장성택과 그런 인연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드미트리가 레드 마피아 보스를 대리한다고 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일지도 몰랐다.
친서의 효과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게다가 첫 문장은 장성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일등공신이다.
부속실에서 장성택은 자신이 친서를 개봉했었다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이에 현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는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책임지지 못함을 의미한다. 장성택은 신신당부를 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자청했다.
“후후! 후후후!”
기분이 좋아진 현수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한국 맥주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대동강맥주이다.
갖춰져 있던 잔에 따르고 바깥 풍경을 즐겼다.
추운 겨울인지라 어찌 보면 스산한 모습이지만 현수의 눈에는 상당히 괜찮은 절경으로 느껴진다.
특히 소나무들이 보기에 좋았다.
텔레비전을 켰으나 방송이 끝난 듯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비디오가 있어 넣어보았다.
영화 제목이 ‘평양 날파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택견의 비서(秘書)인 무예도보통지를 지키려는 택견 전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택견이 아닌 북한 태권도가 나오고 무예도보통지는 택견과는 관련이 없는 무서이다.
엉성한 것 같지만 영화는 몰입도가 높았다.
그러던 중 주인공의 대사가 현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험난한 삶을 살았으며,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짐작되었다.
보고 있자니 한민족의 자긍심과 정신이 절로 고양되는 느낌이다. 새삼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매헌 윤봉길, 도마 안중근, 백야 김좌진 같은 분들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영화가 이어지는 동안 현수는 계속해서 맥주를 마셨다. 주인공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 때문에 목이 탔던 것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탁자 위엔 20여 개의 빈병이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세안을 다시하고 양치질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이제 자야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부드럽고 가벼운 이불이라 잠이 절로 올 듯하다.
“그래, 오랜만에 제대로 좀 자자.”
현수는 바디 리프레시 마법으로 취기를 날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5분이 흘렀다.
“하암, 물! 물!”
현수의 바로 곁 이불이 들썩이더니 벌거벗은 여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전능의 팔찌』 2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