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6
1장 어서 오시라요!
이불이 들썩이자 늘씬한 팔등신이 드러난다. 누군가 보니 얼굴까지 더없이 아름다운 까차이다.
그런데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다.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제 러시아 대사관에서 밤 10시에 미팅이 있었지만 그 자리엔 참석하지 않았다. 장성택과의 술자리에서 취한 때문이다.
까차는 최철 소좌가 운전하는 차에 태워져 송전각으로 보내졌다. 그때 드미트리는 표도르와 대화하는 중이다.
드미트리는 조수석에 탑승하려는 최철 소좌를 불렀다. 그리곤 몇 마디 소곤거렸다.
최 소좌는 알았다는 듯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휘파람1)은 곧장 송전각 초대소까지 질주했다.
당도해선 곧장 침실로 안내되었다.
까차는 찬물로 샤워부터 했다. 추운 데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취기가 오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물이지만 까차에겐 익숙한 온도이다. 평상시에도 미용을 위해 자주 찬물로 샤워를 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곤 머리카락을 말렸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도 꺼내 마셨다. 술이 약간 깨는 듯하여 텔레비전을 켰지만 볼 게 없어서 껐다.
커튼을 젖히고 야경을 감상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샤워가운은 벗었다.
자던 중 목이 말라 깨어난 까차는 비틀거리며 냉장고로 향했다. 이때까지도 술이 덜 깬 것이다.
아무튼 찬물을 꺼내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캬아∼! 시원해.”
갈증이 해소되자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갔다. 그리곤 곧장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뭔가 닿는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청했다. 취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드미트리가 최 소좌에게 한 말은 까차가 현수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숙소를 배정하지 말라고 했다.
최 소좌는 취한 채 뒷좌석에 앉아 있는 까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최상급 미인이다.
이런 미녀를 그냥 놔뒀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현수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된 것이다.
어쨌든 선잠이 든 까차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현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같은 순간, 현수는 이곳을 아르센 대륙이라 착각하고 있다. 술과 잠에 취한 상황이라 그렇다.
품을 파고드는 건 로시아일 것이다. 그렇기에 까차를 보듬어 안았다. 현수 역시 팬티 한 장만 걸친 상태이다.
따라서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둘 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채 잠들어 있다.
짹, 짹, 짹!
“흐아암! 으으으으! 끄으응!”
뿌드드드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현수가 하품을 하곤 기지개를 켠다. 뼈마디가 이완되면서 좋은 기분이 느껴진다.
창밖을 보니 밤새 눈이 내렸는지 송전각의 너른 뜰이 온통 하얗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잔솔 위에 내린 흰 눈이 멋진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내려와 잠시 앉아 있다 후드득 날아간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설경을 보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일종의 체조이다.
‘여긴 남한보다 오염이 덜 된 것 같은데 마나는 어떨까?’
생각난 김에 마나집적진을 꺼내 깔고 앉았다. 그리곤 마나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작은 파장이 발생된다.
평양의 대기에 퍼져 있던 마나가 현수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한 때문이다.
‘역시…….’
예상대로 남한에 비해 월등히 마나량이 많다. 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수목이 적기 때문이다.
기왕에 시작한 마나심법인지라 잠시 눈을 감고 상쾌한 마나 유동을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현수가 깨어나고 20여 분이 흘렀을 때 침대 한편의 이불이 또 들썩인다.
“하아암! 잘 잤다. 끄으으으으!”
까차 역시 자고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바람에 덮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면서 가슴이 드러난다. 제법 크다. 그럼에도 밑으로 늘어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청춘은 청춘인 모양이다.
“으으! 어젠 너무 많이 마셨어. 근데 여긴 어디지? 아! 무슨 초대소라는 곳이었지? 끄응, 목마르네.”
자리에서 일어난 까차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냉장고로 향한다. 문을 연 채 냉수를 마시곤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 눈이 확연히 커진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현수의 뒷모습이 보인 때문이다.
서서히 시선을 돌린다. 팬티만 걸친 현수가 어디에서 잤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조금 전에 일어났던 침대의 베개가 보인다. 시트가 구겨진 것도 보인다.
거기서 자지 않았다면 베개 하나는 얌전히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헉! 그럼… 어젯밤에……. 아앗!”
지난밤 현수와 동침했다고 생각한 까차가 자신의 몸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쪼그려 앉는다. 다음 순간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을 찾아 입었다.
혹시 현수가 시선을 돌릴까 싶어 그러는지 몹시 조심스럽다.
옷을 다 입을 때까지 현수는 미동도 않고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이 마치 현수에게만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까차가 보기엔 신비로운 모습이다. 하여 잠시 눈을 깜박이며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근데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나? 그랬다면 왜 하필 저기지? 그리고 저건 뭐하는 자세야? 저러고 자는 걸까?’
까차는 미동도 않는 현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호기심이 발동된다. 뒷모습을 보니 거의 역삼각형이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잘록하다.
앞은 과연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움직였다.
“아……!”
까차는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절로 나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수의 상체는 완벽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이다.
잘 발달된 대흉근, 초콜릿 같은 복근, 그리고 양쪽 활배근과 승모근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근육 볼륨이 큰 건 아니다. 그렇기에 슈트를 입었을 때 평범해 보인 것이다. 그런데 벗은 몸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하체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허벅지라는 단어 대신 말벅지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상체를 든든히 받쳐주고도 남을 듯싶다.
까차는 침대로 되돌아왔다. 그리곤 자신의 곁에서 현수가 잤음을 새삼 확인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곁에 남자가 자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밤새 뒤척였다. 그러는 동안 저도 모르게 끌어안았을 수도 있다.
본인의 잠버릇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자는 모습을 현수가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우우∼!”
현수는 마나심법을 운용하면서 오랜만에 체내를 관조해 보았다. 당연히 모두 정상이다.
기분이 좋아져 심호흡으로 마무리하며 눈을 떴다. 따뜻한 햇살이 동공 속을 파고든다. 기분이 좋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돌리다 그대로 멈췄다.
“엇! 미스 까차! 당신이 여긴 왜……?”
“아무래도 우리 어젯밤에 같이 잤나 봐요.”
“네? 그게 무슨……?”
“당신이 이 침대에서 깼다면 그게 사실일 거예요.”
“헐, 말도 안 돼.”
현수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묘하게 바뀐다. 생각해 보니 꿈에 카이로시아를 안았다.
그게 까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우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어서 옷 입어요.”
“헉! 아, 알겠소.”
황급히 다가와 허겁지겁 의복을 걸쳤다.
까차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건 현수의 생각이다. 까차는 유리창엔 비친 현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 까차, 어젯밤엔…….”
“아마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같은 룸을 배정했겠지요. 현수 씨가 잘못한 건 없어요.”
“네? 아, 네에.”
뭐라 대꾸하겠는가! 얼른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 회동이 있으니 얼른 씻으세요.”
“아, 알겠소. 그럼 내가 먼저 씻겠소.”
현수는 어투가 달라졌고, 까차는 호칭을 바꿨으나 둘 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까차가 욕실로 들어간다.
현수는 머리를 말리면서 어젯밤을 떠올렸다. 확실히 침대 확인을 안 했다. 그리고 밤새 까차를 안고 잤다.
‘이런 세상에! 낼모레가 결혼식인데……. 끄응! 내가 이런 실수를……. 그래도 다행이야. 까차가 쿨해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다 말리고 옷을 갖춰 입을 때까지도 까차는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30분 후, 둘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수는 군청색 양복 차림이고, 까차는 아이보리색 투피스를 걸치고 있다.
가지고 온 짐을 초대소 직원이 룸에 가져다 놓았기에 속옷까지 모두 갈아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뚜벅, 또각, 뚜벅, 또각!
둘이 걷는 소리가 울린다. 이걸 느꼈는지 마주 보며 웃었다.
까차가 손을 내밀어 현수의 손을 잡는다.
떼어내지 않고 힘주어 잡았다. 지난밤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주어 고맙다는 뜻이다.
아래층 식당에 당도하니 예쁜 아가씨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어서 오시라요. 저쪽으로 가시디요.”
“아, 네. 고맙습니다.”
식탁엔 2인분의 음식이 마련되어 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버터, 그리고 에그 스크램블과 베이컨, 팬케이크와 소시지 구이 등이 보인다.
커피도 있고 오렌지 주스도 놓여 있다.
보아하니 송전각 초대소엔 현수와 까차만이 방문객인 듯 아무도 없다.
“아침인데도 고즈넉한 기분이 드네.”
“네? 고즈… 뭐요?”
외국인인 까차는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어려울 것이다. 하여 풀어서 말해주었다.
“이 넓은 데에 우리밖에 없어서 고요하면서도 아늑하다는 뜻이야. 맛있게 먹어.”
“아, 네.”
현수는 천천히 음식 맛을 느껴가며 먹는데 까차는 입이 짧은 듯 깨작거리고 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이런 날은 해장이 되는 얼큰한 국이 좋은데.’
우거지, 콩나물, 쇠고기, 간장, 고춧가루, 마늘, 된장을 넣고 푹 끓이면 속이 확 풀릴 것이다.
“바디 리프레시!”
샤르르르르릉―!
깨작거리고 있는 까차에게 마법을 쓰니 흠칫거린다.
뭐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렇듯 쉽게 마나를 느낀다면 마법에 소질이 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먹는 속도와 양이 늘어난다. 숙취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역시 마법은…….’
다시 한 번 마법의 효용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이처럼 빠른 효과는 제아무리 탁월한 민간요법이나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으니 최철 소좌가 대기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지난밤 잘 주무셨습네까?”
“네, 덕분에 아주 잘 쉬었습니다. 최 소좌님도 잘 쉬셨지요?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조금 전에 했더랬습네다. 김 전무님 덕에 평생 처음 초대소 음식을 맛본 겁네다. 감사합네다.”
환히 웃는다. 이럴 때 보면 한국군과 대치하면서 전쟁 위협을 하던 북한의 군인 같지 않다.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중앙당 제1청사입네다. 김 전무님 덕분에 그곳을 가보기는 하는데 은근히 긴장이 됩네다.”
“왜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동지께서 높으신 분들과 집무를 보는 곳이 아닙네까? 저 같은 쫄짜는 감히 가볼 생각조차 못하는 곳입네다.”
“아! 그런가요?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는 마십시오. 그럼 보는 저희도 긴장이 되니까요.”
“아이고, 이거 죄송합네다. 득각 시정하겠습네다.”
“하하, 네. 시정하십시오.”
“하하, 그러디요. 자, 차에 오르시디요. 모시겠습네다.”
휘파람을 타고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는 제1청사까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