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
천지건설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목재 보일러와 펠릿 염가 제공 및 기술 전수(연료 문제).
2. 태양광 발전 시설 염가 제공, 기술 전수(동력과 비료 문제).
3. 생산량이 많은 작물 종자 염가 제공(식량 문제).
4. 의약품 염가 제공(의료 문제).
회담이 끝난 것은 오후 4시 경이다. 여섯 시간을 함께 있은 셈이다. 북한 측은 일단 합의는 했지만 자기들끼리 상의할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현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네다.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갔습네다. 수고한 브레즈네프 법률고문과 함께 오시라요.”
“아! 감사합니다.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현수는 환히 웃었다. 어펜시프 참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휴식을 갖기 위해 현수와 까차는 송전각 초대소로 리턴했다. 그리고리 특임대사는 러시아 대사관으로 갔다.
동부인해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까차, 힘들었지?”
현수의 다정스런 눈길을 받은 까차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아뇨. 괜찮았어요. 현수 씨는 어때요? 피곤하시죠?”
“아니. 나도 괜찮아.”
현수는 까차와 시선을 마주치며 환히 웃어주었다.
오늘 까차는 많은 활약을 했다. 회담 내용의 자구를 일일이 집어주며 국제적인 관례까지 설명하느라 애쓴 것이다.
물론 현수 쪽에 이로운 해석이 많았다. 그럼에도 북측 인사들은 별반 이의를 제기치 않았다.
브레즈네프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장성택은 시종 우호적이었다. 천지건설과 러시아 쪽 입장을 많이 배려한 것이다.
인민무력부장 장정남 역시 별말 없었다.
그것은 김정은도 마찬가지이다. 우방국인 러시아 출신이며 하버드 대학 로스쿨 출신이라는 것이 한몫했던 것이다.
게다가 미녀인지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 것이다.
어쨌거나 까차 덕에 오늘 회담은 팽팽한 기 싸움이 적었다.
“일단 앉지.”
“네, 뭐 좀 드실래요? 시원한 음료라도?”
“시원한 맥주 어때? 같이 한잔할까?”
“네, 좋아요. 잠시만요.”
잠시 후 맥주와 마른안주, 그리고 두 개의 잔을 들고 왔다.
뿅―!
대동강 맥주의 마개를 딴 뒤 글라스에 따라주자 기다리던 까차가 현수의 잔을 채운다.
“건배해요, 우리!”
“그래. 오늘 수고한 까차를 위해!”
“아뇨. 우리 둘 다 수고했잖아요. 그러니 우리 둘 모두를 위해 건배해요.”
“그래, 우리 둘을 위하여!”
“위하여!”
챙―!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잔을 비운다.
“캬아! 시원하군.”
“크으! 네, 한국 맥주보다 훨씬 맛있어요. 우리 발찌까보다는 조금 못하지만요.”
“그래? 아무튼 맛은 좋네. 한잔 더할 거지?”
“당연하죠.”
까차가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고르고 흰 치열이 드러나는 건강한 웃음이다.
다시 잔을 채우고 몇 잔을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예카테리나를 왜 까차라고 불러?”
“글쎄요? 그건 애칭인데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예카테리나와 까차는 발음이나 말의 연관성이 뭐지? 애칭이란 게 이름과 완전히 별개인 별명인가 봐.”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근데 까차는 좀 아닌 것 같아.”
“그래요? 왜죠?”
까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국식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 까는 껍질을 벗긴다는 뜻이고 차는 자동차, 또는 홍차 같은 걸 의미하거든.”
“아! 그렇군요.”
“내 생각엔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은 5음절이잖아. 이게 기니까 줄여서 부르는 게 맞을 거 같아. 예를 들어 윌리엄을 윌이나 윌리라고 부르잖아. 알렉산더는 알렉스라 줄여서 부르고.”
“네, 그렇게 하죠.”
“예카테리나를 이런 식으로 줄이자면 테리, 또는 테리나, 리나, 이런 식이 더 편하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하나 지어주실래요?”
“정말? 내가 별명 지어주면 쓸 거야?”
“그럼요. 그럴게요.”
“좋았어. 그럼 앞으론 테리나라고 부를게. 어때?”
“테리나요? 좋네요. 좋아요, 앞으론 절 부를 때 까차라 하지 말고 테리나라고 부르세요. 아셨죠?”
“오케이! 자, 새로운 이름을 얻은 기념으로 한잔하자구.”
“호호! 네.”
“까차의 새로운 이름 테리나를 위하여!”
“위하여!”
챙―!
잔을 부딪치고 또 한 번 단숨에 잔을 비웠다.
무심코 지어준 이 이름 때문에 현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테리나가 읽은 러시아 고대 문서엔 이름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식이 태어나면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라. 그 이름이 아이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평생을 보살피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까차는 오래 전 읽은 고대 문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정감 어린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첫 키스의 상대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음 설레게 한 사람이며 지금껏 거들떠보지 않던 사내에 대한 다른 정의를 내리게 한 유일한 존재이다.
지난밤엔 거의 발가벗은 채 안겨서 잠들었다.
이제 이름까지 지어준다. 앞으로 테리나라는 별명은 현수만이 부르게 될 것이다. 남은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곧 누군가와 결혼할 남자이다. 따라서 혼자만 사모하는 외사랑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이 더없이 외롭고 슬플 수도 있다. 그래도 감내해 내리라 마음먹었다. 스스로 운명이라 여긴 것이다.
테리나의 이런 속내를 모르기에 현수는 맥주를 더 따랐다.
“이제 그만해요. 이따 또 마셔야 하잖아요.”
“난 괜찮아. 하지만 테리나가 권하니 이것만 마실게.”
“네. 우리 조용히 창밖의 설경 감상해요.”
“좋지. 저기 앉을까?”
현수가 가리킨 곳엔 창밖 풍경을 보라는 의도에서 배치된 소파가 있다. 2인용이다. 좌우에 협탁이 있는 걸 보면 거기 앉아서 술이나 음료수를 마시라는 뜻이다.
현수가 먼저 자리를 옮기자 테리나가 반쯤 남은 잔을 들고 따라온다.
“앉아.”
“네.”
언제부터인가 호칭이 달라졌다. 현수는 내내 반말을 하지만 동갑인 테리나는 여전히 존대이다.
“흐음, 좋군.”
“네, 정말 멋진 곳이에요.”
앉다 보니 테리나의 어깨에 팔을 얹을 수밖에 없다. 소파가 생각보다 작은 듯 느껴진 때문이다.
“우리 이렇게 좀 쉬어요.”
“그러지.”
현수는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테리나가 현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
너무나 긴장해서 피곤했는지 금세 졸고 있다.
“후후!”
기왕이면 편히 자라고 자세를 잡아주곤 토닥였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이 흘렀다.
* * *
“어서 오시라요. 좀 쉬었습네까?”
“네, 배려 덕분에 편히 쉬다 왔습니다.”
“이리 오시디요. 우리 공화국 인사들을 소개해 주겠습네다.”
“아, 네. 그러시지요.”
현수는 김정은이 소개해 주는 북한 인사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총리, 최룡해 총정치국장, 김격식 참모총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등이다.
권력 서열 1위부터 20위까지 빠짐없이 소개 받은 듯하다.
현수의 곁을 수행하듯 따라다닌 테리나 역시 북한 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테리나가 브레즈네프의 증손녀라는 말에 다시 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란 자리가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동생을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낸 드미트리 역시 파티에 참석해 있다.
챙챙―!
포크로 와인 잔을 두어 번 친 김정은이 입을 연다.
“자자, 오늘 이 자리는 우리 공화국의 발전을 위해 방문한 남조선의 김현수 전무이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함입네다. 다 같이 잔을 들어 김 전무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김현수 전무를 위하여!”
쭈우욱―!
모두가 단숨에 잔을 비운다.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들이 다시 잔을 채운다.
김정은이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다음은 당신이 건배를 제안해 보라는 뜻이다. 하여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공화국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의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위시한 여러분의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건배하겠습니다.”
“공화국을 위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 동지를 위하여!”
제각기 한마디씩 내뱉으며 잔을 비운다. 곧이어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이다. 흥겨운 연회에 딱 맞는 음악이다.
김정은은 부인인 리설주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를 하며 간간이 현수와 테리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볍게 눈짓을 한 김정은이 리설주와 왈츠를 춘다.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내빈들이 자리를 비워준다. 이때 춤추던 김정은이 현수를 손짓으로 부른다.
같이 추자는 것이다.
현수는 테리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왈츠를 추지 못 한다는 뜻이다.
“괜찮아. 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좋아요.”
테리나가 치마의 양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편다. 어디서 보기는 많이 본 모양이다.
손을 마주 잡자 현수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냥 내가 끄는 대로만 따라와. 자, 이제 간다.”
“어머, 어머머!”
당황한 듯하면서도 잘 따라온다. 두 쌍이 춤을 추자 원로라 할 수 있는 모두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때 그리고리 로그비노프가 부인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곧이어 누군가가 플로어로 들어선다.
잠시 후, 십여 쌍의 왈츠가 이어졌다.
배석해 있던 북한의 간부들도 하나둘 플로어도 들어선 것이다.
“휴우! 오랜만에 하니 힘들군요.”
“잘하시던데요? 오히려 저희가 버벅거렸습니다.”
현수의 말에 김정은이 빙그레 웃는다.
사실 현수와 테리나가 춘 춤은 왈츠가 아니다. 왈츠에 가까운 아르센 대륙의 춤이었다.
“아닙네다. 김 전무님 쪽이 훨씬 보기 좋았습네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하하! 당연한 말씀이십네다.”
이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현수는 주로 김정은과 함께했는데 장성택이 바로 곁에 앉는다.
테리나는 리설주와 따로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근데 김 전무가 말한 그거 정말 가능성이 있는 것입네까?”
“그거라니요?”
“목재 펠릿이라는 것 말입네다. 그게 진짜 공화국의 겨울을 충분히 버틸 수 있게 합네까?”
“물론입니다. 아까 설명 드린 대로 비용 대비 효율이 상당히 좋습니다. 실물이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은 없으니 조만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상당히 좋은데…….”
김정은이 말꼬리를 흐린다. 아직 미심쩍은 것이다.
“공화국엔 숙천유전이 있지 않습니까? 매장량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연료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겁니까?”
1997년 10월 북한은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전 공식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때 공개된 것은 1996년 여름에 작성된 유전 개발에 관한 영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1. 서조선만 분지(13,000㎢)에 원유 시추공 13개를 뚫었다.
2. 안주 분지(2,000㎢)에는 원유 시추공 3개를 뚫었다.
3. 동조선만 분지(3,500㎢)에는 원유 시추공 2개를 뚫었다.
4. 원유 매장량은 최소 588억 2,400만 배럴에서 최대 735억 3,000만 배럴로 추정한다(한국일보 1997년 1월 2일).
1997년 9월 캐나다 캔텍(Kantech)사는 서조선만 분지에 400억∼50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동남아시아 최대 산유국인 인도네시아의 원유 매장량이 50억 배럴이고, 지나가 자랑하는 발해만 유전의 매장량은 150억 배럴이다. 이쯤이면 아시아 최대 산유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