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2
이 회장의 말대로 미국에 밉보이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신중한 표정이다.
“그렇겠지요.”
신 사장부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 방해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룹 전체에 막대한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미는 당기는군. 천지유화를 설립할 찬스지.”
석유화학공업은 여러 파생 기업을 거느릴 수 있다.
타이어, 자동차, 섬유, 전자, 정밀 화학, 신발, 수지, 비료, 염료, 합성고무, 의약, 가소제 등 많은 합성제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또 다른 재벌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뭔가?”
“제가 콩고민주공화국에 이실리프 유화를 만들겠습니다. 이 회사가 북한에 진출하는 거고 천지그룹은 이실리프 유화의 주식 중 일부분을 갖는 형태 말입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주식을 많이 가질 수는 없을 거야. 미국은 바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 회사의 주식 배분은 어찌할 셈인가?”
“안전을 위해 분산시켜야죠. 천지그룹과 레드마피아의 지분도 있어야 합니다. 나머진 제가 갖죠.”
“흐음! 시간을 갖고 생각 한번 해보세.”
“그러세요. 다만 너무 오래 따져보진 마세요. 저 신혼여행 갔다 오면 곧바로 재입북해서 세부 사항 조율해야 하니까요.”
나중의 일이지만 천지그룹은 이실리프 유화의 주식 10%를 갖는다. 레드마피아가 10%를 갖고 북한이 10%를 갖는다.
이실리프 개발이 10%, 나머지 60%는 현수, 이리냐, 연희, 지현이 나눠 갖게 된다.
“그러세. 그나저나 점심 먹으러 내려가지. 배 안 고픈가?”
“네, 가시죠. 저도 좀 출출했습니다.”
이 회장, 신 사장, 그리고 현수가 8층에 마련된 구내식당에 들어서자 밥을 먹던 임직원 모두가 벌떡 일어난다.
“아아! 그냥 식사들 하게.”
미소 띤 이 회장의 손짓에 모두 꾸벅 절을 하고는 앉는다.
셋은 별도로 마련된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임직원들이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그런 것이다.
맛있는 된장찌개와 닭볶음탕으로 식사를 마치곤 외출했다.
회사 인근 양복점에 찾아가 결혼식을 위한 양복을 맞췄다. 턱시도가 아니라 그냥 깔끔한 디자인의 양복이다.
시간이 빡빡하다는 것을 알기에 보통 양복 값의 세 배를 지불하기로 했다.
다음은 한복집이다. 먼저 현수 본인과 이리냐와 연희, 그리고 두 분 장모님을 위한 것을 주문했다.
생각난 김에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 부부와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 부부의 것도 주문했다.
혹시 몰라 블라디미르 푸틴과 메드베데프 총리, 에티오피아의 기르마 올데 기오르기스 대통령의 것도 주문했다.
여기서도 시간이 없어 곤란하다 하였지만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사람을 더 동원하겠다고 한다.
다음엔 지현을 만나러 갔다.
“여기예요.”
“아! 내가 늦었지?”
“네, 조금요. 근데 왜 늦었어요?”
“예식용 양복과 한복 맞추느라.”
“어머! 그걸 이제 맞춰요?”
“어쩌겠어. 시간이 없었는데.”
“그렇게 바쁜데 밥은 챙겨 먹는 거예요?”
이제 곧 결혼할 신부라 신랑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이다.
“먹는 건 걱정하지 마. 굶고 다니진 않으니까.”
“알았어요. 옷 입고 올 테니 골라줘요.”
지현은 찜해두었던 웨딩드레스 네 벌을 교대로 입고 나와 패션쇼를 벌였다.
예쁜 얼굴과 뛰어난 몸매의 소유자인지라 모두 다 눈부시게 예뻐 보인다. 그래도 하나를 골라야 했다.
문득 예물이 떠올랐다. 하여 준비한 것들을 꺼내 패용토록 했다.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어머! 이 반지 너무 예쁘세요. 신부님은 좋으시겠어요. 근데 이거 진짠가요, 신랑님?”
웨딩숍 아가씨는 사전에도 없는 괴상한 존댓말을 쓰며 눈빛을 반짝인다.
이 일에 종사한 지 어언 6년이지만 5캐럿짜리 최상급 블루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은 처음 보기 때문이다.
“네? 아, 네.”
현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또 묻는다.
“신랑님, 이 반지 얼마쯤 하는 거예요?”
“네?”
“이거 3캐럿도 넘는 거죠? 그죠? 얼마 전에 어떤 모델이 시집을 갔는데 3캐럿짜리 반지를 받았대요. 그거 가격이 3억 5천만 원 정도이니 이건 엄청 비싸겠어요.”
현수는 반지 가격을 약 2억 정도로 추산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 말을 들어보니 아닌 듯하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귄지현은 친구들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국내에선 맘대로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기자들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갔을 때 까르티에 매장에서 반지의 진품 여부와 가격을 알아본다. 친구들의 등살을 이기지 못한 때문이다.
결과는 당연히 최상급 블루다이아몬드 진품이다.
카르티에 보석 담당 직원은 9억 원이란 엄청난 값을 매긴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현의 친구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현수가 블루 벨벳으로 감싸인 상자를 열자 목걸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지현보다도 웨딩숍 아가씨가 더 큰 소리를 낸다.
“와아, 이 목걸이도 정말 예쁘세요. 여기 달린 이 알은 뭐예요? 큐빅2)이에요? 아님 모이사나이트3)예요? 뭐죠?”
“글쎄요?”
현수는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목걸이의 알이 100캐럿이 넘는 진품 다이아몬드이며 가격은 330억 원쯤 한다고 하면 분명 언론까지 소문이 번질 것이다.
그 후의 귀찮음을 굳이 감당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또 한 번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것이다.
지현도 생각보다 알이 훨씬 크기에 눈빛을 반짝인다. 그것을 목에 거니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인조 다이아몬드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도 나중의 일이지만 지현과 친구들은 이 목걸이 때문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한다. 100캐럿이 넘는 최상품 다이아몬드이며, 330억 원을 훨씬 넘을 것이라는 말 때문이다.
이는 재벌가의 결혼식에도 등장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결혼 예물로 받은 것이다. 아니,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모두 합쳐도 이만한 다이아몬드가 예물로 쓰인 적은 없다.
지현이 목걸이를 패용하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흰 살결과 아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붉은 벨벳 상자이다. 뚜껑을 열자 빛이 반짝인다.
“어머! 이건 팔찌네요. 우와! 이 디자인 정말 독특하세요.”
웨딩숍 아가씨는 또 어법에도 없는 괴상한 존댓말이다.
어쨌거나 이 팔찌는 안쪽에 마법진이 새겨지기에 미스릴이 주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바깥쪽에 박힌 스물네 개의 1캐럿짜리 블루다이아몬드와 여섯 개의 오렌지 다이아몬드는 휘황찬란하게 빛을 반사시킨다.
“신랑님, 이거 너무 예쁜데 어디서 세공하신 거예요? 프랑스의 부쉐론이세요? 혹시 반 클리프 앤 아펠인가요?”
“네?”
“아니면 미국의 티파니세요? 아니다. 이태리의 다미아니, 또는 팔미에로일 수도 있겠네요.”
이 아가씨는 자신이 들어본 브랜드는 다 대는 모양이다.
“참, 영국의 영국 브랜드 드비어스나 스테판 웹스터일 수도 있겠어요. 어쩜 독일의 니씽일 수도 있겠구요. 설마 스페인의 카레라 카레라 제품인 건 아니지요?”
아가씨가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할 때 지현은 지긋한 눈빛으로 팔찌를 바라보고 있다.
전에 현수가 사진으로 보여주었을 때 수부 다이아가 박힌 가느다란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이것 역시 나중에 감정을 받는다. 최상급 다이아몬드 30개가 박힌 이것의 가격은 7억 5천만 원이다.
물론 지현의 친구들은 부러워 죽는다.
지현이 팔찌를 착용하자 초록색 벨벳 상자의 뚜껑이 열린다.
“우와! 이것도 대단해요. 어쩌면 이렇게 예쁘죠? 신부님은 좋으시겠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받으시니. 그죠?”
“그럼요. 네, 좋아요.”
지현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여자치고 보석 싫어하는 사람 드물다. 그런데 지현이 그중 하나였다.
지금껏 보석 보기를 돌 보듯 했다. 하여 흔한 반지나 목걸이조차 별로 없다. 있어도 다 모조품이다.
그런데 눈앞의 것들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안목이 낮거나 없어도 이 정도는 확실하게 알아보는 것이 여자라는 생물의 본능이다.
100억을 가뿐히 넘길 브로치 때문에 웨딩숍 아가씨는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문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티아라다. 작은 보석들이 깨알처럼 박힌 이것은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다.
과연 아르센 대륙 노스크 왕국의 공주들에게 주어질 만한 것이다. 현수 역시 너무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다.
웨딩숍 아가씨는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티아라는 본 적이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파리에서는 이것의 가격을 120억 원으로 책정한다. 물론 매입가이다. 다시 말해 소매가는 120억을 넘는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모든 예물에 어울릴 웨딩드레스를 골랐다.
면사포만 떼어내면 평범한 원피스로 보인다. 신부가 너무나 예쁘기에 굳이 화려한 드레스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웨딩숍 특유의 할로겐 조명과 예물이 어울려 지현을 휘황찬란한 빛 속에 서 있게 했다.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섹시하고 우아하며 기품이 넘쳤다.
현수는 저 아름다운 여인이 내일이면 아내가 된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수 씨, 되게 피곤하시죠? 남자들은 이런 거 할 때 아주 힘들어한다던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평생에 단 한 번인데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고마워요. 많이 바쁠 텐데 귀한 시간 내줘서.”
“무슨 소리! 사랑하는 지현일 위한 시간인걸.”
“아무튼 고마워요. 근데 우리 어떻게 나가죠?”
밖에는 파파라치 버금갈 기자들이 득실대고 있다.
현수와 지현이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왔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주변 교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몰려온 것이다.
덩달아 길 가던 사람들까지 기웃거린다.
그들에게 있어 천지건설 부사장으로 고속 승진한 현수는 어떤 탤런트나 영화배우보다도 관심이 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게. 쉽게 못 빠져나갈 것 같은데 어쩌지?”
“어쩌긴요. 기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좀 쉬었다 나가요.”
“그래, 그럼.”
둘은 웨딩숍에서 제공한 휴게실에서 음료를 들이켜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현이 어떤 웨딩드레스를 골랐으며 어떤 예물을 받았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여성 잡지 기자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취재를 해야 한다.
특히 지현이 받은 예물은 반드시 고화질 접사로 찍어가야 한다.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찍어간 하나하나의 예물마다 전문가들의 품평이 곁들여질 것이다. 이게 게재된다면 여성 잡지는 공전의 발행 부수를 기록할 수도 있다.
곧 있을 현수의 결혼식이 9시 뉴스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평범한 사원으로 입사하여 불과 2년 만에 부사장까지 올라갔다. 굵직굵직한 공사를 수주한 결과이다.
신부는 현직 고검장의 외동딸로서 행정고시를 패스하여 5급 사무관으로 재직 중인 재원이다. 게다가 절세미녀이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모르긴 해도 예물을 만든 보석상은 문전성시를 이루는 호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현은 완판녀로 등극되어 패션 리더가 될 것이다.
* * *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십시오.”
“그래. 그러지.”
현수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자 권철현 고검장과 안숙희 여사가 흐뭇하다는 표정이다.
현수가 큰절을 올리자 권 고검장과 안 여사는 가볍게 고개 숙여 반절을 한다. 사위를 맞는 예절이다.
“아버님, 어머님, 곱게 키운 지현일 제게 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생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어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