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7
“알았어요. 평생 할게요.”
예상된 답변이기에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건 맘대로 해. 바디체인지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따로 잘 거야. 왜 그런지는 설명 안 해도 알지?”
“네, 그럼요.”
그 아흐레 사이에 결합을 했다가 임신이 되면 바디체인지의 효과를 볼 수 없다. 모든 기운이 태아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운이 과하여 착상된 태아는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없다. 낙태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들을 안고 싶어. 하지만 참을 거야.”
“네, 알았어요.”
세 여인은 기대했던 첫날밤이 최소 열흘은 뒤로 밀렸지만 전혀 아쉽다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눈빛을 반짝이며 흥미로워한다.
70살까지 20대의 미모를 유지한다는데 왜 안 그렇겠는가!
게다가 지금보다 더 예뻐진다고 한다.
이만한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열흘 아니라 십 년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마음이다.
“아무튼 오늘은 우리 첫날밤이야. 그러니 그냥 잘 수는 없지.”
“네? 그러면 안 된다면서요?”
지현의 말에 모두가 왜 이러느냐는 표정이다.
“왜들 이래? 나하고 같이 자기 싫어?”
“……!”
여자들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
“싫으면 말아. 난 신혼 첫날이니까 여기서 다 같이 자자고 한 건데. 침대 넓잖아.”
“어머, 그거였어요? 호호, 난 또 그런 줄 모르고. 그래요. 여기서 다 같이 자요.”
“네, 다 같이 자요.”
“근데 잠자리에 들기에 조금 이르지 않아요? 엘린이나 시녀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맞아요. 어쩌면 당신을 짐승으로 여길지도 몰라요.”
“호호! 그래요. 하룻밤에 세 신부를 어쩌려고 초저녁부터 불을 껐다, 이런 소문 나돌아요.”
여자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아무튼 난 피곤해서 잘 거야. 내일 아침 일찍 융프라우로 가야 하니까.”
현수가 벌렁 누워버리자 셋이 눈치를 본다.
“언니, 제가 불 끌게요.”
이리냐가 불 끄러 간 사이에 지현과 연희가 양쪽을 차지하고 안긴다.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성욕을 자극했지만 꾹 참았다.
“칫! 내 자린 없네. 언니들 너무해요. 불 끄러 간 사이에.”
이리냐가 투덜거린다. 진짜 삐쳐서 이런 건 아니다. 그래도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이리냐는 현수 씨 위로 올라가. 그럼 되잖아.”
“어머! 진짜 그러면 되겠네요. 헤헷!”
진짜로 이리냐가 올라탄다.
“으윽!”
예상치 못한 무게감이다.
“이리냐, 요즘 쉐리엔 안 먹어?”
“네,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결혼하면 체중이 좀 늘어야 한대요. 그래야 뱃속 아기한테 좋고 애도 잘 낳는다구요. 그래서 7㎏ 늘렸어요. 잘했죠?”
“에구!”
킨샤사 저택의 침실에선 한동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잠이 든다.
“딥 슬립! 다들 좋은 꿈 꿔.”
세 여인을 나란히 눕힌 현수는 각각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줬다. 평생을 같이할 반려들이기에 아주 소중히 다뤘다.
저택의 이 층은 내일 새벽까지 어느 누구의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황홀하면서도 뜨거울 신혼 첫날밤을 위한 배려이다.
현수는 잠옷 차림으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저택 2층엔 현수와 지현, 연희, 그리고 이리냐를 위한 공간만 있다. 강진숙 여사와 안나는 빈관으로 처소를 옮겼다.
앞으로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각각의 방 천장에 항온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할 것이다.
출입구엔 초음파 발생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쥐는 물론이고 바퀴벌레나 모기 같은 곤충과 해충을 출입 금지시킨 것이다.
여자들이 질색하는 뱀도 못 들어온다.
또한 에어 퓨리파잉 마법진도 그렸다. 공기 오염이 거의 되지 않은 나라이지만 좋아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다.
“흐음! 여기 온 지 너무 오래되었어. 저쪽 세상에 한번 가보고 올게.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거야. 새벽에 올 거니까.”
현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날짜 계산을 했다. 지구로 귀환한 것은 12월 15일이다.
지난 열흘간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안 챙겼네. 텔레포트!”
몇 번의 텔레포트로 서울에 당도했다. 다시 텔레포트하여 설치했던 쥐틀 스물한 개를 모두 회수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바글바글하다. 서울의 하수도에 이처럼 많은 쥐가 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아무튼 되었군. 마나여, 나를 아르센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어라? 방금 여기 누가 있는 것 같았는데.”
추위를 피해 하수도로 내려온 노숙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나저나 요즘은 쥐새끼들이 싹 사라져서 살 만하네.”
밖에서 주워온 박스를 펼치며 중얼거린다.
같은 순간 현수의 신형은 캐러나데 사막 디오나니아 서식지 인근에 나타난다.
“흐음, 여긴 여전하군.”
비라도 내렸는지 두 개의 호수엔 물이 가득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라니야와 얀디루가 우글거린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이 떠오른다.
사막을 거쳐 오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둘 중 남자는 쏘러리스의 뿔에 받혀 죽을 뻔했다.
여자의 경악에 찬 비명에 놀라 피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샌드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이곳에 당도했다.
그런데 목욕을 하다 얀디루가 요도를 타고 들어가는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당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지. 뭐든 사람이 중심이거든. 어떤 것이 썩을 때 그걸 먹을 수 있으면 발효라 하고 못 먹으면 부패라 해. 나도 인간이야. 그래서 너희를 두고 볼 수 없어. 메가 라이트닝!”
번쩍번쩍! 번쩍번쩍!
콰쾅! 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쾅!
수백 줄기의 번개가 두 개의 호수에 작렬했다. 대낮임에도 세상이 멸망하려는 조짐처럼 보일 정도로 빛이 난무했다.
잠시 후, 수면이 하얗게 변한다.
벼락 맞은 라니야와 얀디루가 떠오른 것이다.
“빅 핸드!”
마법으로 수면 위의 물고기들을 걷어냈다.
“플라잉 브랜켓!”
마법 담요가 생성된다. 이전과는 크기가 다르다.
얀디루와 라니야를 올려 디오나니아 서식지 곳곳에 뿌려놓았다. 다음은 쥐틀이다.
“아공간 오픈!”
스물한 개의 쥐틀을 꺼내놓고 닫혀 있던 출구를 열어놓자 쥐들이 우르르 몰려나간다. 지난 며칠간 굶어서 그런지 생선 비린내에 환장한 듯 곧바로 달려간다.
그와 동시에 디오나니아 잎사귀들이 펄럭이기 시작한다.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지나 국안부 3국장 종위를 비롯한 요원들의 시신을 꺼내 먹이로 제공했다. 탈북 여성을 괴롭히던 녀석과 인신매매단의 것도 주었다.
디오나니아 입장에선 졸지에 시작된 잔치인 셈이다.
쥐는 대부분 생선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찍찍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놓아줄 디노나니아가 아니다.
잠시 장관을 살펴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저기 디오나니아 새싹이 보인 때문이다.
“그래, 실컷 먹어라. 며칠 있다 와서 잎사귀 좀 뜯을 테니. 그럼 이제 테세린으로 가볼까?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현수의 신형이 흩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오나니아들은 시작된 잔치를 열심히 즐기는 중이다.
분명 살육의 현장이다. 그런데 전혀 잔인해 보이지 않는다.
쥐들을 씹어 삼키거나 찢어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시신 역시 커다란 잎사귀에 감겨 보이지도 않는다.
7장 마법사가 목욕물 데우는 법
“발루네, 잘 있었는가?”
“헉! 배, 백작님! 아니, 마탑주님!”
현수를 본 이레나 상단 테세린 지부 수문위병 발루네가 대경실색한다. 그리곤 이내 무릎을 꿇는다.
쿵―!
“어허, 왜 이러나?”
“가, 감히 마탑주님이신 줄도 모르고 무례한 소인을 부,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땐 정말 죄, 죄송했습니다.”
발루네는 바들바들 떤다. 맨 처음 현수가 방문했을 때 쫓아냈던 기억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 어서 일어나게.”
“저, 정말 소인을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어서 일어나게. 그나저나 로시아는?”
“네,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론 절대 무례치 않겠습니다, 마탑주님!”
“그래, 알았네. 수고하게. 참, 이건 이따 저녁 때 동료들이랑 술이나 한잔하게.”
팅∼!
현수의 손을 떠난 금화 한 닢이 발루네의 품으로 날아든다.
“이, 이런 거 이제 안 주셔도 됩니다. 그저 마탑주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인은 영광이옵니다.”
“그래? 근데 옷 좀 빨아 입게. 냄새 나네. 스테츄!”
갑자기 눈알조차 굴릴 수 없게 되자 발루네는 덜컥 겁이 났다. 마법사들은 성질이 더러워 조금만 잘못해도 죽인다.
겉으로 웃는 척하면서 갑자기 불에 태워 죽이거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에 잔뜩 쫄아든 표정이다.
“워싱! 클린! 이런 찌든 때군. 그럼 한 번 더 워싱! 클린!”
발루네는 온몸을 휘감는 물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찬물로 목욕하기엔 쌀쌀한 날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매직 캔슬! 자, 이건 수건이네. 초소 안에 들어가 옷을 벗어서 내놓고 이걸로 물기를 닦게.”
“네?”
“어서!”
“아, 네에.”
후다닥 경비초소 안으로 들어가 속옷까지 몽땅 벗어 창틀에 넌다. 현수는 마법 한 방으로 간단히 건조시켜 줬다.
“그럼 경비 잘 서게.”
발루네가 나오기 전 현수의 신형은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발루네는 존경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현수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인다. 마음 씀씀이에 감복한 것이다.
옷을 입은 채로 의복은 세탁되었고 몸은 목욕이 되었다. 찌든 때가 다 사라져 의복은 새것 같고 몸은 가뿐하다.
근무 끝나면 동료들과 술 한잔하라고 용돈까지 주셨다. 아랫사람이 아니라 가족같이 여겨준다 느낀 것이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소인, 늙어 죽는 날까지 존경하고 또 존경하겠습니다요.”
발루네가 이러는 걸 눈치라도 챘는지 현수는 손을 흔든다.
“멈추시오! 여긴 본 상단에 용무가 없는… 헉! 마탑주님!”
“아! 토마스와 투토! 잘들 있었는가?”
현수와의 대련 덕분에 B급 용병 토마스는 A급에 이른 것이다. 본시 A급 용병이었던 투토는 중급과 상급 사이에 있던 화후가 상급과 최상급 사이로 올라갔다.
이 모든 것이 현수의 덕이다. 그렇기에 존경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느닷없는 소문에 둘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턱은 빠져 버렸다.
하인스 백작이 전 대륙 마법사들의 로드인 이실리프 마탑주이며 그랜드 마스터라는 말이 전해진 것이다.
하여 틈만 나면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아쉬워했다.
마탑주이면서 그랜드 마스터이니 충성 맹세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마다 토마스가 말했다.
“형님, 백작님께선 카이로시아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겁니다. 그럼 또 뵙게 될 기회가 있겠지요. 그때가 되면 앞뒤 잴 것 없이 무릎부터 꿇읍시다.”
“무릎을 꿇어? 왜?”
“형님, 충성 맹세 안 하실 겁니까? 자그마치 그랜드 마스터이십니다. 한 수만 더 배우면 형님도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최상급이 되구요. 그래도 안 해요?”
“아, 아니! 다, 당연히 해야지. 충성 맹세 꼭 하세. 알았지?”
“당연합니다. 다음에 뵈면 무조건 꿇는 겁니다.”
“그래, 그러세. 뵙자마자 꿇으세.”
이렇게 대화를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둘은 얼빠진 얼간이처럼 현수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