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8
믿어지지 않아서이다.
“왜 대답이 없는가? 어디 아픈가? 표정들이 왜 그런가?”
“아, 아닙니다.”
“그,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둘 다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그럼 카이로시아 안에 있지? 들어가겠네. 근무 잘 서게.”
“네? 아, 네. 들어가십시오.”
“그래, 수고!”
뚜벅, 뚜벅, 뚜벅!
현수가 복도를 따라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둘의 몸이 어느 순간 스르르 무너진다.
쿵! 쿵―!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목숨 바쳐 충성합니다.”
불행히도 이 소리는 현수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카이로시아의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 허락 없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낀 카이로시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다.
“어머! 마, 마탑주님!”
“로시아도 날 그렇게 부를 거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카이로시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현수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리더니 묻는다.
“세상에!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반갑지 않은가 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속였어요? 왜요? 왜!”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반문할 때의 표정이다.
“속인 게 아니라 말을 안 한 거지.”
“나이는 몇 살이에요? 설마 200살도 넘고 그런 거 아니죠?”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200살이 아니라 300살이 넘었으면…….”
“네? 저, 저, 정말요? 정말 300살도 넘은 거예요?”
“나이가 뭐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죠. 저 아직 꽃다운 나이예요. 근데 100살도 아니고 300살도 넘은…….”
“그럼 무르자.”
짐짓 시니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 하셨어요? 저하고 있었던 일을 모두 되돌리자구요? 그럼 내 순정은요? 백작님, 아니, 마탑주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시간은요? 못해요. 안 해요. 억울해서라도 못 그래요. 저 정말 백작님을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그냥 지내면 되잖아. 지금까지처럼.”
“어떻게 그래요? 우리 아빠보다도 수백 살이나 많은데. 설마 몇 년 살다 죽고 이러는 거 아니죠?”
“내가 그럴 거 같이 보여?”
“저 과부되기 싫어요. 나하고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네? 근데 진짜 몇 살이에요?”
300살이 넘었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이다. 이쯤해서 장난을 접어야 한다.
그렇기에 빙글빙글 웃던 표정을 바꿨다.
“나 이제 스물아홉 살이야. 해가 바뀌면 서른이 되지.”
“네? 거짓말! 229살인 거예요, 아님 129살인 거예요?”
“진짜 스물아홉이야.”
현수의 표정을 읽은 카이로시아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진다.
“정말인 거예요? 정말 젊은 거예요? 그럼 저하고 아주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는 거예요? 네?”
“그래. 오래오래 같이 살자. 근데 로시아가 나만큼 오래 살 수 있을까?”
현수의 표정을 읽은 로시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왜요? 9서클 마스터에 그랜드 마스터가 되면 몇 살까지 사는데요?”
“700살쯤 될 거야. 그러니 앞으로 670년쯤 더 살지.”
“네에? 뭐라고요?”
카이로시아의 눈이 더 커진다. 정말이냐는 표정이다.
“일단 로시아가 150살까지 살도록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은 찾았어.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내가 연구해 볼게.”
“정말요?”
“그래. 아무리 못 살아도 300년은 더 살게 해줄게.”
다소 안심된다는 표정이다.
“쳇! 그래도 절 속인 건 용서 못해요.”
“이리 와. 한번 안아줄게.”
“……!”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품으로 파고든다.
“으읍!”
길고 긴 키스 타임이 이어졌다. 로시아는 현수의 무릎에 앉은 채 품에 안겨 있다.
“영지전은 어떻게 된 거예요? 자기야가 힘쓴 거예요?”
“그래. 케일론 영지 칼멘 후작에게 적절한 경고를 해줬지.”
“대단하세요. 정말이요.”
로시아는 감탄했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현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정스레 입을 연다.
“공국에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라는 것이 있다면서요?”
“있지.”
“예쁘던가요?”
“예쁘냐고? 응, 예쁘긴 예뻐.”
이건 객관적인 관점에서의 판단이다.
“거기 공주님도 있고 공작가의 영애도 있다면서요?”
“그래. 소피아는 제1왕후의, 아이리스는 제2왕후의 공주야. 아그네스는 로레알 공작의, 이사벨은 필립스 공작의 손녀지.”
“나머지 둘은요?”
“나오미는 할렌 후작의 손녀, 마샤는 화이트 후작의 딸이야.”
“나이는요? 저보단 어리죠?”
“그럼. 소피아 15세, 아이리스 16세, 아그네스 17세, 이사벨 18세, 나오미 19세, 마샤가 20세야.”
현수는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며 카이로시아를 살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처럼 묻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럼 제가 제일 맏언니군요.”
“맏언니? 그래, 그렇지. 로시아가 나이가 많으니.”
“알았어요. 앞으로 잘 보살필게요.”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보살펴? 누가 누굴?”
“누구긴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있는 백작님의, 아니, 자기야의 여인들이죠. 투기 안 하고 잘 지내볼게요.”
카이로시아는 여섯 여인 전부를 현수의 처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로시아, 그들은 내 아내가 아니야. 그러니 그럴 필요 없어.”
“정말요?”
눈빛을 반짝인다.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다는 것이 한국 속담이다.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사실에 세 가지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신분을 속였다는 것이다.
9서클 마스터에 그랜드 마스터면서 아닌 척했다. 먼 길 떠난다고 걱정하고 그럴 때 속으로 얼마나 웃겼겠는가!
둘째는 나이가 200살도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겉보기엔 팔팔한 청년이지만 속은 다 썩어문드러진 노인일지도 모른다. 며칠만 안 씻으면 노인 특유의 토할 것 같은 살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셋째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여자가 여섯이나 있다는 것이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공주가 둘, 공작가 둘, 후작가 둘이다. 백작의 딸인 자신보다 계급은 높고 나이는 어리다.
이곳에 들려면 첫째 조건이 나이와 미모라고 한다. 어리고 예뻐야만 들어갈 수 있다.
당연히 엄청 아름다울 것이다.
은근히 질투심이 샘솟았다. 그러다 체념했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매지션 로드이다. 제국의 황제라도 예를 갖춰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겐 당연히 많은 여인이 따라야 한다. 우수한 종자를 얻어 훌륭한 인재로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르센 대륙 전체에 이득이다.
결국 모든 것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잘 지내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해야 1점이라도 더 점수를 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아니라고 한다. 하여 눈빛을 반짝이다가 이내 사그라뜨렸다. 아직은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튼 잘 지낼게요. 걱정 마세요.”
“아니라니까.”
“알아요, 아직 아내가 아닌 거. 그래도 잘 지낼게요. 진짜 잘 지낼 수 있어요. 근데 저도 거기 들어가서 살아야 해요?”
“어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
“네. 저하고 로잘린도 거기로 가야 하는 거죠?”
어서 대답해 보라는 표정이다.
“아니. 우리가 결혼하면 테리안 왕국의 알베제 마을이란 곳에서 살게 될 거야.”
“테리안의 알베제요?”
거긴 또 어디냐고 말없이 눈빛으로 묻는다.
“그래. 거기에 영토를 조금 얻었어. 테리안 왕국에…….”
현수는 테리안 왕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럼 거긴 아무것도 없는 데잖아요.”
“지금은 화전민밖에 없지. 하지만 성도 지어지고 집도 지어질 거야. 로시아는 이곳에 머물다 웬만큼 되면 같이 가면 돼.”
왠지 현수가 말을 하면 금방 이루어질 것 같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궁금해요. 자기야가 마음에 들어 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평범한 곳이야. 다만 깊은 산속에 있어서 경치는 좋지.”
“아무튼요. 참, 오늘 여기서 주무실 거죠? 또 가야 해요?”
“아니. 여기서 잘 거야. 로시아랑.”
“어머! 정말요?”
근데 표정이 오묘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목욕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어서.”
현수는 잘 오지도 않고 온다고 해도 후딱 가버린다.
이제 겨울이 되었으니 물을 데워야 목욕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여러 사람이 수고해야 한다.
나무를 베어오고, 그걸 말린 다음 장작으로 패고, 개울까지 가서 물을 떠다 큰 솥을 채워야 한다.
하녀들은 땀 흘리며 몸을 닦아주어야 한다.
카이로시아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입장이지만 그들의 노고를 늘 생각한다. 하여 당분간은 목욕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목욕 안 한 지 며칠 되었다. 분명 냄새가 날 것이다.
이 상태에선 현수의 품에 안길 수 없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울상이 되었다.
“로시아, 내가 방금 발루네를 옷 입은 채 목욕시키고, 의복 전부 세탁해 줬는데 로시아도 그렇게 해줘?”
“네? 어떻게요?”
목욕과 세탁을 동시에 했다니 방법이 궁금한 것이다.
“어떻게 하긴, 마법을 썼지. 근데 물이 조금 차가울 거야.”
“정말요? 전 괜찮아요. 참을게요. 저도 해주세요.”
“아냐. 그러지 마. 물만 있으면 목욕물 데우는 거 쉬우니까.”
“어머! 그래요? 그럼 부탁드려요.”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저쪽이요.”
카이로시아가 안내한 곳은 전용 욕실이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물통에 찬 물이 가득 담겨 있다.
“히팅!”
현수의 말 한마디에 금방 따끈해진다. 마법사가 목욕물을 데우는 방법은 말 한마디면 된다.
참 세상 살기 편하다.
“저 목욕 좀 할게요.”
“그래. 밖에서 기다리지.”
“아뇨. 멀리 가지 마세요. 그냥 거기 계세요.”
혹시라도 현수가 훌쩍 가버릴까 싶은 모양이다.
“그래, 그럼.”
목욕실은 한국처럼 별도로 꾸며진 게 아니다.
구석에 커다란 물통을 놓고 시선을 차단할 일종의 칸막이를 설치한 것이 전부이다. 그것도 천장까지가 아니라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높이이다.
“거기 있죠?”
목욕을 시작하고 5분쯤 흘렀을 때 카이로시아가 묻는다. 혹시라도 가버릴까 싶었던 모양이다.
“그럼. 어디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마.”
대답을 하며 현수는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를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늘 떠나고 없는 사람이었다.
남자 친구를 필요로 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지현과 연희는 친구가 많다. 당연히 둘의 남친이 누군지 엄청 궁금해했을 것이다.
샐러리맨의 전설인 김현수가 내 남자 친구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겠는가! 여자들에겐 남들에게 자신의 것을 자랑하고픈 본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고 결혼했다. 생각해 보니 배려가 부족했다. 로시아나 로잘린도 그럴 것이다.
귀족가의 영애들을 사교계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잘난 남자 하인스 백작이 내 남편이 될 것이란 자랑을 왜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로잘린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 쳐도 카이로시아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르센엔 없는 온갖 희한한 물건을 꺼내놓는 제국의 백작이 미래의 남편이라는 자랑을 얼마나 하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그럴 기회를 한 번도 못 줬다. 미안하다. 그렇기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욕 금방 끝나니까 어디 가지 마세요?”
“걱정 마. 그리고 목욕 오래 해도 돼. 그러니 천천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