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89화 (589/1,307)

# 589

“고마워요.”

다소 안심된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다. 현수는 본인이 지금껏 나쁜 남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없이 선량한 척하고 쿨한 척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한 이기적인 남자였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뭐 재미있는 얘기 없어?”

상대가 말을 하는 동안 자리를 비우는 남자는 거의 없다. 있다면 그놈은 개새끼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꺼낸 말이다.

“재미있는 얘기요? 아, 있어요. 카이엔 제국에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일이에요.”

카이엔 제국이라면 스승인 멀린이 도와 건국된 나라이다. 나뭇잎 사이로 한 자루 장검과 마법사의 스태프가 교차하는 모습을 국가의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검은 초대 황제인 알렉산더 폰 카이엔을 의미하고 스태프는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을 의미한다.

제국이 두 사람의 합작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황제가 된 알렉산더 폰 카이엔은 멀린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절대사면 반지를 주었다.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제국에 어떠한 위해를 끼치던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이다.

그 위해엔 반역이나 쿠데타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누가 봐도 죽을죄라 할지라도 절대사면 반지를 끼고 있으면 그 횟수에 제한 없이 사면한다는 것이다.

스승의 도움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제국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니 귀를 기울였다.

“무슨 얘긴데? 말해줘.”

“네. 카이엔 제국에 밀 거래로 거부가 된 사람이 있어요.”

“밀거래? 그럼 밀수를 했다는 거야?”

“아뇨. 밀을 거래한다는 뜻이에요.”

“그래. 그런데?”

“그 사람에겐 아내가 있어요. 모두들 사모님이라 부르죠.”

“그런데?”

현수는 이야기 끝마다 추임새를 넣었다. 어디 가지 않고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카이엔 제국의 밀 전문 상단이 여타 상단에 비해 많은 돈을 번 것은 그것을 가루로 내어 판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가가치를 생성시켜 일반 밀에 비해 비싼 값을 받았다.

이 상단의 이름은 영사우스 상단이다.

상단주는 프레지던 판 윌로우(Willow)이고, 사모님이라 불리는 상단주 부인은 로드선 판 윌로우이다.

참고로 윌로우라는 말의 어원은 버드나무이다.

이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작위를 샀다. 돈으로 카이엔 제국의 자작이 된 것이다.

부부에겐 딸이 하나 있다. 이 딸이 성장하여 혼인을 하게 되었다. 사위는 제국의 사법 관료 중 하나이다.

가장 낮은 작위인 남작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이다.

자작 부인 로드선은 사위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바람피운다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자작의 딸과 사위가 결혼하기 전 이들을 연결해 준 매파가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자작은 사위에게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주었다.

이럴 경우 매파에게 10% 정도 사례금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짠돌이 사위는 이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매파가 로스선 자작부인에게 사위에게 불륜 관계인 여자가 있다는 제보를 한 것이다.

로드선 부인이 보기에도 본인의 딸은 너무나 못생겼다.

그렇기에 이 제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여 수하들을 풀어 사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토록 하였다.

로드선 자작부인이 지목한 불륜 상대는 사위의 사촌 여동생이며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다. 사위처럼 장차 사법 관료가 되기 위해 오로지 공부만 하고 있다.

어쨌든 감시자들은 무려 2년이나 미행했으나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미행 및 감시자의 숫자를 늘렸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모님은 이를 믿지 않았다.

둘이 너무도 은밀한 만남을 가지면서 불륜을 자행하고 있기에 현장을 잡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결국 두 명의 어쌔신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아카데미 여학생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녀의 주검은 참혹했다.

칼로 얼굴을 찔러 살해한 때문이다.

분노한 여학생의 부친이 범인 검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결국 다른 영지에 도피해 있던 범인 둘을 검거했다.

즉시 제국 법정에 회부되었고, 사모님은 살인 교사 혐의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불의를 깨고 정의가 이긴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 끝나는 듯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었다.

문제의 사모님이 감옥에 있지 않고 신전에서 호화 생활을 하고 있다가 발각된 것이다.

즉각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몇 가지 사실이 알려졌다. 사모님의 병은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첫 번째이다.

이에 대한 조사를 해본 결과 신전의 신관이 의도적으로 중병에 걸린 것으로 서류를 조작했다는 것이 두 번째이다.

셋째는 조작되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 이 서류를 바탕으로 제국의 귀족 가운데 일부가 사모님의 가석방을 연속해서 허가했다는 것이다.

한두 번이면 그럴 수 있다거나 실수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서류를 확인해 보니 무려 38회나 가석방을 허가했다.

나중엔 신전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가석방 기간을 늘렸다. 그리곤 시녀 딸린 초호화 신전 생활을 한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카데미 여학생의 부친이 이의를 제기했고, 소문이 번지면서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카이엔 제국에서 최근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의 전말이다.

“들어보니 어때요?”

“문제가 많은 것 같군.”

“그죠? 저도 소문을 접하고 화가 많이 났어요. 이런 여자를 살려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로시아가 만일 판관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으음! 제가 판관이라면 로드선 자작부인은 사형이에요. 그 남편의 돈과 작위를 이용한 거니까 남편의 재산 몰수와 작위를 박탈해야죠.”

“그게 끝이야?”

“아뇨. 몰수된 재산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아카데미 여학생의 부모에게 줘야 해요. 그리고 자작의 사위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적시하지 않은 죄를 물어 직위를 박탈해야 해요.”

다소 흥분한 듯한 음성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열이 뻗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이 진행되지 않지?”

“자작이 돈과 작위를 이용하는 모양이에요.”

“그래? 알았어. 로시아가 바라는 대로 되도록 해줄게.”

들어보니 너무나 부당하다. 그렇기에 이런 대답을 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 가시면 안 돼요.”

“그래, 알아. 걱정 말고 씻어.”

“네, 금방 끝낼게요.”

여인이 목욕하는 소리는 사내의 무엇인가를 심하게 자극한다. 그렇기에 현수는 잠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8장 마나석 만들기

“다 했어요. 저 예쁘죠?”

목욕을 마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온갖 치장을 다 한 듯 화사해 보인다.

“로시아는 화장 안 해도 예뻐.”

“고마워요. 예쁘게 봐주셔서.”

와락 품에 안기는 로시아의 교구를 껴안으며 현수는 행복감을 느꼈다. 지구의 세 여인, 그리고 아르센의 두 여인 모두 지극히 헌신적이다. 이러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로시아, 사랑해.”

“…저도요. 자기야를 죽도록 사랑해요.”

“내가 제국의 백작이라서? 아님 이실리프 마탑주라서?”

“그런 거 상관없어요. 자기야가 노예라 할지라도 전 사랑해요.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요.”

“이런, 목숨까지 내놓으면 안 되지.”

현수는 로시아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여행은 언제 끝나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자기야를 이렇게 매일 안을 수 있으니까요.”

“곧 끝날 거야. 아드리안 공국의 위기만 해소되면 그때부턴 늘 같이 있을 거야.”

30일 이내에 지구와 아르센 대륙을 왔다 갔다 하면 시차가 없기에 한 말이다.

“기다릴게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아아, 행복해요.”

품을 파고드는 로시아의 교구를 꼭 끌어안았다.

“에델만 백작님은 언제 만나게 해줄 거야?”

“네? 아버지요?”

“그래. 허락을 받아야 우리 로시아를 매일 이렇게 꼭 안아줄 수 있으니까. 얼른 뵈어야지.”

“……!”

진심이 느껴졌는지 로시아의 팔에 힘이 더해짐이 느껴진다.

“오빠가 일루신 에델만 드 로이어라고 했지?”

“네, 작은오빠예요. 카이엔 지부장으로 근무 중이에요. 큰오빠는 에머랄 에델만 드 로이어고 본점 서기예요.”

“장인어른 성함은?”

“네? 장인이요? 아, 아버지의 성함은 퍼거슨 에델만 드 로이어예요.”

“퍼거슨 에델만 드 로이어? 한번 뵙자고 말씀드려.”

“정말요? 정말 아버질 만나실 거예요?”

“당연하지! 귀한 딸을 주십시오, 해야 하니까.”

“아! 고마워요.”

카이로시아가 현수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감격스러워한다. 아르센 대륙엔 이런 살가운 마음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이따 저녁 먹어야지?”

“어머! 배고프세요? 주방 시녀 부를까요?”

조금이라도 출출하면 안 된다는 듯 호들갑이다.

“아니. 지금은 배 안 고파. 그냥 오늘 메뉴가 뭐냐는 거지.”

“글쎄요. 안 물어봐서.”

주방에서 준비해 주는 대로 먹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내 솜씨 알지?”

“어머! 정말요? 기대돼요. 오늘은 또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실지. 음식 맛을 보면 정말 마법사 같아요. 정말 맛있거든요.”

“그래? 기대해. 근데 나 잠시 나갔다 와도 되지?”

“네? 어딜 가시려고……?”

이러다 훌쩍 떠날까 싶은 트라우마라도 있는가 싶다.

“로니안 자작님을 뵈려고. 어떻게 된 건가는 설명해 드려야 발 뻗고 주무실 테니. 안 그래?”

“그럼요. 얼른 다녀오세요. 올 때 로잘린 동생도 데려오세요. 같이 저녁 먹게.”

“오케이! 갔다 올게.”

이레나 상단을 떠난 현수는 로니안 자작의 성으로 갔다.

“에밀리, 오늘도 위병 근무인가?”

“누구? 아,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위병근무를 서던 에밀리가 창대를 앞으로 밀며 환히 웃는다.

“크린스도 잘 있지?”

“크린스 기사님이요? 그럼요. 지금도 연무장에 있을 겁니다. 안에 기별해 드려요?”

“아니. 자작님 뵈러 왔네. 자, 이건 이따 근무 끝나고 술 한잔하시게.”

팅∼!

금화 한 닢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린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꾸벅 고개 숙인 에밀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 때다.

“어이쿠! 깜박 잊었네.”

에밀리는 허공에 달려 있는 노란색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헉! 그러고 보니…….”

지금껏 태연자약하던 에밀리가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기 시작한다. 방금 9서클 마스터이자 그랜드 마스터라 소문 난 이실리프 마탑주를 만나고도 무릎조차 꿇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크흐으! 영주님이 아시면……. 으으! 나 이제 죽었다.”

에밀리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절부절못한다.

하늘보다도 높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예조차 갖추지 않았으니 후환이 두려운 때문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기사 연무장 근처를 지나고 있다.

점심 먹은 이후 지금껏 수련하느라 솟은 땀을 식히기 위해 기사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로니안 자작의 기사 20명과 유카리안 영지 소속이었다가 테세린 쪽으로 전향한 기사 10명, 합쳐서 30명이다.

“누구냐? 이곳은 기사 연무장이다.”

“이곳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간… 헉! 배, 백작님! 아니, 마탑주님!”

나중의 말을 급히 얼버무리며 화들짝 놀라며 일어선 이는 기사 크린스이다.

C급 용병 차림을 좋아하는 귀족은 아르센 대륙 전체를 뒤져도 하인스 백작뿐이다. 그렇기에 금방 알아본 것이다.

“일동 기립!”

“뭐야? 왜 그래?”

“어서 일어나! 모두 일어나란 말이야!”

크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이봐, 크린스! 대체 왜 그러나?”

하늘같은 기사단장의 말에도 크린스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대신 한쪽 무릎을 급히 꿇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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