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0
“기사 크린스,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이시자 기사들의 하늘인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신 하인스 백작님을 알현하옵니다.”
“헉!”
크린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든 기사들이 얼른 부동자세를 취한다. 그리곤 기사의 예를 갖춰 무릎 꿇으며 소리쳤다.
쿵, 쿠쿵, 쿠쿠쿠쿠쿵―!
“충―!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알현(謁見)이라는 말은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찾아가 뵙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때에는 임금을 뵐 때 이 표현을 썼다.
참고로 사알(賜謁)이라 하면 임금이 신하에게 알현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이다.
“모두 일어서시게.”
“명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일동 기립!”
척, 처척, 처처처처척―!
모두 검을 밑으로 내린 채 왼 주먹을 오른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인다. 이것 또한 기사의 예이다.
“자작님과 내 인연에 대해선 모두들 알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있을 때 그대들에게 가르침을 내릴 것이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게.”
“충―!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나중에 또 보세.”
말을 마친 현수가 등 돌려 내성 쪽으로 이동할 때 기사단장이 크게 소리친다.
“알현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애구, 왜 이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위대하신 마탑주님께…….”
로니안 자작 역시 아르센 대륙 사람이다. 그리고 매지션 로드를 함부로 대할 강심장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는 순간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그리곤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위대하신 마탑주님께서 도와주셔서 제 영지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요?”
영지전이 벌어질 전장에 파견했던 정찰병으로부터 칼멘 후작이 대경실색하며 철수했다는 보고는 받았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적진까지 들어가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칼멘 후작의 군막에 들어가 이곳 테세린을 침범하면 케일론 영지를 지도에서 지우겠다는 편지 하나를 써줬습니다.”
“칼멘 후작의 군막이요? 그리고 편지요?”
후작의 군막은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무인지경으로 드나들었다는 느낌이다.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기사가 늘었더군요.”
“아! 네. 어제 유카리안 영지 소속 기사들이 충성 서약을 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여전히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작님, 계속 이러실 겁니까?”
“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로잘린을 제 아내로 주지 않으실 건지를 여쭙는 겁니다.”
“네? 아, 아닙니다. 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그래요?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로잘린이 제 아내가 되면 자작님은 제게 장인이 됩니다. 가족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절절매시면 어떻게 합니까?”
“네?”
멍한 표정이다. 매지션 로드가 가족이 된다는 말 때문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미판테 왕국의 어느 누구도 이곳 테세린을 어쩔 수 없다. 국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장인이 사위에게 존대하고 절절매는 건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그, 그래도…….”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느냐는 표정이다. 매지션 로드라는 다섯 글자가 가진 무게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그럼 로잘린과의 혼사는 없었던 걸로 하지요.”
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짐짓 이러는 것이다. 안 그러면 뜻대로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왜, 왜 이러십니까? 로잘린이 마탑주님께 시집간다는 소문이 다 번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시면 우리 로잘린은…….”
로니안 자작은 한국식으로 치면 딸바보다. 너무나 어여쁘게 성장하여 그런 듯하다.
“자작님이 제게 말을 놓으시면 로잘린은 마탑주의 부인이 됩니다. 하나 지금처럼 저를 계속해서 어려워하면 로잘린은 버림받은 여자가 되겠지요. 선택은 자작님이 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로잘린이란 이름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현수이다.
“그, 그래도 어떻게 감히…….”
“알겠습니다. 로잘린과의 인연은 이제 끊어진 것으로 하지요. 이제 이 성에 다시 올 일은 없겠군요.”
현수는 부러 매몰차게 이야기하곤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딱 두 발짝이다.
“아, 알았습니다. 아니, 알겠네. 말 놓겠네. 그러니 로잘린을… 우리 로잘린을 버리지 마시게.”
완전히 내리진 못하고 반쯤 내린다. 더 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른다. 하여 돌아섰다.
“장인께서 저를 가족으로 생각하시는 한 로잘린은 제 아내입니다. 알다시피 카이로시아의 부친 에델만 백작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뵙고 혼사가 허락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할 것입니다.”
“…알겠네. 기다리라고 하겠네.”
“좋습니다. 이제야 장인어른 같습니다.”
“휴우∼!”
로니안 자작은 이마에 솟은 땀을 훔쳐 내며 나직한 한숨을 쉰다.
“그나저나 아직도 백작이 안 되신 겁니까?”
“나무센 자작이 중앙에 연락했으니 곧 될 것이네.”
“그렇군요. 미리 승작을 감축드립니다.”
“모든 게 사위 덕이네. 오히려 내가 고맙지.”
둘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드리안 공국의 기반을 닦았다 싶으면 오겠습니다. 그나저나 로잘린은 어디에 있습니까?”
“후원에 있을 것이네. 불러주지.”
“자기야!”
로니안 자작은 현수와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한지 로잘린만 들여보냈다. 여느 때 같으면 쪼르르 달려왔을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자칫 실수라도 할까 두려워 로니안 자작이 부인 단속을 한 까닭이다.
어쨌거나 로잘린이 쪼르르 달려온다.
덥석 안고는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쪼옥―!
“자기야…….”
뭔 말을 하려다 만다.
“내게 할 말 있어?”
“네. 카이로시아 언니가 그러는데 200살도 넘었다면서요?”
“200살? 당연하지. 올해로 꼭 229살이야.”
“……!”
로잘린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다. 자기 나이의 열한 배가 넘는 늙은이에게 안겨 있다 생각하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너무 늙어서 싫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빠보다도 훨씬 늙으셨는데 장인어른이라고 하실 수 있어요? 게다가 매지션 로드라면서요?”
“로잘린이 싫다면 안 해도 돼. 그걸 원해?”
“아뇨! 전 꼭 백작님에게 시집갈 거예요.”
말도 안 된다는 듯 현수를 안은 팔에 힘을 준다. 이때 현수가 기습을 감행했다.
“으읍!”
로잘린의 큰 눈이 더 커진다. 그러더니 스르르 감긴다. 사랑하는 사내와의 달콤한 키스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현수와 로시아, 그리고 로잘린의 저녁 식사는 시끌벅적한 가운데 끝났다. 달달한 적포도주를 내놓은 결과이다.
저녁의 메인 메뉴는 한우 갈비찜과 새우튀김이었다. 닭 가슴살과 신선한 샐러드를 버무린 것도 내놓았다.
“여기서 자고 가신다는 거 변경 없죠?”
“그래. 괜찮지?”
“저야 좋지요. 이제 좀 자요. 오늘 술이 너무 맛있어서 과했나 봐요. 저 졸려요.”
“그래, 그럼.”
잠시 후 둘은 하나뿐인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다.
항온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기에 춥지 않았지만 쟈가드 원단으로 만든 오리털 이불을 덮고 있다.
“자기야, 여행은 언제쯤 끝나요?”
옆으로 돌아눕는 로시아의 모습은 매혹을 넘어 뇌쇄적이기까지 하다. 얇은 슬립 하나만 걸쳤기에 알몸이나 다름없다.
현수는 급격하게 반응하는 신체의 일부분을 잠재우기 위해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웠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자기야, 그건 무슨 노래예요? 듣기 좋아요.”
아주 나직한 소리였지만 바로 곁에 있어 들린 모양이다.
“응. 이건 우리 제국의 국가야.”
“근데 그걸 왜 지금 여기서 불러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데 환장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로시아를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야. 아직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는데 그럴 순 없잖아.”
“…괜찮아요. 원하시면 저를 가지셔도 돼요. 난 자기야를 믿으니까요. 벗을까요?”
“아니, 그러지 마. 정식으로 허락을 받으면 그때… 결혼한 날 밤에 로시아를 가질 거야. 각오 단단히 해. 알았지?”
“풋! 알았어요. 근데 나 졸려요. 팔베개 해줘요.”
“그래, 알았어.”
로시아는 금방 잠에 빠져든다. 과음도 한 이유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으로 피곤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자꾸 품을 파고드는 로시아 때문에 애국가를 열 번도 넘게 불렀다. 그래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므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뭔가가 움직인다.
확인해 보니 쥐다. 즉시 쥐틀을 꺼내 곳곳에 설치했다.
이 틀에는 쥐들을 유인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매혹 마법인 캡터베이션(captivation)을 살짝 틀어서 만든 것이다.
쥐들은 틀 속에 먹이가 많은 것으로 알고 제 발로 들어간다.
그런데 물고기를 잡는 통발처럼 들어는 갈 수 있지만 나오긴 힘든 구조이다. 별도의 출구를 통해서만 나갈 수 있다.
어쨌거나 테세린 곳곳에 스물한 개의 쥐틀을 설치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밤새 쥐들이 거리를 횡행했다.
쥐틀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다음 날, 못 보던 게 놓여 있자 사람들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쥐틀마다 적게는 1,000여 마리, 많게는 10,000마리의 쥐가 우글거린 때문이다.
보고가 올라가자 로니안 자작이 병사들을 보냈다.
현수는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이실리프 마탑에서 실험용 쥐를 잡으려 설치한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쪽지를 붙여놨다.
당연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실리프 마탑에서 하는 일을 방해할 만큼 간 큰 자는 대륙 전체를 뒤져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날이 밝자 유카리안 영지 마나석 광산으로 갔다.
영지전에서 이긴 전리품으로 로니안 자작에 의해 이레나 상단이 개발권을 갖도록 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광산 책임자가 입구까지 내려와 공손히 절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방문이기에 몹시 조심스런 표정이다.
“채광을 하면서 버려지는 마나석들을 어디에 두나?”
“네, 한쪽에 적치하고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책임자를 따라간 곳엔 작은 동산 정도의 폐석들이 쌓여 있다. 함량이 적어 경제성이 없다 판단된 돌들을 버린 것이다.
현수는 마나석 원석을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자수정의 그것과 흡사하다.
“흐음, 뭐가 다른 거지?”
마나석도 갖고 있는 마나를 조금씩 흘린다. 자수정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뿜어낸다는 차이이다.
현수는 오랫동안 마나석과 자수정의 차이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한 가지를 알아냈다.
마나집적진 위에 자수정을 올려놓으면 마치 배터리에 전기가 충전되듯 마나를 모은다는 것이다.
실험을 하기 위해 마나가 풍부한 곳을 찾았다. 그러다 마나석 광산의 갱도를 떠올렸다.
‘그래, 마나석들이 마나를 뿜고 있으니 갱도 안이 가장 농밀할 거야.’
책임자를 불러 현재 채굴하지 않고 있는 갱도를 물었다.
산 뒤쪽의 오래된 갱도를 가르쳐 준다. 그전에 현재 작업 중인 갱도를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마나가 농밀하다. 끈적거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내친김에 몇몇 갱도에도 들어가 보았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하여 물어보니 농밀한 정도가 채굴량에 비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마나석이 많이 매장된 갱도의 농도가 더 진한 것이다.
예상대로였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폐광으로 향했다.
“으음! 여긴…….”
지금껏 들어갔던 갱도보다도 훨씬 더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