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2
새어 나간 것 대부분은 마나석에 함유되었지만 일부는 대기로 흩어졌다. 현수가 동굴에 들어서면서 느낀 것이 그것이다.
남은 것은 애초의 마나량의 60% 정도이다. 다시 말해 드래곤 하트 하나보다도 많은 양이 남은 것이다.
이것의 6분지 5,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 하나 분량의 마나가 현수에게 몰려들었다. 그 결과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못했던 휴먼 하트가 생성된 것이다.
이것이 자리 잡으면서 현수의 신체는 또 한 번의 바디체인지를 겪었다. 이로 인해 1,000년의 수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본인은 모른다. 책에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뭐야? 어찌 된 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쨌거나 아직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지구로의 귀환이 여전히 가능한 것이다.
“휴우! 다행이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동혈 곳곳을 살펴보았다. 마나도 없고 평범함 그 자체이다.
밖으로 나가 마나집적진 위에 놓은 20여 개의 자수정을 살폈다.
“오오! 이건……!”
자수정마다 마나가 충진(充盡)되어 있다.
이 정도면 최상급을 넘어 초특급이라 할 수 있다. 스승님의 스태프에 박힌 것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다. 서둘러 봉인마법진을 새겼다. 마나가 빠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이젠 여기서 나가자.”
갱도 밖으로 나온 현수는 곧장 이레나 상단으로 향했다.
“말도 없이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카이로시아는 몹시 걱정했는지 입술이 부르터 있다.
“내 걱정 했어?”
“네, 그럼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해서…….”
로시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현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 까닭이다.
“매지션 로드이자 그랜드 마스터인데 내게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쳇! 알았어요. 대륙 최강인 거 인정해요. 아무튼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요.”
“내가? 어디가?”
괜히 한번 해본 소린가 하는데 표정을 보니 아닌 듯하다.
“얼굴이 더 잘생겨진 거 같아요.”
“얼굴이? 잠깐만. 아공간 오픈.”
거울을 꺼냈다. 그런데 조금 작은 듯 여겨져 전신거울을 꺼냈다. 로시아가 눈빛을 빛낸다.
이렇게 큰 거울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은은한 광택이 나는 것 같다.
“왜 이러지?”
바디체인지가 일어난 이후 체내의 마나는 주기적으로 전신 세포를 재활성화시킨다.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렇기에 빛이라도 나는 듯 느껴진 것이다.
“이거 저 주실 거죠?”
“거울? 응, 필요하다면.”
“더 없어요?”
이제야 왜 달라 했는지 납득이 된다.
“나만 보면 팔아먹을 거 내놓으라고 그러는 거 같아.”
“자기야가 가진 게 보통 신기해야죠. 이런 거울은 왕성에도 없는 거란 말이에요.”
“하긴…….”
지구에선 더없이 평범할 물건이 이곳에선 신의 작품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대단히 많다.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성냥도 그중 하나이다.
일회용 라이터는 마법 기물로 취급될 것이다. 싸구려 스킨로션은 최고급 향수로 대접받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만년필도 그러할 것이다.
이 밖에 손톱깎이, 면봉, 양말, 심지어 철사를 구부려 만든 세탁소용 옷걸이까지 비싼 값에 팔릴 것이다.
“알았어!”
아공간에 담긴 전신거울 대부분을 꺼내주었다. 몇 개는 나중에라도 필요할 듯싶어 남겼다.
“우와∼! 안 먹어도 배불러요.”
카이로시아는 장사꾼답게 눈빛을 반짝이며 좋아한다.
“이것도 7:3이에요.”
“안 줘도 돼.”
“그래도 줄 거예요. 우리 결혼하면 도로 내 것이 되겠지만.”
혀를 내밀어 메롱 하는데 더없이 섹시하다. 사고 칠 것 같다.
“나 잠시 떠나야 해. 기다려 줄 거지?”
“공국에 다녀오시게요?”
테세린에서 아드리안 공국은 엄청나게 먼 거리이다. 그럼에도 마치 옆집 다녀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 아직 반석 위에 올려놓지 못했으니까.”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근데 이거 말고 또 좋은 거 없어요?”
“하여간. 알았어.”
아공간을 뒤져 가구들을 꺼냈다. 이곳의 것들은 투박하다. 그러니 별로 비싸지 않은 평범한 장롱도 명품처럼 보인다.
서랍장과 가죽 소파, 식탁과 의자 등을 꺼냈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린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가구이기 때문이다.
“자기야, 이건 너무 좋은데 팔지 말고 잘 뒀다가 나중에 우리가 쓰면 어때요?”
싸구려 하이그로시4) 옷장을 쓰다듬으며 한 말이다. 가격표를 살펴보니 9자짜리 장롱인데 20만 원이라 쓰여 있다.
“그게 마음에 들어?”
“네, 면이 너무너무 매끈해요. 그리고 이 색깔 좀 봐요. 하얘요. 번쩍번쩍 윤택도 나구요. 이거 좋은 거죠? 그죠?”
카이로시아는 여전히 현수의 말을 철석처럼 믿는 모양이다.
“그럼, 괜찮고말고. 아주 비싸게 팔아. 대신 아주 세심히 다뤄야 한다고 꼭 말해줘. 알았지?”
싸구려라 험하게 다루면 금방 망가지기에 한 말이다.
“네, 그럴게요. 근데 이런 거 또 있죠?”
현수의 아공간 속에 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한 말이다. 마치 화수분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 나중에 우리가 쓸 건 있어. 그러니 걱정 마.”
“호호! 고마워요.”
현수는 물건에 정신 팔린 로시아를 뒤로하고 아드리안 공국으로 텔레포트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못된 자작부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위의 사촌 여동생을 죽이라고 어쌔신을 보냈던 바로 그 여자이다.
이야길 듣는 동안 결코 용서해선 안 될 것이란 판단을 내린 바 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죽여 놓고 권력을 이용하여 편안하게 쉬고 있는 꼴을 어찌 두고 보겠는가!
신이 나서 장롱 등의 가격을 매기고 있는 로시아에게 다가가 위치를 물었다.
사모님이라 불리는 로드선 자작부인은 현재 카이엔 제국의 수도에 있는 세브란 신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현수는 이실리프 마법서를 꺼내 좌표를 확인했다.
카이엔 제국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멀린이기에 이 좌표는 남겨두었던 것이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카이엔 제국의 수도이다.
“이곳이 제국의 수도인가?”
현수는 호화로운 저택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제국의 수도라 부를 만큼 커다란 건축물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근데 여긴 어디지?”
처음 와본 곳인지라 장소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당히 큰 건물의 옥상이라는 것이다.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커다란 정원이 보인다.
“귀족가인가? 누가 보면 귀찮겠군.”
여전히 C급 용병 차림이다. 귀족가에선 몰래 들어온 도둑이라 여길 것이다. 그럼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런 귀찮음을 왜 감수하겠는가! 하여 마법을 구현시켰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현수의 신형이 투명해진다.
플라이 마법은 쓰려다 말았다. 윌로우 자작의 영사우스 상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함이다.
“흐음, 계단은 어디에 있는 거지?”
두리번거리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래로 내려가며 좌우는 물론이고 전후까지 살폈다.
‘흐음! 아무리 안 되도 최소 후작가 이상은 되나보군. 대체 여기가 어디지?’
두리번거리다 복도를 발견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편이 아닌지라 편안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긴 복도의 절반쯤 이동했을 때 묘한 것이 보인다. 바닥의 색깔이 달라진 것이다.
‘왜 이렇게 했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이다.
번쩍―!
와아아아아앙―!
환한 빛이 명멸하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가 난다.
‘아차! 마법 트랩이군. 근데 내가 왜 몰랐지?’
어차피 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지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현수는 본인도 감지하지 못한 마법진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천장이다. 아주 오래전에 그려놓은 듯하다.
“저건……?”
본 듯한 기억이 있는 마법진이다. 이실리프 마법서를 꺼내면 즉시 대조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복도 끝으로부터 기사와 마법사들이 줄지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마법으로 신형을 띄웠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지나갈 수 있는 높이이다.
“여기다! 침입자는 여기에 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로브를 걸친 누군가의 고함에 기사들이 일제히 산개하며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도 별다른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연달아 보고하는 기사들이다. 평상시 훈련을 아주 철저하게 받은 듯 절도 있는 동작과 우렁찬 음성이다.
여기저기서 이상 없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기사단장쯤 되는 듯 화려한 갑옷을 걸친 자가 로브를 걸친 이에게 묻는다.
“미세르 경, 혹시 마법진이 오작동한 건 아닙니까?”
“사바트 단장님, 마법진이 오작동을 하다니요? 이 마법진을 누가 설치한 건지 모르십니까?”
“누가 한 겁니까?”
“정말 모르셔서 묻는 겁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누굽니까?”
“건국 시조이신 알렉산더 폰 카이엔 대제를 도우셨던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님이십니다.”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 헉! 그, 그럼……!”
“맞습니다. 이실리프 마탑의 초대 마탑주이신 그분이 손수 그려 넣으신 마법진입니다. 그런데 이게 오작동을 한다고요?”
“아, 아닙니다. 그,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미세르 경이란 자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선다.
카이엔 제국엔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첫째는 초대 황제였던 알렉산더 폰 카이엔을 폄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초대 황제를 도와 카이엔 제국이 만들어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 이실리프 마탑주를 폄하하는 자 역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이엔 제국민에게 있어 알렉산더 폰 카이엔과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이다.
그렇기에 몹시 당황하는 것이다.
“사바트 단장님, 기사들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이 근처 어딘가에 분명 누군가가 있습니다. 어서요.”
“아, 알겠소이다.”
얼른 고개를 끄덕인 사바트가 기사들을 바라본다.
시선을 받은 기사들은 채 입이 열리기도 전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침입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스승의 작품답게 마나 회로가 아주 간결하다. 그러면서도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깔끔하게 그려져 있다.
‘근데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이런 걸 그려 넣으셨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기사들이 수색하는 범위 밖으로 비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어른 키 정도 되는 관목이 무성한 정원이다.
“정원인가 보군. 쭉 직진하면 담이 나오겠지?”
더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누군가의 세심한 손길이 닿은 정원이라면 잡초 따윈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쉐리엔이 수북하다.
“뭐야? 정원은 정원인데 아무도 안 돌보나?”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웬 여자의 음성이 들린 때문이다.
“로사, 내가 뭐라고 했어? 나무도 생명이야. 네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가위질을 하면 어떻게 해?”
“죄, 죄송합니다.”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잖아.”
“네, 그러셨죠. 그런데 이건 가시넝쿨입니다. 이 가시에 찔리면 곪아요. 독이 있어서 웬만해선 낫지도 않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