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3
“그래서? 그게 가시넝쿨이라는 걸 알면 피해서 다니면 되잖아. 그걸 못해서 모조리 다 잘라 버린 거야?”
“죄, 죄송합니다.”
“가! 가서 주방 일이나 도와줘. 앞으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마. 알았어? 빨리 안 가?”
여인의 짜증 섞인 말에 하녀는 얼른 고개 숙인다.
“네, 네, 알겠습니다.”
후다다다―!
혹시 마음 변해 처벌을 내릴까 싶은지 얼른 뛰어간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즐기자는 주의자인가? 일리가 있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이야. 사람의 손이 닿으면 자연미는 사라지는 거야. 그것도 모르면서…….”
여인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나직이 중얼거린다.
“어라! 이건 뭐지? 전엔 못 보던 풀이네.”
조금 전의 가위질로 잘려 버린 풀들을 살피던 여인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쭈그려 앉는다.
그리곤 싹둑 잘린 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시 살피던 여인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이것도 먹을 수 있는 건가? 어디 보자.”
여인이 집어 든 풀을 입 안에 넣고 씹으려는 순간이다.
“멈추시오.”
“…당신은… 누구신가요?”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녀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런데 느닷없이 웬 사내가 나타났는데도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그건 씹으면 안 되는 겁니다.”
“네? 이게 뭔지 아세요?”
“독미나리라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선 씨큐타 비로사(Cicuta viros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독미나리요? 그럼 독성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씨큐톡신(Cicutoxin)이란 독성 물질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그걸 먹으면 한 시간 이내에 구토, 복통에 이어 경련과 발작으로 이어질 겁니다.”
“……!”
“특히 뿌리의 독성이 강해 조금만 먹어도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운 좋게 죽음을 피하더라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구요.”
“이게 그렇게 독성이 강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족족 뽑아버리십시오.”
“자연인데요?”
또 자연 타령이다. 교훈 섞인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주방의 누군가가 실수로 그것을 뽑아 식재료로 쓰면 그걸 먹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네?”
끔찍한 장면을 상상했는지 부르르 떤다.
“아, 알았어요. 그런데 누구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는 여기 볼일이 있어서 들른 사람입니다.”
“여기에 볼일이 있어요? 제1황자궁에요? 그럼 제 부군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
엎어지는데 돌부리가 솟아 있는 셈이다.
이곳이 제1황자궁이라면 주인은 황태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인은 황태자비라는 말이다.
‘뭐야, 여기가 황태자궁이었어? 어쩐지…….’
과연 스승의 마법진이 있을 만한 곳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요?”
“그걸 알아야 하는 겁니까?”
“……!”
여인은 대답 대신 가슴에 달린 펜던트를 움켜쥔다. 그와 동시에 마나 유동이 느껴진다. 마법이 구현되려는 것이다.
번쩍―!
심상치 않은 빛이 번쩍일 때 현수의 입술 또한 움직였다.
“배리어!”
콰콰콰쾅―!
예상대로 체인 라이트닝이다. 번개는 헛되어 배리어에 작렬하곤 사라졌다.
“헉! 그쪽은 누구죠? 라이셔 제국에서 보낸 어쌔신인가요? 아님 크로완 제국에서? 어디죠?”
라이셔 제국과 크로완 제국은 현재 카이엔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사국이다.
과거에도 이들 두 제국과 전쟁이 있었다.
그때 멀린의 후손 에버튼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쌔신의 공격으로부터 황제를 구했다. 또한 적국의 두 황태자를 생포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그 결과 나이젤 후작가는 인근 다섯 영지를 추가로 흡수하게 되었고, 대공국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 역시 과거와 같이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재원의 쏠림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두 제국이 힘을 합쳤지만 부강한 카이엔 제국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10장 황태자비와 드잡이
어쨌거나 사람의 반응 속도는 결코 번개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배리어로 그것을 막아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어쌔신이 아티팩트를 쓴 듯하다.
황태자비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허리춤의 연검을 뽑아 들었다. 낭창낭창하던 연검이 이내 꼿꼿해진다.
제법 화후가 깊다는 의미이다.
“누구죠? 정체를 밝혀요.”
서늘한 눈빛으로 현수를 노려보는 황태자비의 눈에는 초조함이 감돌고 있다.
황태자와 결혼한 이후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제1황자궁에 배속된 호위단장 사바트 자작과 5서클 마법사 미세르 자작이 철통같은 경호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1황자궁엔 건국 시조를 도왔던 멀린 대마법사가 설치한 알람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다.
9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금지인 이곳에 버젓이 서 있다. 그것도 긴장한 빛이라곤 전혀 없는 태연자약한 모습이다.
차림을 보니 어쌔신은 아닌 듯하다. 평범한 용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황태자비는 꼿꼿하겐 선 연검을 보고 상대가 물러나길 바랐다. 연검이 이 같은 모습을 보이려면 최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보란 듯이 연검을 앞으로 내밀며 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한다. 허점이 수없이 많이 보이는 엉성한 자세이다.
한편, 현수는 연검에 인챈트된 마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뽑기만 하면 꼿꼿해지는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물러서겠다고 하면 용서하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허락받지 않고 이곳에 들어온 죗값을 치러야 할 거예요.”
“모르고 들어온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여길 모르고 들어와요?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요?”
“여기가 어딥니까?”
“대 카이엔 제국의 황성의 두 중지 중 하나인 제1황자궁이라고 했잖아요. 폐하께서 머무시는 곳만큼 중요한 곳이지요.”
“여기가 황성 한복판이라는 겁니까?”
“여기까지 들어와 놓고도 그런 소릴 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챠아압!”
황태자비가 연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현수는 현재 검을 뽑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완전 무방비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선제공격으로 제압하려는 것이다.
황태자비는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중 하나가 검술이다.
소드 마스터인 제국의 공작은 손녀를 어여삐 여겨 검법 수련을 허락했다.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황태자비가 배운 검법은 블랙로즈검법이다. 장미처럼 우아한 모습 곳곳에 가시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화후는 소드 유저 최상급이다.
아무튼 황태자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자신이 생포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쉬익, 쉬이익―!
허공을 가르며 쇄도한 검은 현수의 어깨를 베어갔다. 하지만 이에 어찌 당하겠는가! 슬쩍 반보 물러나니 무위로 끝난다.
휘이익―!
이번엔 복부를 노리고 찔러들어 온다. 여전히 엉성하다.
제국의 황태자비라면 장차 황후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몸에 손을 대거나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 그렇기에 좌로 반보 비켜섰다. 또다시 공격하기에 슬쩍 피했다.
이때부터 황태자비는 휘두르고 현수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장면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자 수비는 신경도 안 쓰고 공격 일변도로 변한다. 자신의 무위에 눌려 반격할 엄두를 못 내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잇!”
쉐에엑―!
이번엔 오른쪽 허벅지를 베려는 모양이다. 다리만 슬쩍 뺐다. 연검이 지난 직후 원상 복구시켰다.
“이잇! 지금 날 놀려욧? 야아압!”
황태자비의 연검이 또 휘둘러진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미친년 그것처럼 휘날린다.
잘 여며져 있던 의복 또한 엉망이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갸름한 볼을 타고 흘러 턱에서 떨어진다.
신발도 한쪽이 벗겨져 나뒹굴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제발 한 번만 맞아달라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런 건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또 한 번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이때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도주하려다 말았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야아압!”
쒜에에엑―!
이번엔 회심의 일격이라 판단했는지 제법 빠르고 예리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검술 수련을 더 하셔야겠습니다. 이래 가지고야 어디 파리 한 마리라도 잡겠습니까?”
“뭐라고욧? 야아압!”
자신의 안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양패구상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듯 와락 달려든다. 그렇게 달려들던 순간이다.
황태자비의 발이 불룩 솟아 있던 돌부리에 걸린다.
“아앗!”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황태자비의 교구가 급격하게 앞으로 쏠린다. 엎어지려는 것이다.
들고 있는 연검 때문에 놔두면 큰 부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
“플라이!”
현수의 입술이 달싹이자 엎어지던 황태자비의 교구가 둥실 솟는다.
“헉!”
“매직 캔슬!”
“…뭐예요? 마법사였어요?”
머리 좋은 황태자비는 방금 자신이 도움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검을 늘어뜨린다.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검법 수련을 더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현수로부터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음인지 아까처럼 싸늘한 어투는 아니다.
“나는…….”
현수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누군가 소리친다.
“멈춰라!”
우다다다다다!
이십여 명의 기사가 사방을 에워싸며 검을 뽑아 든다. 사뭇 삼엄한 기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뒤에 사바트 단장과 미세르 경이 따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황태자인 듯싶다. 걸친 의복이 그것을 증명한다.
“뮤엘라! 몸은 괜찮소?”
“네, 괜찮아요, 황태자 전하.”
예상대로이다. 현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황태자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나이는 30대 중반. 아주 왕성한 시기이다.
구릿빛 얼굴과 단단한 근육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양이다.
“넌 누구냐?”
뮤엘라 황태자비로부터 시선을 뗀 황태자의 물음이다.
“이곳이 금지라는 걸 몰랐습니다.”
“뭐라? 몰랐습니다? 여기에 발붙이고 있으면서 모른다고 발뺌을 해? 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사바트 단장이 눈을 부라리며 노려본다.
“황태자 전하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이곳이 처음이라…….”
“이놈, 네놈의 정체부터 밝혀라!”
또 사바트 단장이 끼어든다.
“그걸 꼭 말해야 합니까?”
“당연하다. 이곳은 대 카이엔 제국 황성의 중지이다. 이런 곳을 허가 없이 난입한 죄를 물어야겠다.”
사바트 단장의 서슬 시퍼런 말에도 현수는 태연자약하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이곳이 처음이라 몰랐습니다. 중지라 하고 나는 이곳에 용무가 없으니 이만 나가겠습니다.”
“뭐라? 이놈이 지금…….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놈을 제압하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네!”
사바트 단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십여 기사가 포위망을 좁혀온다. 잠시 이들의 화후를 살핀 현수는 피식 웃었다.
전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다. 이런 정도라면 눈 감고도 싸울 수 있다. 사바트 단장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그래도 얼마든지 감당한다.
뒤쪽에서 마법을 메모리하고 있는 미세르 자작은 5서클 마법인 윈드 캐논을 준비하고 있다.
그 뒤의 마법사 둘은 4서클이다. 이들 또한 공격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화염창을 쏘아대는 룬 플레이어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의 칼날이 휘날리는 윈드 블레이드이다.
한꺼번에 공격해도 배리어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야아압!”
가장 먼저 공격한 기사는 현수의 머리를 단숨에 쪼갤 듯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