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95화 (595/1,307)

# 595

“본인은 소드 마스터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사바트 경과 스미던 경 모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일세. 이들 둘의 합공을 그토록 쉽게 피해냈으면서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난 소드 마스터가 아닙니다.”

“허어, 이거야 원…….”

황태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카이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 그래도 자네를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 응하겠나?”

“황태자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저자는 정체가 불분명합니다. 적의 간세 내지는 어쌔신일 수 있습니다.”

사바트 자작의 말에 스미던 자작도 동조한다.

“맞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와 만찬을 같이 하시다니요. 안 될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경들은 내 앞의 이 청년이 지금 당장이라도 내 목숨을 끓을 수 있음을 모르시오? 경들이 합작을 해도 당해내지 못했소.”

“그건……!”

“……!”

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태자는 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이 곤란하면 내일도 좋다.”

“기꺼이. 허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런데 황성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받으라.”

팅―!

황자가 품에서 꺼내 던진 것은 반지이다.

“그걸 경비병들에게 보여주면 내일은 떳떳이 황성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네.”

“고맙습니다. 내일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미던 경, 이 청년이 황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스미던 경이 군례를 올릴 때 현수가 한마디 했다.

“호의에 감사드리오.”

“나는 윈스턴 폰 카이엔이라 하오. 귀하의 성명은?”

“하인스라고만 알아주시오.”

현수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인스? 좋아, 내일 만찬 때 보세.”

“좋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현수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고는 안쪽으로 간다.

11장 뻔뻔함의 극치

잠시 머뭇거리던 사바트 단장이 묻는다.

“혹시 아까 알람 마법진이 발동되도록 한 게 자넨가?”

“그렇습니다.”

“흐음, 그럼 되었네.”

사바트 단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알람 마법진이 작동되도록 한 범인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가세.”

황태자의 만찬에 초대를 받아 그러는지 스미던 경의 어투와 표정은 정중했다.

“고맙습니다.”

스미던 자작의 뒤를 따라 황성 밖으로 향하던 현수는 왜 아까 그토록 열을 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황성의 중지라 할 만큼 깊숙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 반지는 황태자님을 대리하는 임무가 맡겨질 때 내려지는 것이네. 잃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좋겠네.”

“그러지요.”

드디어 황성 밖으로 나온 현수는 잠시 길거리 풍경을 감상했다. 제국의 수도답게 아주 널찍한 길 한복판이다.

한국으로 치면 왕복 12차선 정도 되는 너른 길이다. 이 길의 좌우로 삼 층짜리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각각의 건물엔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과연 수도로군.”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천천히 도로를 따라 걸었다.

별의별 상점이 다 있다. 그럼에도 찾으려는 영사우스 상단은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행인에게 물었다.

“아! 그 싸가지 없는 상단 말씀이오?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다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있을 겁니다. 뭘 사려고 하는지 몰라도 밀을 가루 내어 파는 상단은 또 있소.”

표정이나 어투로 보아 영사우스 상단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듯하다. 하여 물었다.

“대체 왜 그 상단에 대해 악담을 하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물으시오? 상단주 마누라의 뻔뻔함에 모두가 질려 있소이다. 귀하는 안 그러시오?”

“아! 그것 때문이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다른 상단과 거래해 보시오. 참고로 이레나 상단이 괜찮은 것 같소. 저쪽 저기에 있는…….”

“알겠습니다. 참고하지요. 감사합니다.”

행인과 헤어진 현수는 인근 주점으로 들어갔다.

소문이나 민심을 파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삐이꺽―!

나직한 경첩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그와 동시에 훅하고 맡아지는 주점 특유의 냄새가 난다.

“어서 오세요.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살집 두둑한 40대 여인이 미소 지으며 어두컴컴한 안쪽을 가리킨다.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우글우글한 곳이다.

C급 용병 차림이라 그쪽으로 가라고 한 듯싶다.

민심 파악 및 소문을 듣고자 온 것인지라 두말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뭘 드릴까요? 참고로 우리 집은 스테이크와 감자 스튜가 일품이에요. 술은 순한 마리키주, 독한 로밍주가 괜찮구요.”

“스테이크 1인분, 로밍주 한 병 주시오.”

“네, 알았습니다.”

주문을 받은 여인이 사라지자 시끄러운 주변 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바로 옆 좌석에서 누군가 묻는다.

“그 나쁜 계집 어떻게 되었대?”

“나쁜 계집이라니, 누구?”

“누구긴 영사우스 상단의 로드선이란 늙은 암캐지.”

“아! 사위의 사촌동생에게 어쌔신을 보냈던 그 사모님?”

“사모님은 무슨, 그년이지.”

“그래, 감옥에 갇힌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며?”

“자네 어디 갔다 왔나?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걸 왜 묻나?”

“나 많이 아팠잖아. 지난번에 로만 자작가까지 호위를 나섰다가 오크에게 당해서. 여기 보게. 이게 그때의 상처이네.”

사내가 소매를 걷으니 징그러운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20㎝ 이상 찢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상처의 흔적이 매끈하지 않은 걸 보면 곪았던 모양이다.

“아팠겠군!”

“말도 말게. 완전 돌팔이 신관을 만나 개고생을 했네.”

말을 하면서 주변을 살핀다. 신관을 욕한 때문이다.

“그러게,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겠군.”

“그래, 아무튼 그년이 감옥에 없다는 소린 뭔가?”

사내의 물음에 앞에 앉은 용병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길 시작한다.

“그 계집이 돈으로 신관을 산 모양이야.”

“돈으로 신관을 사다니?”

“감옥 안에 있어도 상관없는 경미한 증상을 크게 부풀려 형 집행 정지가 되도록 손을 썼다는 거지.”

“그래서?”

“원래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었는데 그래서 감옥 밖으로 나온 거야. 그리곤 사법 관료들에게 돈을 썼지.”

“사법 관료들?”

“그래. 돈 써서 외박 기간을 계속해서 연장시킨 거야.”

“그리고는?”

“신전에 누워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는군.”

“헐! 아주 나쁜 년이구만.”

“그래. 지금은 그게 발각돼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지. 근데 사람들 관심이 시들해지면 또 나올 거야.”

“그럴까?”

“그러고도 남을 년이야. 소문에 의하면 아주 집요하고 독한 년이라고 하더군. 성품도 지랄 맞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한대.”

“으으음! 황성의 높은 사람들은 뭐라는데?”

“일단 사법 관료들에게 처리토록 일임했나 봐. 사실 그분들이 나설 정도의 일은 아니잖아.”

“아니긴, 부패한 사법 관료들과 돈밖에 모르는 신관 자식들이 짜고 친 도박판인데. 나 같으면 영사우스 상단을 샅샅이 조사해서 아주 거덜을 내버리겠네.”

“왜?”

“그렇게 해서 거지가 되어야 돈을 써서 감옥 밖으로 나오는 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 아닌가. 안 그래?”

“그렇군. 아무튼 그래.”

“그 나쁜 계집은 지금 어디에 수감되어 있나?”

“어디긴, 나니세 영지에 있는 제국 감옥이네. 근데 왜 묻나?”

“돈 생기면 어쌔신이라도 보내려고. 내 딸이 그런 꼴을 당했다면 나는 절대로 못 참거든.”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참 괜찮을 나이에 죽었으니 억울할 거야.”

용병들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이것이 화제가 되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 결과 네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는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이다. 모두들 로드선 자작부인을 나쁜 년이라 칭하고 있다.

둘째는 부패한 사법 관료와 돈밖에 모르는 신관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영사우스 상단을 완전히 거덜 내서 재기 불능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장모의 간악함 때문에 사촌동생이 비명횡사했음에도 처가의 재산이 탐나 여전히 사위 자리에 있는 사법 관료 또한 응징당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남은 술이 있기에 자작하던 중 다른 소문 하나를 더 들었다.

카이엔 제국과 아드리안 공국의 접경지에 있는 어떤 영지에 관한 것이다.

이 영지는 극심한 가뭄 때문에 3년째 제대로 된 수확을 하지 못했다. 영주인 백작은 사재를 털어 곡물을 매입하였다.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영주가 전 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있다.

이쯤 되면 영지를 떠나는 자들이 많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자는 매우 적다. 영지민들을 가족처럼 보살피던 영주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굶어 죽더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상당히 괜찮은 귀족인 듯싶다. 하여 귀 기울여 더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영주인 가브이레 백작은 여타 귀족들과는 다르다.

다른 귀족들은 검법 또는 마법을 익힌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의술을 가문의 업으로 택한 귀족이다.

하여 가브이레 영지라 부르지 않고 메딕 영지라 부른다.

누구든 몸이 아픈 이들이 찾아가면 마다하지 않고 치료해 주어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곳엔 상당히 많은 영지민들이 살고 있다. 타 영지에 비하면 인구 밀도가 세 배쯤 된다.

땅은 정해져 있는데 인구가 점점 많아지다 보니 경작지를 개간하여 주거지로 바꾸었다. 농토가 줄어든 것이다.

이 와중에 가뭄이 닥쳐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떻게 해줄 수는 없다.

아무튼 몇몇 소문을 종합한 현수는 주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다른 주점에 들어갔다. 그곳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로드선 자작부인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듣고 보니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영사우스 상단의 성세가 크게 꺾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유를 확인해 보니 영사우스 상단은 일반인을 상대로 거래하는 양이 매우 적다.

밀을 가루 내어 공급하면 그것으로 제국 병사들에게 지급할 빵을 만드는 공장에 납품하고 있다. 국가가 빵 납품처를 바꾸지 않는 이상 영사우스 상단의 성세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황성의 고위 관료들은 이번 사건을 로드선 자작부인의 개인 치정에 관한 것으로 규정했다. 영사우스 상단의 재원으로 사법 관료들과 신관을 매수한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영사우스 상단의 납품을 제지하기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영사우스 상단은 빵을 만드는 공장에 납품할 뿐 국가에 직접 납품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손대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이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건의 전모는 보다 명확해진다.

사모님이라 불리는 로드선 부인은 2년간 아랫사람들에게 명하여 아카데미 여학생을 미행, 감시했으며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아무런 증빙이 없었으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두 명의 어쌔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여학생은 피어보지도 못한 채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희생자의 부친이 직접 범인 검거에 나섰다. 타 영지로 도주했던 범인이 잡히자 사모님의 악행이 드러났다.

법의 정당한 처벌을 받아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졌지만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감옥을 빠져나와 호의호식하며 지냈다.

관리들의 조사에 의하면 세브란 신전 소속 신관은 정당했다고 우긴다. 다른 정직한 신관들에게 조사시켜 보니 대체 왜 그런 의견을 내놓았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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