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2
“흐으음! 전하, 고기 본연의 맛이 느껴지네요. 대단해요.”
배석해 있던 귀족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한데 후춧가루 병을 전해주려 집어 들던 황태자비가 갑자기 멈춘다.
“어머! 이건…….”
노란색 캡이 씌워진 후춧가루 병은 라벨을 떼어낸 상태이다. 따라서 유리병 속의 후춧가루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에! 이건 유리라는 보석이 아닌가요? 투명한 유리는 몹시 귀하다는데 그걸로 어떻게 이런 정교한 작품을…….”
“뮤엘라, 그게 유리라고…?”
“네, 유리 맞아요.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못 깎거든요.”
보석에 관한 한 여자가 남자보다 보는 눈이 훨씬 높고 정확하다.
황태자는 황태자비의 손에 들린 후춧가루 병에 시선을 주었다. 무색투명한 보석은 다이아몬드와 유리밖에 없다.
저만한 크기의 병을 만들려면 주먹만 한 원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실수없이 깎아내야 것이다.
비싼 유리 원석으로 향신료를 담는 용기를 만들었다는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 그렇기에 탄성을 낸다.
“아! 정말이군. 유리야, 유리!”
계속해서 탄성을 내며 이모저모를 살핀다.
“황태자 전하, 음식이 식습니다.”
현수의 말에 황태자는 얼른 정색한다. 제국의 황태자가 보석에 현혹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대단하네. 어떻게 유리로 이런 병을 만들었는지.”
“그렇습니까? 오늘 두 분을 뵌 기념으로 몇 병 꺼내놓겠습니다.”
“이 귀한 것을요?”
황태자비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에 담긴 것 다섯 개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안에 담긴 향신료는 따로 깡통에 담긴 걸 꺼내놓지요.”
“세상에! 이 귀한 걸 다섯 개씩이나.”
황태자비는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는 표정이다.
“허험! 식사, 식사합시다.”
황태자의 말에 다시금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사이 황태자비의 손을 떠난 후춧가루 병은 귀족들의 손을 거친다.
모두 누린내가 싹 사라진 새로운 고기 맛에 눈을 크게 뜬다. 아울러 맑고 투명한 유리병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윽고 모든 식사가 끝났다. 식탁 위의 접시들이 치워지고 귀족들만 맛보는 차가 들어왔다.
한 모금 들이켜 보니 이런 걸 왜 먹나 싶다. 텁텁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들 차 맛을 음미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현수가 손짓으로 시종을 부르자 쪼르르 다가온다.
“다구(茶具)를 가져다주게.”
“네? 다구 말씀이십니까?”
“그래. 더운 물도 함께.”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가 입을 연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네. 자네, 내 사람이 되어주겠는가?”
현수는 잘 모르지만 황태자는 인재 거두기를 좋아한다. 하여 때로는 변복을 하고 저잣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아카데미 학생들도 눈여겨보는 중이다. 장차 황제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보좌할 인재들을 찾기 위함이다.
현수에게 반지까지 주는 무리수를 둔 이유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둘과 자신, 그리고 황태자비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실력에 반한 때문이다.
외부에 알려져 있기를, 황태자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고 황태자비는 소드 유저 최상급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황태자와 황태자비 모두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다.
둘 중 황태자가 조금 더 강할 뿐이다. 그럼에도 중급이라 소문난 이유는 아부하기 좋아하는 신하들 때문이다.
황태자비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부군인 황태자가 빛이 나도록 겸양을 부린 것이다.
어쨌거나 황태자가 판단했을 때 현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소드 마스터이다.
그리고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아홉 살이다.
본인이 황제가 되었을 때 황실근위대장 감이다. 그렇기에 마음을 얻고자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현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묻는다.
“내 사람이 되어주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네.”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본 현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님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인가?”
지금껏 자신의 손짓에 응답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렇기에 의외라는 표정이다. 배석해 있는 귀족들은 감히 황태자의 권유를 거절한 현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황태자가 있는 자리인지라 발작하진 않는다.
“저는 카이엔 제국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럼 어느 곳 사람인가?”
“굳이 따지자면 지금은 아드리안 공국이지요.”
“아드리안? 그곳의 귀족이라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인가?”
“보시다시피 귀족은 아닙니다.”
“허어! 아드리안의 귀족도 아니면서 어찌…….”
황태자는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보다 황태자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게.”
자기 사람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해도 황태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정신 수양이 제법 된 듯하다.
“아드리안 공국은 오래 전부터 카이엔 제국의 제후국입니다. 맞습니까?”
“당연하네. 우리 제국에서 공국을 세워주었지.”
“하여 매년 사신도 보내고 조공도 바쳤습니다.”
“그래, 그랬지.”
아드리안 공국은 실제로 매년 사신과 조공을 보내온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까지 미판테 왕국, 쿠르스 왕국, 엘라이 왕국으로부터 존재의 위협을 받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것도 알고 있네.”
“카이엔의 제후국이라면 의당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못했네. 알다시피 본 제국도 두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네.”
있는 사실이기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제가 황태자님의 초청에 응한 이유는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뭐?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을?”
제후국의 자리를 버리고 홀로 일어서겠다는 말에 배석했던 귀족들이 눈썹을 치켜뜬다. 카이엔의 품을 떠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침착하다.
“자네는 아드리안 공국의 귀족도 아니라 하였네. 그런데 어찌 그리 중차대한 문제를 언급하는가?”
“제가 그럴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럴 만한 위치라…….”
황태자가 현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턱을 쓰다듬는다.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조만간 아드리안 공국은 홀로서기를 할 것 입니다. 그때 도움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넨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아드리안 공왕의 왕자와 공주들은 내가 다 아네. 설마 숨겨놓은 왕자라도 되는가?”
아드리안의 귀족이 아니라면 평민 또는 왕족이다. 평민이라면 아까처럼 능숙하게 테이블 예절을 보여줄 수 없다.
또한 후춧가루 병 같은 귀한 물건을 보유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왕족이다.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왕자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왕족도 아닙니다.”
“그런가? 그럼 무슨 자격으로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을 운운하는 것인가?”
황태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대체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는 표정들이다.
황태자비 역시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빛낸다.
어제 혼쭐이 났던 제1호위단장 사바트 자작과 제2호위대장 스미던 자작, 그리고 제1황자궁 소속 5서클 마법사 미세르 자작 역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뒤쪽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쉐런드 자작 역시 귀 기울이고 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기에 황태자의 청을 거절하고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을 운운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 순간 현수는 감추고 있던 아우라를 뿜어내며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입니다.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 이름이지요.”
“네? 이, 이, 이실리프 마탑의 마, 마탑주요?”
모두들 대경실색하며 눈을 크게 뜬다. 이때 근엄한 표정을 지은 현수가 말을 잇는다.
“매지션 로드이며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합니다.”
“허억! 그, 그랜드 마스터!”
“끄윽! 매, 매지션 로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대륙의 무력을 대표하는 마법과 검법 양쪽 모두의 최고봉이라는 뜻이다. 하여 모두들 눈알이 튀어나오려 한다.
입은 찢어질 듯 크게 벌어져 있다. 이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약 20초간 정적이 흘렀다. 현수가 주문한 다구를 들고 오던 시종마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곁에서 시중들던 시녀들은 아예 털썩 주저앉았다. 귀를 의심할 소리를 들은 때문이다.
“말로만 하면 믿기 힘들 겁니다. 그렇다 하여 이곳에서 미티어 스트라이크 같은 마법을 쓸 수는 없군요. 재앙이 될 테니까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공간 오픈!”
말은 마친 현수가 아공간에서 한 자루 장검을 꺼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바스타드 소드이다.
이것은 테리안의 헨탈 영지가 흑마법사의 나라인 브론테 왕국으로부터 공격 받을 때 습득한 전리품 중 하나이다.
기사가 쓰던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쓰던 것이다.
황태자와 일행은 대체 무엇을 하려 철검을 꺼내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때 현수가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지이이이이이이잉―!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진하고 선명한 검강이 뿜어져 나온다. 소드 마스터의 경우 검강의 길이는 화후에 따라 60㎝에서 1m 정도 된다.
그리고 선명도 역시 차이가 있다. 갓 소드 마스터가 된 사람의 검강은 길이도 짧고 균질하지 못하며 흐리다.
그런데 현수가 만들어낸 검강은 그 길이가 무려 20m가 넘는다. 당연히 두께며 폭이 일정하고 색도 엄청 진하다.
세상에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하지 않으니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그랜드 마스터에서도 최상급쯤 될 것이다.
아무튼 다들 눈알이 빠질 정도로 눈을 크게 뜬다. 입은 딱 벌리고 있다. 믿을 수 없는 광경 때문이다.
흔히들 소드 마스터를 전장의 지배자, 또는 절대자라 부른다. 겨우 60∼100㎝짜리 검강으로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20m가 넘는 검강이다. 전장의 지배자나 절대자가 아니다. 이 정도면 전장의 신(神)이라 불러야 한다.
“흐음, 이 정도면 내 말을 믿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수가 마나를 거두며 검을 집어넣는 순간 무릎 꿇는 두 사내가 있다.
쿵, 쿠쿵―!
“소인 미세르,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옵니다.”
“소인 쉐런드, 감히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옵니다.”
더없이 공경한 자세로 부복한 채 고개를 조아린다.
매지션 로드는 모든 마법사들의 추종을 받아 마땅한 황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쿵, 쿵, 쿵!
“자작 사바트가 감히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스미던 자작, 그랜드 마스터님의 용안을 뵈옵니다.”
“알링턴 후작, 감히 그랜드 마스터님을 배알하옵니다.”
…….
“공작 후퍼가 검의 끝에 계신 그랜드 마스터님을 뵙는 광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2장 드러난 위용!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와 검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으며 지극한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검사들에게 있어 그랜드 마스터는 극경의 예를 받을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편, 황태자는 뇌가 텅 비는 느낌을 받고 있다.
‘세상에!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한 것이 그랜드 마스터여서였어.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순간 먼저 정신을 차린 뮤엘라 황태자비가 허리를 쿡 찌른다. 그리곤 나직이 속삭였다.
“전하, 어서 예를 갖추시어요.”
“아! 그, 그렇지.”
황태자는 몹시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카이엔 제국의 제1황자 윈스턴 폰 카이엔, 영명하신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잠시 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