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3
“카이엔의 황태자비 뮤엘라 폰 카이엔이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탑주이시자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에 서신 매지션 로드이며 검의 끝에 계신 그랜드 마스터님을 뵙습니다.”
더 이상 공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흐흠, 모두들 편히 앉으십시오.”
“……!”
“그렇게 있는 게 본인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모두들 아까처럼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랜드 마스터님의 명을 따르옵니다.”
“매지션 로드의 명이시니 앉겠사옵니다.”
모두들 조심스런 표정과 동작으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아까와 달리 현수를 쳐다보는 이가 하나도 없다.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 이제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에 대한 전하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부황께 상신하여 회답하여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까지는 반말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황태자 신분이지만 감히 말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겠지요. 내가 이 일을 황태자 전하와 의논한 이유는 지금 당장 독립을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황태자를 비롯한 귀족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아드리안 공국은 이실리프 마탑의 보호를 받습니다.”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실리프 마탑의 창시자인 멀린이 아드리안 공국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건 비밀입니다만 라수수 협곡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과 나이젤 산맥의 지배자 골드 드래곤 제니스케리안이 아드리안의 수호룡이 될 겁니다.”
“네에?”
“뭐, 뭐라고요?”
“헉! 세상에 맙소사!”
모두의 눈이 또 한 번 뒤집힌다.
지난 수천 년간 아르센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위대한 존재 둘이 수호룡임을 자처한 경우가 없다.
지금은 수호룡이 있는 국가도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심하게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매지션 로드이자 그랜드 마스터가 한 말이다.
게다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기도 하다.
절대 농담일 수 없다.
“저, 정말이십니까?”
너무도 놀라운 말이기에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그렇습니다. 두 드래곤이 수호룡임을 선포하는 날 아드리안 공국의 독립을 승인해 주면 될 것입니다.”
이건 황제에게 묻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위대한 존재 둘이 아드리안 공국을 길이 수호하겠다는데 어찌 토를 달겠는가! 왕국이 아니라 제국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부황께 말씀드려 반드시 그리되도록 하겠습니다.”
“의견을 받아주어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저희 제국을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호적인 관계로 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만일 현수가 전쟁 중인 두 제국 중 하나와 좋은 관계라면 카이엔 제국은 불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실리프 마탑주는 9서클 마스터이다.
궁극 마법 한 방이면 웬만한 기사단 열 개쯤은 단숨에 재가 될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는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무조건 친해둬야 할 존재이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 불찰이지요.”
대답하던 현수의 눈에 시종이 띈다. 준비해 온 다구를 들고 달달 떨고 있다. 감히 다가올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뿜어낸 아우라 때문이다. 얼른 기세를 걷었다. 그러곤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허리를 굽실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이실리프 마탑의 차를 여러분에게 맛보이고 싶습니다.”
“……!”
모두들 바라만 보고 있다.
“아공간 오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시커먼 공간이 일렁인다.
모두의 눈이 커진다. 5서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아공간 마법은 꿈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꺼낸 것은 아라비카 커피믹스이다.
가져온 다구를 보니 커피 마시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아공간에서 커피잔 세트를 꺼냈다.
화려한 그림과 금장으로 장식된 것들이다.
커피를 넣고 보니 물이 식었다.
“히팅!”
말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식었던 물에서 수증기가 솟는다. 마법이란 정말 편리하다.
쪼르륵! 쪼르륵!
두 잔의 커피를 만들곤 시종을 불렀다.
“이것을 황태자 부부에게 가져다 드리게.”
“네에.”
공손히 대답한 시종이 두 잔의 아라비카 커피를 황태자 부부 앞에 놓았다.
“그건 뜨거울 때가 가장 맛이 좋습니다.”
“귀한 차인 듯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황태자비가 먼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곤 그윽한 아라비카 향을 음미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귀족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면서 만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이실리프 마탑주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모두들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후르륵―!
“흐음, 향이 좋고 맛도 참 좋습니다. 아주 달콤해요.”
황태자비의 말에 황태자도 커피 맛을 본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품종인지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습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입에 맞아서.”
말을 마친 현수는 차례로 찻잔에 물을 부었다. 그럴 때마다 시종이 다가와 귀족들에게 한 잔씩 돌렸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찻잔을 채우곤 슬쩍 들어 예를 표한다.
현수가 찻잔에 입을 대자 기다렸던 귀족 모두 커피 맛을 음미해 본다. 색깔은 이상한데 맛은 일품이다.
모두들 눈을 크게 뜬다. 이처럼 향이 깊으면서 맛이 달콤한 차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참, 이곳에 영광의 마탑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수도 외곽에 자리하고 있지요.”
“온 김에 마탑주를 만났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미세르 자작, 수정 통신구로 마탑주에게 소식을 전하게.”
“네, 전하!”
그렇지 않아도 영광의 마탑에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이다.
매지션 로드가 왕림했는데 마탑주가 코빼기도 안 비쳤다가 나중에 어떤 후환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경이 직접 가서 얼른 소식 전하게. 마탑주님께서 기다리시지 않아야 하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전하.”
미세르 자작이 후다닥 튀어나간다. 평상시엔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귀족 체면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렇기에 잽싼 걸음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듣자 하니 요즘 제국에 시끄러운 일이 있다고요.”
“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아드리안 공국은 물론이고 미판테 왕국까지 영사우스 상단 사모님에 대한 소문이 번졌더군요.”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 일이요. 들어본 바 있습니다. 사법부의 몇몇 관료가 뇌물을 먹고 청탁을 받아준 모양입니다. 바로잡기 위해 재수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전적으로 마탑주님의 고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황태자는 몹시 조심스런 태도로 현수를 바라본다.
“그 일에 관여된 세브란 신전의 신관 말입니다.”
“아, 네에. 파크(Park) 신관이라고 하더군요.”
“불의의 한 축인 듯싶습니다. 적절한 처벌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또한 사법관료 가운데에도 그 일에 연루된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에.”
“아드리안 공국뿐만 아니라 미판테 왕국까지 소문이 번지는 바람에 카이엔 제국의 체면에 손상이 가고 있더군요.”
“……!”
황태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모님이라 불리던 로드선 부인 사건이 타국에까지 번져 카이엔 제국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이 충격적인 것이다.
“이럴 땐 아주 엄한 처벌을 하여 일벌백계함이 민심을 다독이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앞으론 제가 직접 챙겨서 엄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황태자는 체면이 왕창 깎인 느낌이다.
하여 실제로 엄한 처벌을 내린다. 사모님이 감옥에서 외출할 수 있도록 협조한 사법 관료들은 모두 삭탈관직 된다.
그들에겐 먼저 채찍형이 선고된다. 하여 틀에 묶어놓고 각기 100대씩 채찍질을 당한다.
아마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다.
다음엔 본인이 처벌한 죄수들과 같은 감방에 넣는다.
그 안의 상황이 어찌 되겠는가! 구타와 폭행이 날마다 이어진다. 가석방 없는 30년형이기에 아마 지옥 같을 것이다.
한편, 원흉 중 하나인 파크 신관은 현수가 황태자와 대화하는 순간 세브란 신전을 떠나고 있었다.
소문이 번지자 신전은 재빨리 신관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파크 신관을 즉시 제명 처분했다.
신전이 논란의 중심에 서기 싫어 책임 회피를 하려는 술책의 일환이다. 그리곤 신전 입구에 불의한 일에 가담한 신관이 있어 유감이라는 방을 붙였다.
유감과 사과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유감(遺憾)이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을 뜻한다.
사과(謝過)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뜻이다.
신전은 끝까지 오만함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순간 파크 신관이 떠나고 있다.
병사들이 그를 잡으러 갔을 때엔 종적이 묘연해진 뒤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신성제국으로 옮겨갔다.
하여 신성제국에 신변 인도를 요청하지만 황태자의 요구는 거절된다. 이는 나중에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신성제국은 위상이 흔들릴 정도로 큰 화를 입게 된다.
황태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일단의 무리가 들어선다. 모두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다.
선두에 선 자를 본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연다.
“마탑주, 이분이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이시네.”
“아! 영광의 마탑 요한슨 드 스타이발이 감히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소인의 일생 중 더 없이 지극한 영광이옵니다.”
스타이발이 더 이상 깊숙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다.
“영광의 마탑…….”
“영광의 마탑…….”
“영광의 마탑…….”
“영광의 마탑…….”
예를 갖춘 마법사들 모두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를 벗어 머리를 드러낸다. 국왕 앞에서도 벗지 않던 것이다. 그런데 벗었다. 이것이 매지션 로드에 대한 예이기 때문이다.
“요한슨 드 스타이발이라 했나?”
“그러하옵니다, 로드시여!”
“내가 아는 바로는 로만 커크랜드가 마탑주인 것으로 아는데 어찌 된 일인가? 바뀐 건가?”
“그건 아닙니다, 로드시여. 영광의 마탑은 두 개가 존재하옵니다. 제국과 공국에 각기 하나씩 있사옵니다.”
“그런가?”
“네, 로드께서 언급하신 로만 커크랜드는 공국에 있는 영광의 마탑 탑주이옵니다.”
“흐음, 그렇게 된 것이군. 알겠네. 자넨 7서클인가?”
일곱 개의 마나 링이 느껴졌지만 확인 차 물은 것이다.
“네, 로드시여. 소인의 자질이 지극히 낮아 성취가 그것밖에 되지 않사옵니다.”
평상시 마탑주는 권위의 상징이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의 수장이며 후작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여 언제나 목을 뻣뻣하게 들고 다닌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행여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두렵다는 듯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마탑주가 이런데 다른 마법사들은 어떠하겠는가!
로드를 알현하는 일생의 광영에 부들부들 떨기까지 한다.
“내가 마탑주를 부른 것은 줄 것이 있기 때문이네.”
“네? 무엇을……?”
매지션 로드지만 일면식도 없다. 그런데 다짜고짜 뭘 준다 하니 대체 그게 무엇이냐는 표정이다.
“오래전 영광의 마탑주가 헬리온 드 스타이발 후작일 때를 기억하는가?”
“네? 아, 물론입니다. 그분은 제 선조이십니다.”
“그런가? 그때 영광의 마탑주가 우리 마탑에 보낸 물건이 있네. 세월도 오래 흘렀으니 돌려주고 싶은데, 받겠나?”
“저어, 그게 무엇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