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09화 (609/1,307)

# 609

“돈이 많으니 용병은 많이 고용할 수 있겠지만 하켄 영지군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로이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게 되었다.

카이로시아의 부친이 영주로 있는 로이어 영지의 북쪽엔 하켄 공작령, 그리고 로만 자작령이 있다.

얼마 전 빈셀 공작의 둘째아들인 베르나르 빈셀 드 하켄이 로이어 영지로 여행을 갔다.

말이 여행이지 실제론 술집 순례가 목적이다.

로이어 영지 주점의 접대부들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떠난 엽색 행각5)의 일환인 것이다.

소문나서 좋을 일 없기에 수행기사 둘과 시종 하나만 대동한 단출한 파티였다. 물론 돈은 많이 가지고 갔다.

계집들의 환심을 사기에 가장 좋은 게 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원하던 대로 환락의 시간을 보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르나르 일행은 로이어 영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산적의 습격을 받았다.

방심하고 있었기에 기사 하나와 시종은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6)에 목숨을 잃었다. 수련한 것에 비하면 허무한 죽음이다.

나머지 기사도 놀란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다. 계집질이나 하던 베르나르였기에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그리곤 여행 경비 전부를 빼앗겼다.

그 상태로 풀려났다면 큰 문제로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산적들이 베르나르를 상대로 장난을 쳤다.

다리가 부러진 기사와 베르나르를 산 채로 마차에 실어 보낸 것이다.

둘은 죄수들을 압송할 때 쓰는 마차처럼 꾸며놓은 것에 갇혔다. 그리고 발가벗겨진 채 묶여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 소리조차 칠 수 없는 상황이다.

베르나르의 등에는 ‘유부녀 겁탈범’이라는 문신을 새겨놓았다. 덕분에 수많은 짱돌 세례를 받았다.

이 글귀를 읽은 사람들은 침을 뱉기도 했다.

영지민들의 놀림거리가 돼서 돌아온 둘째아들을 본 공작은 분노했다. 하여 에델만 백작에게 산적들을 즉시 토벌하고 그들의 신병을 인도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상행으로 바빴지만 에델만 백작은 상위 귀족의 요청이기에 기사와 병사들을 문제의 장소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산적들의 종적이 묘연하다.

인근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하여 산적이 없어 토벌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공작은 에델만 백작이 고의적으로 산적들을 감췄다 생각하였는지 조금 더 위압적인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산적 토벌 및 신병 인도를 위해 영지 전체의 기사와 병사들을 동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에델만 백작은 공작의 요구대로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재차 산을 뒤졌다.

그런데 없는 산적을 어떻게 토벌하겠는가!

어쨌거나 수색에 동원된 기사와 병사들의 성명까지 기록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물론 산적이 없다는 내용이다.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포기했다 생각한 에델만 백작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의 공문이 당도하였다.

영지전을 선포한 것이다. 상위 귀족이 하위 귀족에게 영지전을 거는 일은 매우 드물다. 정말 갈아 마시고 싶을 정도로 사이가 악화되기 전까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에델만 백작은 자신이 보냈던 보고서를 떠올리곤 탄식했다. 상대에게 영지의 기사와 병사의 수를 정확히 알려주는 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공작은 기사 300명에 병사 30,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로이어 영지엔 기사 100명에 병사 10,000명뿐이다.

인원수로만 따져도 3분지 1밖에 안 된다. 공성전이 벌어져도 패배할 숫자이다.

문제는 공작가에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있다는 것이다. 공작 본인과 차기 공작이 될 아들이 그러하다.

이들 밑에는 잘 조련된 소드 익스퍼트가 우글거린다.

반면 로이어 영지군은 기껏해야 평범한 산적이나 오크 같은 몬스터를 상대할 실력뿐인 자들이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 전력 차가 심해 100전 100패가 확실하다.

하지만 맥없이 영지를 빼앗길 수는 없어 대대적으로 용병을 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길 하켄 영지가 로이어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의도는 예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켄 영지는 넓은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농지보다 산지가 월등히 많다.

하여 식량을 자급할 상황이 못 된다.

대신 철과 구리 광산이 있어 영지가 유지된다.

로이어 영지 역시 입지는 별로이다. 하지만 일찍이 장사를 업으로 삼아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레나 상단은 대륙 전체를 상대로 교역을 하는 이름난 상단이다.

빈셀 공작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레나 상단을 집어삼키면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영지전 선포 직전 하켄 영지에선 최종 제안을 한 바 있다. 등에 ‘유부녀 겁탈범’이라는 문신이 새겨진 베르나르의 첩으로 카이로시아를 달라는 것이다.

베르나르는 어린 나이 때부터 성(性)에 눈을 떴다. 하여 나이 열다섯에 하녀 셋을 임신시킨 바 있다.

이들 중 둘은 목숨을 잃어 암매장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출산 직후 태아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귀족이 아닌 혈통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수많은 여인에게 지분거려 영지민들 사이에선 ‘발정 난 수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로이어 영지로 엽색 행각을 떠난 후에도 이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지의 경계를 넘기 이틀 전, 그러니까 아직 하켄 공작령에 있을 때 베르나르는 어느 작은 마을의 여관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날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그 마을 처녀와 이웃 마을 총각의 결혼식이 있었던 것이다.

술을 마시며 결혼식을 지켜보던 베르나르는 신부의 얼굴을 보고 결혼식을 중단시켰다.

그리곤 초야권(初夜權, jus primae noctis)을 주장했다.

부친인 공작을 대신하여 본인이 신부에게 첫 경험을 시켜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초야권이란 중세 유럽에서도 영주가 영지민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행사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랑보다 먼저 영주가 신부와 최초의 성교를 맺는 권리이다. 1979년에 개봉된 칼리귤라라는 영화를 보면 결혼식장에서 초야권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켄 영지에 있어 최근 200년 동안 초야권은 문서에만 있는 사장된 권리였다. 그럼에도 그걸 주장했고, 결국은 관철해 냈다.

기쁘고 행복해야 할 결혼식이 눈물과 치미는 분노를 억눌러야만 하는 우울한 상황으로 변해 버렸다.

원치 않는 관계를 맺게 되어 눈물 젖은 신부를 본 신랑은 분노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억울해도 평민은 귀족에게 대항해선 안 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마을을 떠나는 두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베르나르 일행이고 다른 하나는 신부의 빼앗긴 순결에 분노한 신랑 일행이다.

그리고 베르나르가 로이어 영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산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복수를 마친 신랑과 그 일족은 베르나르로부터 빼앗은 돈을 노자 삼아 이웃 나라로 가버렸다. 보복할 것이기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폭정과 수탈이 견디기 힘들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에델만 백작은 베르나르가 색(色)에 미친 개종자라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그런 놈에게 사랑하는 딸을 정실부인도 아닌 첩으로 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당연히 거절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그 즉시 영지전이 선포된 것이다.

“흐음! 베르나르라는 놈이 감히 로시아를 탐냈단 말이지? 이건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는 일이지.”

현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민 때문이다.

마저 이야길 들어보니 영지전이 벌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는 듯하다. 상위 귀족이 자신보다 군세가 약한 하위 귀족에게 영지전을 걸 때엔 만반의 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흠, 시간이 있다니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생각을 정리한 현수는 가이아 신전에 관해 물었다.

신전은 황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한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단위 밀농사를 짓는데 어찌 수도 한복판에 있나 싶었던 것이다. 더 물어보니 신전이 직영하는 농장은 수도 외곽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곧장 신전 농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생각해 보니 헤론찜은 세실리아 여관 쪽이 조금 더 맛있다는 느낌이다.

“정지하십시오. 여긴 신전 농지입니다. 혹시 이곳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나는 코리아 제국에서 온 하인스 멀린 백작이네. 이곳 농지를 견학코자 왔다.”

현수는 멀린이 물려준 멋진 예복 차림이다. 누가 봐도 귀족이기에 신전 입구를 지키는 위병이 존댓말을 쓰는 것이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현수를 남겨둔 위병이 서둘러 초소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하얀 갑옷을 걸친 성기사와 신관 하나가 나온다.

그중 머리가 하얗게 센 신관이 위병으로부터 몇 마디 말을 듣고는 현수에게 시선을 돌린다.

“어서 오십시오. 가이아 여신의 종 페룸이라 합니다. 코리아 제국에서 오신 하인스 백작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저희 신전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잘못 찾아오신 것은 아닌지요? 신전 본관은 황궁 부근에 있습니다.”

방문 목적이 무엇이냐는 표정이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서 재배되는 밀을 살펴보고자 함입니다.”

“밀을요?”

귀족이 어찌 밀 따위를 보자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합니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밀이 다른 것과 달리 수확량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귀족이신데 어찌 밀을 보자 하시는지요?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꼭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겁니까?”

이곳에 농산물에 관한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심하게 따진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신전에서 밀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라이셔 제국을 위함입니다. 다른 제국의 귀족께서 물으시니 궁금하여 여쭙는 겁니다.”

“아! 그런 겁니까?”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모시는 신전의 총본산이 라이셔 제국의 수도에 있는 이유는 후원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국에서 물심양면으로 가이아 신전을 돕기에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의 일환으로 밀의 수확량 증대를 연구했던 것이다.

“그러합니다. 아울러 황성의 윤허가 있어야 이곳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지만 확실하게 물러나 달라는 요청이다.

“황궁의 윤허만 있으면 됩니까?”

“그러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리하여 주십시오. 저희는 명문화되어 있는 규정 때문에 그럽니다.”

“알겠습니다, 페룸 신관님. 황실의 윤허를 받아오지요.”

“네, 살펴 가십시오.”

정중히 합장하고 고개까지 숙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쳇! 어째 쉽다 했다. 흐음, 그나저나 황실의 윤허를 받으라니. 대체 누구의 허가를 받아오라는 거지? 황제인가?’

내심 투덜거리며 왔던 길을 되짚었다.

‘할 수 없이 직위를 팔아야 하나?’

이실리프 마탑주라고 하면 황제라 할지라도 거절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일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국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부산에 소재한 BS금융지주는 정부의 지분이 하나도 없는 순수 민간 금융 회사이다. 그런데 금감원에서 회장더러 조기 퇴진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이유는 CEO가 장기 집권하여 폐해가 현실화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만두고 나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용퇴를 권했지만 사실상 그만두고 나가라는 압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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