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1
한 마리도 버겁다. 그런데 두 마리가 오고 있다.
“헨리! 어서 뛰어! 어서 뛰란 말이야!”
헨리의 아버지 론슨이 고함을 지르는 동안에도 트롤과의 간격은 좁아지고 있다. 지금은 20m쯤 되지만 금방 덜미를 잡힐 듯하다. 트롤이 훨씬 빠른 때문이다.
“아! 이제 끝이야. 트롤이라니… 어떻게 트롤이…….”
“트롤이 없는 데라더니 거짓말이었군.”
“지난 십 년간 단 한 번도 트롤을 못 봤는데.”
힐끔 뒤를 돌아보니 노인과 아녀자들이 대피소로 피하는 중이다. 땅을 파놓고 그 위를 판자로 덮은 단순한 것이다.
세실리아가 들어가자 뚜껑이 덮인다. 그런데 너무나 약해 보인다. 고블린은 괜찮겠지만 육중한 트롤이 올라서면 단번에 부서질 것이다. 그럼 모두가 트롤의 식량이 된다.
“자, 자네 혹시 트롤과 싸워보았나?”
“……!”
현수는 대답 대신 헨리를 바라보았다. 죽어라 달려오는데 트롤과의 간격이 10m 정도로 줄어 있다.
“어서, 헨리! 어서, 헨리!”
어른들이 소리치지만 헨리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너무나 먼 거리를 전력 질주하였기에 근육이 피로해진 때문이다.
“헉, 헉! 헉, 헉!”
대여섯 번의 호흡을 하는 사이에 트롤은 헨리의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이 순간 목책 부근에 있던 현수가 튀어나갔다.
“헨리! 어서! 야아압!”
쉐에에엑―!
뽑아 든 바스타드 소드가 헨리를 잡아채려는 트롤의 앞발로 쏘아져 간다.
퍼억―!
꾸웨에에엑―!
불의의 일격을 당한 트롤이 비명을 지르며 주춤하는 사이 다른 놈이 헨리를 잡아채려 한다.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검을 휘둘러 놈에게도 상처를 입혔다.
파악―!
꿰엑! 꿰에에에에엑―!
암놈인 듯 약간 작은 놈이 괴상한 소리를 내는 사이에 수컷의 상처가 아물고 있다.
이때부터 현수는 트롤에게 자잘한 상처를 입혔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마을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유도했다.
현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입는 상처 때문에 흉포해진 녀석들은 물불 안 가리고 따라온다.
그렇게 이동하다 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다가서던 고블린 무리와 맞부딪쳤다.
트롤을 본 녀석들은 기겁을 하며 도주한다. 이로써 마을의 위험은 사라진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위태위태한 광경을 연출하는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겨우 5실버를 받겠다며 온 용병이다. C급이니 오크 한 마리와 대등한 전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트롤 두 마리를 상대하고 있다. 물론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차츰 마을에서 멀어지더니 아예 보이지 않는 숲으로 가고 있다. 울창한 나무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짐작된다.
현수를 따라 트롤 두 마리가 숲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 마을에선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맞는 녀석은 당연히 헨리이고, 패는 사람은 론슨이다. 그의 손에는 굵은 몽둥이가 들려 있다.
“이 쌍놈의 새끼! 말을 안 들어 처먹더니 오늘 아주 뒈지려고 작정을 했지?”
“아, 아닙니다, 아버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야! 이놈의 새끼야. 내가 돌아오라고 몇 번이라 말했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로는 어림도 없다. 벽 짚고 엎드려뻗쳐.”
“……!”
“이놈의 새끼가 또 말을 안 들어? 오냐! 그동안 뺀질거리고 말 안 들은 거 오늘 한번 계산해 보자.”
“아, 알았어요. 엎드릴게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돌아서자 곧바로 몽둥이가 날아간다.
휘이익―! 퍼억!
“아악!”
퍽, 팍―!
“으아악! 악! 아파요, 아버지! 정말 아파요!”
헨리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애원하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이다.
“아파? 겨우 고깟 걸로? 트롤이 니 대가리를 씹으면 얼마나 아플 것 같냐? 이 쌍놈의 새끼야! 처먹기만 하면서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개기다가 몬스터에게 씹혀보고 싶어?”
“아, 아니에요, 아버지. 자, 잘못했습니다.”
헨리가 불쌍한 얼굴을 하며 손사래를 치지만 소용없다.
“잘못했다고? 이미 늦었어. 아까 그 용병이 없었다면 넌 오늘 트롤에게 씹혀서 죽은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몬스터에게 씹히는 것과 비슷한 맛을 느끼게 해주마. 이잇!”
팍, 퍽, 퍼퍽! 파팍! 퍼억―!
“아악, 악! 크악! 캐액! 아악! 아파요. 아아악!
헨리는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얻어터지고 있다. 몽둥이로만 패는 게 아니다. 발로도 걷어찬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두들겨 패듯 그렇게 때리고 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평상시에 말 안 듣고 뺀질거리기만 하던 녀석, 잘 걸렸다는 표정이다.
“자네 아들 다 패고 나면 나도 좀 패야겠네.”
세실리아 아빠 피터가 한 말이다.
“자네가 왜?”
“헨리 때문에 우리 세실리아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래, 그랬지. 그래, 패게. 아예 반쯤 죽여도 되네.”
론슨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기회에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완전히 뜯어고칠 생각인 것이다.
“알았네. 죽지 않을 만큼만 다져놓겠네. 아까를 생각하면……. 어휴! 간이 반으로 쫄아들었네.”
피터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다.
“그래! 자네가 헨리를 팰 때 나는 세실리아 좀 패겠네. 그놈의 계집애도 말 안 듣기는 막상막하 아닌가? 오늘 이것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치세.”
“그래, 좋네. 그렇지 않아도 벼르던 차네. 세실리아를 패게. 개 패듯 패도 되네. 죽이지만 말게.”
“오케이! 그렇게 하세. 헨리, 너 이리 와! 이잇!”
퍼억―!
“아악! 아버지! 아파요! 너무 아파요! 아들 죽어요!”
퍼억―!
“으으윽!”
헨리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다.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멀리 도망쳤다가 슬그머니 나타나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의 화가 많이 가라앉자 백 대 맞을 일도 다섯 대쯤으로 끝난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되지 않을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후다닥 튀려고 했는데 빙 둘러싸고 있던 어른이 발로 가슴팍을 밀어 버린다. 그 바람에 아버지 앞까지 굴러오자 기다렸다는 몽둥이찜질이 시작된다.
퍽, 팍! 퍼억! 빡! 퍽! 퍽퍽!
“악! 윽! 켁! 끄윽! 아악! 아아악! 케액!”
이날 헨리와 세실리아는 열흘 동안 끙끙 앓고야 간신히 일어날 정도로 무섭게 두들겨 맞는다.
이를 본 다른 아이들은 어른들이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된다. 하여 이 마을에선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는 아이들이 없게 된다. 일벌백계가 확실히 먹혀든 것이다.
그중엔 헨리와 세실리아 포함된다. 어른들의 한마디에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게 된다.
못된 버르장머리가 완전히 고쳐진 것이다.
어쨌거나 트롤들을 숲으로 유인한 현수는 녀석들을 아공간에 넣었다. 로시아와 로잘린의 바디체인지를 위한 환단의 원료 중 트롤의 선혈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도주한 고블린 차례이다.
녀석들의 종적을 쫓아가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이다. 다 잡고 보니 54마리이다.
마을을 괴롭히던 녀석 전부인 듯하다.
이 녀석들을 아공간에 넣기 전에 마비침을 먼저 수거했다.
지구로 가져가면 상당히 괜찮은 진통제, 또는 마취제의 원료가 될 듯싶었던 것이다.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 다시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
땅굴 속에 계속 있었다면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서 확인해 보니 거의 다 자라 조만간 독립할 트롤 새끼들이 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아공간에 담았다.
트롤의 선혈은 포션의 원료이기에 다다익선이다.
쿵, 쿵, 쿵―!
“…누, 누구슈? 혹시 사람이요?”
피터는 한밤중에 목책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잔뜩 긴장했다. 몬스터들이 이러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아까 왔던 C급 용병입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뭐라고? 자, 잠깐만.”
사람 목소리가 확실하기에 재빨리 빗장을 뽑는다.
삐거덕―!
마찰음과 함께 목책의 문이 열린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된 건가?”
현수를 보고 마치 귀신을 본 듯 놀란다.
“피터, 누가 왔어? 문은 왜 열… 허억!”
새롭게 나타난 이는 말썽쟁이 헨리의 아빠 론슨이다. 현수를 보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두 마리 트롤에게 쫓겼으니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곤 몹시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고블린을 잡아달라며 현수를 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쩡히 돌아왔으니 놀랄 만도 하다.
“어, 어떻게 돌아왔나? 트롤은?”
“숲에서 놈들을 따돌렸습니다.”
“따돌려? 그럼 냄새를 맡고 따라오지 않을까?”
몹시 불안한 표정이다. 트롤 두 마리가 오면 마을은 쑥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요. 오지 않을 겁니다. 이 마을과 반대쪽으로 가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그, 그런가? 아무튼 고맙네. 자네 덕에 아이들도 살고 마을도 무사하네. 자, 어서 가세.”
“네.”
론슨을 따라 들어가니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 있다. 딱 열 가구가 사는 마을이다. 총인원은 60명 정도 된다.
부부와 자식들, 그리고 부모님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다.
“고맙소, 젊은이. 젊은이 덕분에 마을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소.”
나이 80은 훨씬 넘겼을 할아버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한다.
“아뇨. 제가 뭐 한 거 있나요? 트롤에게 쫓겨 다니다가 간신히 되돌아온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고마우이. 모두 자네 덕일세.”
노인은 현수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잠시 후, 조촐한 식사를 차려왔다. 세실리아의 어머니라면서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은 한다.
문득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이 떠오른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다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세실리아의 엄마가 차려온 식사는 딱 이 수필의 내용 같다.
수수를 쪄서 주먹밥처럼 만든 것 두 개와 약간 짠맛 나는 소스 하나뿐이다. 아마 이들에겐 이게 최상의 양식일 것이다.
별로 배고프지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하여 다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맛이 좋네요.”
“미안하네. 여긴 이런 것밖에 없어서. 자, 이건 약속했던 5실버네. 많이 못 줘서 미안하이.”
론슨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 일도 없는데요, 뭐. 그나저나 고블린은 안 왔죠?”
“그래. 트롤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는지 오늘은 오지 않았네.”
“아마 안 올 겁니다.”
“왜? 무얼 봤는가?”
“네, 트롤들이 그 녀석들을 쫓아갔거든요. 아마 트롤의 먹이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고블린이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어쨌든 고맙네.”
“고맙기는요. 그냥 그렇다는 건데요.”
현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고부군수 조병갑8) 같은 탐관오리가 와서 쥐어짜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