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12화 (612/1,307)

# 612

부담되는 이야길 할 이유가 없다.

“오늘은 예서 자고 내일 가게. 밤길은 위험하네.”

“알겠습니다. 그럼 하룻밤 신세 지겠습니다.”

현수는 마을 촌장 노릇을 하는 론슨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밤새 헨리가 끙끙거리며 신음을 토했다.

너무 많이 맞은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법으로 고쳐주지 않았다. 버릇 고치려고 패놓은 걸 뻔히 아는데 어찌 그러겠는가!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목책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계십시오. 잘 쉬었다 갑니다.”

“고맙네, 하인스! 승승장구하시게!”

* * *

“그나저나 황궁의 허가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이네.”

화전민 마을로부터 코린까지 걸으며 묘안을 찾아내려 했지만 방법이 없다. 라이셔 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이레나 상단의 본점이 로이어 영지에 있다는 것뿐이다.

“어휴! 미치겠네. 그걸 꼭 봐야 하는데.”

신관이 만들어낸 밀의 새로운 품종은 꼭 얻어야 한다. 어쩌면 지구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마법을 써서 속성 재배하는 건 이쪽에서밖에 못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걷던 현수는 시장기를 느끼고는 인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열 살쯤 된 녀석이 환히 웃는다.

“어서 옵셔! 혼자이십니까?”

한국이나 라이셔 제국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멘트이다.

“그래, 자리 있니?”

“네, 저기 저쪽 창가 자리에 앉으세요. 근데 식사는 뭐로 드려요?”

“흐음, 배가 좀 고프구나. 그러니 가장 빨리 나오는 것으로 가져다주렴. 얼마지?”

“당근과 감자, 그리고 양고기를 넣은 스튜가 가장 빨라요. 가격은 50쿠퍼구요. 근데 술은 필요 없어요?”

“술? 그래, 독하지 않은 걸로 한잔 다오. 그건 얼마지?”

“슬럼주 한 잔은 20쿠퍼예요.”

이건 올테른의 세실리아 여관에서 맛보았던 술이다.

그때 꽤 괜찮다 생각하였기에 더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럼주? 그래, 그걸로 한 잔 다오.”

팅―!

은화 한 닢이 꼬맹이의 손으로 들어간다.

“1실버 받았습니다, 손님! 스튜 50쿠퍼, 슬럼주 한 병 20쿠퍼, 해서 70쿠펍니다.”

“그래, 나머진 너 가져.”

“저, 정말이세요?”

적은 돈이지만 심하게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래. 대신 빨리 가져다주렴. 내 배가 몹시 고프니.”

“네, 그럼요! 후딱 가져올게요. 앉아 계세요.”

이곳에선 유리가 보석이다. 따라서 맑은 유리창은 기대할 수 없다. 판자도 지구에서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다.

대패 비슷한 것으로 밀기는 했지만 울퉁불퉁하다.

아무튼 채광을 위해 바람은 선선하지만 모든 창문이 열려 있다. 하여 주점 내부는 그리 어둡지 않은 편이다.

“자, 여기 있습니다.”

술부터 내온다. 그리곤 금방 스튜를 가져왔다. 아침을 시원찮게 먹어서 그런지 맛이 괜찮았다.

식사를 하고도 일어서지 않았다.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때문이다.

현수의 바로 옆 테이블에는 평민치고는 복장이 깨끗한 일행이 몇 잔의 술을 앞에 놓고 수다를 떠는 중이다.

물론 모두 남자들이다.

그런데 모두의 음성이 매우 작다. 마법을 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인다. 그러면서 깔깔거리면서 웃기도 한다. 대체 뭔 내용인가 싶다.

“이브즈드랍!”

엿듣기 마법을 구현시키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 그냥 나오셨지. 그게 안 되는데 뭐가 되겠어? 안 그래?”

“아! 같은 사내로서 안타깝네. 그 공녀 샨크스 왕국에서도 이름난 절세미녀라며?”

“당연히 엄청 예쁘지.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려.”

“그래? 그 정도야?”

“그럼! 내가 여태까지 본 여자들 중에 최고로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야.”

“그래서 황제 폐하께선 어떻게 하셨는데?”

“어떻게 하긴 백방으로 좋다는 건 다 구해서 드셨지.”

“그런데? 그래서 효과가 있었어?”

“아니. 여전히 고개 숙인 남자셔. 그래서 요즘 짜증이 좀 많이 느셨어.”

“마탑에서 가져간 것도 소용이 없었어?”

“마법사님이 오셔서 폐하께 마법을 거셨는데 잠시 반짝이래. 그래서 요즘 마탑하고도 사이가 별로셔.”

“참, 공주님은 요즘 어떠셔?”

“에구, 말도 마라. 요즘 장미궁 소속 시녀들, 아주 죽을 맛이란다.”

“왜? 왜 죽을 맛인데?”

“왜긴, 공주님 짜증이 나날이 느니 그렇지. 그 구하기 어려운 걸 못 구해온다고 매일 시녀들을 들들 볶는다더라.”

“쩝! 얼굴은 예쁘신 분이 왜 그렇대? 유니콘하고 페가수스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건데 그걸 어찌 구해오라는 거지?”

“얼굴하고 몸매만 예쁘지 솔직히 말해 성질은 진짜 지랄이잖아. 안 그래?”

“하긴 그래. 공주님 안하무인이고 성질 더러운 거야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새삼스레 물은 내가 잘못이다.”

“야야, 우리 너무 떠들었다 보다. 이러다 늦겠어.”

“그래. 이제 이만 하고 가자. 아, 오늘 수다 한번 실컷 떨었다.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서 죽을 뻔했어.”

“그건 그래. 우리 다음 달에도 또 만나서 이렇게 놀자.”

“그래. 오늘 만나서 즐거웠다. 다음 달에 또 보자.”

계집애들처럼 수다를 떨던 사내 넷이 둘씩 짝지어 나간다. 아마도 소속이 다른 듯하다.

사내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용병 차림 남녀가 자리 잡고 앉는다. 음식을 주문하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다.

정보를 얻으러 들어온 곳이기에 이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

“대장, 진짜 그리로 가는 거야?”

“가야지. 예전에 입은 은혜도 있으니.”

“여기서 거기까지 솔직히 너무 멀잖아. 근데도 가?”

“그래. 누가 뭐래도 난 간다. 넌 가기 싫음 안 가도 돼.”

“무슨 소리야? 대장이 가면 나도 가야지. 근데 왜 난 빼놓고 가려고 해?”

“하켄 공작령의 전력이 너무 강해. 잘못하면 전멸당하는 수가 있어. 빈센 공작이 후환이 될 존재들은 남겨두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럼 죽을 수도 있는데도 간다는 거야?”

여자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사내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가야 해. 에델만 백작님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절호의 기회야.”

“…그럼 나는? 대장이 거기 가서 죽어버리면 나는?”

보아하니 용병단의 일원인 듯하다.

“흐으음!”

대장이라 불린 자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긴 한숨만 쉰다. 그리곤 여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제 진심이 담긴 말을 하려는 듯하다.

“내가 못 오면… 아냐. 이런 우울한 대화는 하지 말자. 아무튼 난 로이어 영지로 갈 거야. 루시는 여기 남아.”

“싫어. 나도 갈 거야. 대장이 죽으면 나도 따라서 죽을 거니까. 그러니까 나 말리지 마.”

말을 마친 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단숨에 술잔을 비운다.

현수는 사내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제법 준수한 30대 초반이다. 적당한 근육질이다.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걸 보니 경험도 꽤 되는 듯싶다.

식사를 마친 둘은 단원들 마중 가야 한다면서 나갔다.

“흐으음! 로이어 영지…….”

장차 장인이 될 사람이 애써 가꾸는 곳이다. 한데 욕심 사나운 다른 놈에 의해 영지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둘이 떠난 자리를 또 다른 용병들이 차지한다.

“이봐, 자네도 로이어로 갈 거지?”

“가야지. 보수를 짭짤하게 준다는데 왜 안 가?”

“근데 그쪽 전력이 너무 약한 거 아냐? 괜히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을 것 같아 걱정돼.”

“칼밥 먹고사는 우리가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돈을 버나? 돈 준다면 일단은 가야지.”

“그래, 가자. 용병들이 대거 그쪽으로 가는 분위기잖아.”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중 이레나 상단 일 안 해본 사람 거의 없잖아.”

용병들은 계속해서 로이어 영지와 하켄 공작령 간의 영지전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인이 인심을 잃진 않은 듯하다.

사위로서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하켄 공작령의 모든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병사들이 두 손 들고 항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지전은 개전도 하기 전에 끝날 것이다.

둘째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용병으로 참전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무력을 투사하느냐이다.

“소드 마스터들을 막아주면 될까? 그쪽에 관한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하네.”

7장 망나니는 몽둥이가 약이야

현수는 골목을 따라 터벅터벅 걷는 중이다. 중세 유럽에 온 듯한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려 시작한 산책이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데 걷다 보니 대로를 벗어나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어이, 거기!”

“……?”

누군가의 부름에 시선을 돌려보니 사내 다섯이 서 있다.

“날 부른 거유?”

“그래. 거기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헐!”

현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사내들 중 하나가 입을 연다.

“좋은 말로 끝내자고. 우리도 폭력 쓰긴 싫으니까.”

“……!”

“자, 지금부터 소지하고 있는 모든 귀중품을 꺼내. 허리춤에 폼으로 매달고 있는 칼도 포함해서 말이야.”

“니들 지금 강도짓하려는 거야? 나 용병으로 안 보여?”

“보이지. 허접한 C급 용병으로. 크흐흐!”

“용병을 건드렸다간 길드의 보복을 받는다는 건 아나?”

“당연히 알지. 우리가 그거 무서워할 것 같아? 여길 봐. 코린의 뒷골목이라고. 여긴 우리가 주름잡지. 안 그래?”

“크크! 그럼. 여기선 용병 따윈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지.”

좁고 복잡한 골목이 미로처럼 널려 있는 모양이다. 현수는 놈들의 수작이 가소로웠다.

“그러니까 니들은 내가 만만해 보인다는 거지?”

“혼자 다니는 C급 용병 따위는 그렇게 보이지.”

사내들은 모처럼 놀림감을 찾았다는 듯 괴소를 짓는다.

보아하니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사람들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녀석들인 듯싶다.

“그러다 맞으면 덜 아프냐?”

“크크, 누가 맞는지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불량한 자세로 벽에 기대 있던 녀석들이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덤벼!”

짐짓 C급 용병처럼 보이려 바스타드 소드를 뽑았다.

스르르르릉―!

“크크, 그깟 걸 뽑으면 우리가 겁먹을 줄 알았나 보지?”

“흐흐, 그러게 말이야. 얘들아, 우리도 무기를 뽑아야 하지 않겠냐?”

“당연히 그래야지.”

말을 마치곤 뒤쪽 허리춤에서 대거를 뽑아 든다.

“어때? 겁나지? 그거 하나로 대거 다섯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냥 있는 거 다 꺼내놓고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글쎄? 난 그럴 맘 없는데 어쩌지? 미리 말하는데, 나 평범한 용병 아냐. 그러니까 니들이야말로 들고 있는 대거 다 내려놓고 빌어. 그럼 용서해 줄 테니. 알았어?”

현수의 말에 녀석들이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갑자기 기세가 변한다. 흥분했다는 뜻이다.

“얘들아, 안 되겠다. 이놈 담가.”

“알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서히 다가선다.

이들은 저승사자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현수는 녀석들이 가까이 다가오도록 기다렸다. 그러다 모두가 마법 구현 범위 내에 들자 싱긋 웃어주었다.

“홀드 퍼슨! 홀드 퍼슨! 헐드 퍼슨!”

“헉! 마, 마법?”

“이런 제기랄! 당했다!”

“으으윽! 안 돼!”

“이잇! 마법사라니…….”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심하게 당황해한다.

현수는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놈들 가운데 하나의 턱 밑에 들이밀었다.

“어때? 내가 조금 전에 그랬잖아. 나 평범한 용병이 아니라고. 이제 이걸 조금 더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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