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8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딸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신분을 드러내면 잠시는 기쁘겠지만 이후론 늙어 죽을 때까지 정신적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걸 원하지 않는 것이다.
면전의 상인 역시 이걸 깨우친 듯하다.
“어쨌거나 황제를 만나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황제가 겪는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함이네.”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즉시 선을 대겠습니다.”
이실리프 마탑주이니 그 정도는 우습게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반문하지 않는다.
“그래,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네! 하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알렉스는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이 없어졌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델만 백작 본인 내지는 에머랄 에델만 드 로이어가 쓰는 집무실인 듯 제법 인테리어가 괜찮다.
“왔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싱긋 미소 지은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A4용지 박스를 꺼내기 시작했다. 1㎡당 80g이면 괜찮은 것이다.
이것은 박스 당 2,500매씩 담겨 있다.
집무실 벽에 기대어 쌓아놓고 보니 300박스이다. 750,000매이다. A4용지 한 장에 1실버씩은 받을 것이다.
7,500골드, 한화로 환산하면 75억 원어치이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하여 여러 색깔 볼펜을 꺼내놓았다.
이번에 꺼낸 것은 국산 필기구 제조사인 ‘자바펜’에서 만든 것이다. 빨강, 파랑, 검정 0.7㎜짜리 6,000자루씩, 그리고 1.0㎜짜리 6,000자루씩을 꺼냈다.
처갓집이 될 곳인지라 넉넉하게 꺼낸 것이다. 값을 얼마나 쳐서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꽤 돈이 될 것이다.
다음은 사탕이다. 꺼내놓고 보니 2.5톤 트럭으로 하나 정도 된다. 내친김에 설탕도 꺼내놓았다. 3㎏짜리 2,000봉지를 꺼냈다. 소금 역시 상당히 많이 내놓았다.
처가에 주는 지참금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더 이상 꺼내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자 자리에 앉았다. 이때 문이 열리며 아까의 그 상인이 들어선다.
“헉! 이건… 이건 대체 뭡니까?”
저도 모르게 물은 말이다.
“이쪽에 있는 것들은 종이라 하네. 이것들은 장부 정리할 때 쓰는 필기구로 볼펜이라 하네.”
“이게 종이라는 거라굽쇼?”
“그래. 박스 하나당 2,500매씩 담겨 있지.”
“헐! 근데 종이가 뭡니까?”
아르센 대륙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기에 온갖 물건을 취급하는 이레나 상단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문서나 장부로 사용하는 양피지보다 더 얇고 필기감이 더 좋은 것이지. 나중에 써보면 알게 될 것이네.”
“이 작은 박스에 2,500장이나 들어 있다는 겁니까?”
“그래, 나중에 열어서 세어보게. 그리고 이쪽에 있는 건 필기구네. 이렇게…….”
혹시 몰라 꺼내놓은 종이에 붉은색, 푸른색, 검정색 글씨가 쓰이자 화들짝 놀란다. 잉크를 찍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글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허어, 세상에!”
놀라거나 말거나 다음 것을 가리켰다.
“이건 사탕이라는 거네. 먹으면 아주 달지. 자, 자네도 하나 먹어보게.”
말을 하며 껍질을 벗겨 상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상인의 눈이 금방 커진다.
“세, 세상에! 이게 대체 뭐기에 이처럼 달콤한 거죠?”
상인의 입속에서 녹고 있는 것은 오리온 바이오 생우유 캔디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다.
“사탕이라는 것이네. 이렇게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이네.”
“하으음! 이거 엄청 맛있습니다.”
“그래, 달지. 그래서 사탕이라 하네. 참, 이건 설탕이라는 것이네. 이것도 아주 달지. 한번 맛을 보게.”
준비해 뒀던 각설탕 하나를 입에 넣어주었다.
“하음……!”
맛의 신세계를 발견한 듯한 표정이다. 상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열심히 침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이건 소금이네. 아주 짜지. 음식 만들 때 넣는 것이네. 설탕과는 입자 크기가 다르니 구별하기 쉬울 것이네.”
“아! 소금이요? 그런데 이건 아주 하얗습니다.”
“그래, 불순물이 거의 없어서이네.”
“그런데 이게 다 뭐랍니까?”
“카이로시아가 내 아내가 될 것이란 전갈은 받았지?”
상인의 고개가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인다.
“네, 오전에 일루신 도련님으로부터 전언을 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것들은 카이로시아를 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장인께 드리는 선물이네.”
“네에? 이거 전부요?”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나 어마어마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계산한 것만 A4용지 7,500골드, 볼펜 12,000골드, 사탕 12,000골드, 설탕 6,000골드, 그리고 소금 12,500골드이다.
합계 50,000골드로 계산한 것이다.
한화로 500억 원이다. 귀족가의 혼사도 이만한 지참금 내지 선물은 매우 드물다.
“그렇다네. 장인이 오시면 내가 주었다 말 전하게.”
“그럼요. 그러구말굽쇼. 당연합니다.”
상인은 이실리프 마탑주가 상단주의 사위가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식적인 결혼식이 치러지기 전이기에 아직은 공표할 수 없다. 혼사가 틀어지면 카이로시아의 행복은 영원히 물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탑주가 사위가 된다는 소리에 몹시 들떠 있다. 하여 현수를 볼 때마다 지상 최고로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황궁에 연락은 되었는가?”
“네. 황궁 시종장에게 선을 댔습죠. 황제 폐하의 어려움을 해결할 고명한 분이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래, 잘했네. 근데 얼마나 기다리면 전갈이 올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전갈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해 보겠습니다.”
현수를 남기고 자리를 비운 상인이 되돌아오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황궁으로 드시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흐음, 그런가? 알겠네.”
“그런데 복장을 조금 바꾸심이…….”
여전히 C급 용병 차림이기에 상인의 말을 따랐다. 갈아입은 의복은 양복이다.
“……!”
상인이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전혀 본 적 없는 복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예술적인 바느질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봉합된 부분이 있는데 삐져나온 실밥은 없고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은 때문이다.
“이 의복은……?”
어떤 질문을 하려는지 금방 알 수 있기에 기다리지 않고 대꾸했다.
“내가 살던 제국의 예복이네. 그나저나 황궁으로 들어가면 누굴 찾으라고?”
“네, 아트만 시종장님입니다. 이레나 상단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서 뫼실 겁니다.”
“좋아, 수고했네. 갔다 와서 보세.”
“네, 알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다.
“뭔가? 더 주의할 것이 있는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영지에 연락을 드려도 되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로이어 영지 말인가?”
“네, 상단주님과 큰도련님께서 노심초사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마탑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말만 들어도…….”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렇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전해도 되네. 다만 보안을 유지하시라 말씀드리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기왕에 걸어온 영지전이니 이겨야 하지 않겠나?”
“네에? 빈센 공작님을 상대로요? 아, 참! 그, 그야 그렇습죠. 영지전에서 이기기만 하면 상당한 이익이…….”
라이셔 제국 역시 아르센 대륙의 국가이다. 그렇기에 영지전의 결과에 대한 처분이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위 귀족이 패하면 영지를 빼앗기지만 상위 귀족은 그렇지 않다. 대신 엄청난 전비를 물어내야 한다. 금액으로 따지면 자기 영지를 팔았을 때 나올 금액의 3분지 1 정도이다.
하텐 영지는 공작령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넓다. 그러니 패전하면 엄청난 액수를 토해내야 한다.
이는 국법으로 정한 것이니 예외가 없다. 잦은 영지전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어쨌거나 알렉스가 속으로 영지전 배상금을 계산할 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그래, 내가 왔다고 하면 빈센 공작이 물러나겠지? 그럼 이번 영지전은 없어지네.”
“아,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상인답게 이번 영지전이 빈센 공작의 힘을 뺄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좋네, 나는 황궁에 가보겠네.”
“네, 마탑주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요. 그럼,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상인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상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인이 대기하고 있다.
“타시지요.”
“허험, 그러세.”
로이어 백작이 타던 팔두마차를 타니 제법 귀티 나게 꾸며놓았다. 하지만 승차감은 꽝이다.
도로의 요철(凹凸)이 그대로 느껴진 때문이다.
예전에 판매되었던 티코 같은 소형 자동차에 사용하는 서스펜션7)을 설치하면 훨씬 나을 듯하다.
자동차 차체처럼 마차가 육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센 대륙에 티코의 현가장치를 팔아?’
한국의 기술이라면 금방 대량 생산할 수 있다.
이것을 가져다 팔면 아마 없어서 못 팔 것이다. 승차감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 아서라.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소금만 갖다 팔아도 떼돈 벌 곳이다. 여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쉬지 않고 굴러가면서 노면의 굴곡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황궁에 당도하니 위병이 근엄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멈추시오! 그리고 신분과 목적을 밝혀주시오!”
“이레나 상단에서 아트만 시종장님을 만나러 왔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갈 받았습니다. 일단 마차에서 내리십시오. 이곳부터는 마차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만 따라오셔야 합니다.”
“흐음, 그러지.”
황궁 내부 경비를 담당한 위병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이동할 방향을 가리킨다. 현수가 마차에서 내리자 위병이 흠칫거린다. 생전 본 적 없는 새로운 복식 때문일 것이다.
“안내 안 할 건가?”
“아, 아닙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위병의 뒤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티내지 않고 의젓한 걸음으로 위병을 따라갔다.
“이, 이곳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위병이 다시 나온 것은 3분 정도 지나서이다.
“안으로 드십시오.”
“흐음, 그러지.”
위병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웬만한 귀족의 집무실은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으로 안내한다.
“시, 시종장님, 말씀하셨던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 그래? 알았다. 너는 이만 가도 된다. 손님께선 이 안쪽으로 오십시오.”
몇 걸음 걸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예복을 걸친 늙은 시종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라이셔 제국 황실 시종장 아트만 자작입니다. 귀빈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허흠, 나는 하인스 킴이라 합니다.”
상대가 나이도 많고 귀족이라 하니 말을 올려주었다.
“죄송하지만 제국의 귀족은 아니신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백작입니다.”
“아! 백작님이시군요.”
말을 하며 현수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짙은 감색 양복 차림이다. 넥타이엔 화려한 문양이 들어 있고, 검은 구두가 반짝인다. 처음 보는 복식이지만 귀족이 아니면 이런 차림을 할 수 없다.
“혹시 제가 그 나라를 알아도 되겠는지요?”
조심스런 어투이다. 상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알고자 하는 것을 모두 알아내는 처세라 할 수 있겠다.
“리아 제국이라 하오.”
“아! 리아 제국이군요. 그런데 리아 제국이란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아르센의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