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9
“아르센 대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는 어스 대륙에 있습니다.”
“네? 어스 대륙이요? 처음 듣습니다.”
갸우뚱하며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쏘아본다.
“이곳에선 다들 어스 대륙을 모르나 봅니다.”
현수의 태연한 표정을 보니 진실을 말한 것이라 받아들인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저를 만나자고 한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힘이 드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내게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이 있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알현을 청한 것이오.”
“……!”
시종장은 잠시 현수를 쏘아보았다. 어떤 의도로 접근하는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황제께서 나를 만나면 샨크스 왕국에서 온 아름다운 분과 좋은 인연을 맺으실 수 있을 것이오.”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십시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밖으로 나간다.
이레나 상단에서 접촉 요구가 있었을 때 시종장은 사람을 파견하였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요구를 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아마 지금쯤 보고하러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아트만은 그걸 들어보러 나간 것이다.
상황을 짐작하기에 천천히 시종장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흐음,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려면 시종장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하여 아공간에 담긴 인테리어 소품 중 화려한 화병을 꺼내 유리와 인조 보석으로 만들어진 꽃을 꽂았다.
크지 않기에 들고 있는 가방에서 꺼냈다 하면 될 듯하다.
“아!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참, 이건 내 성의입니다. 이 집무실에 어울리는 것 같아 꺼내놓았습니다.”
“오오! 이건…….”
화병 표면을 장식한 인조 보석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걸……. 드워프가 만든 겁니까?”
화병에 꽂힌 인조 꽃을 보는 시종장의 눈에 감탄의 빛이 가득하다.
황동(구리와 아연의 합금) 철사를 구부려 꽃의 줄기를 만들었고, 초록색 잎은 반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다.
꽃잎 역시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투명하고,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는 모양이다. 줄기 곳곳에 붉고 푸른 인조 보석이 박혀 있다.
한국에서라면 3∼4만 원이면 살 수 있지만 이곳에선 만들 수 없는 것이라 그런지 감탄의 기색이 역력하다.
“험험! 감탄은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아이고, 이거 제가 실례를 했군요.”
시종장이 얼른 화병을 내려놓는다. 제법 묵직한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폐하는 언제 뵐 수 있는지요?”
“전갈을 드렸으니 윤허가 떨어지면 곧장 가시면 됩니다. 그전에 외람된 말씀이지만 백작님의 신분을 증명하실 것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최고 통치권자이니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기다렸다는 듯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이곳에 와보니 귀족의 신분을 반지로 증명하더이다. 한데 아국에서는 이것으로 신분을 증명합니다.”
말을 하면서 주민등록증을 건네자 이건 대체 뭔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거기 있는 그림이 내 얼굴이오. 이곳과는 문자가 달라 해독할 수 없겠지만 그 아래 검은색으로 쓰인 글씨는 내가 리아 제국의 백작이라는 뜻이오.”
“허어, 세상에, 이토록 정교한 그림이라니…….”
가로 2.9㎝, 세로 3.5㎝에 얼굴 전체를 실물과 똑같이 그려 넣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시종장이 감탄하고 있을 때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아래쪽의 붉은 것은 아국 황제 폐하의 직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것이지요.”
경기도지사가 졸지에 제국의 황제가 되는 상황이다.
“아! 그런가요?”
시종장은 기하학적인 문양이라 생각하고,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뒤쪽을 보면 아래쪽에 시커먼 것이 보이지요?”
“그러합니다.”
“그건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찍은 것이오.”
“지문이요?”
“지문이란 손가락 끝마디의 곡선무의이오. 그리고 사람마다 지문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아직 모르나 봅니다. 하나 본국에선 이것으로 본인임을 증명하오.”
“아! 지문…….”
아주 가끔 정말 흡사하게 닮은 사람이 귀족을 죽이고 본인인 척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피를 뽑아 반지에 묻혀보면 금방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의심스럽더라도 피를 보자는 말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여 귀족가의 재산이 몽땅 털리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모두 지문이 다르다면 이거야말로 신분을 증명하는 데 아주 괜찮은 방법이다.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에게 손가락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 정말 대단한 신분증입니다. 그런데 이건 무엇으로 만든 겁니까?”
이곳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문점인 듯하다. 현수는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비늘을 가공한 겁니다.”
“네……? 네에? 바,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시종장이 화들짝 놀라며 주민등록증을 다시 만져본다.
아주 매끄럽다. 그리고 탄탄하다. 정확히 직사각형이며, 모서리는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다.
라이셔 제국에서 이런 걸 만들려면 없는 드워프를 수소문해야 한다. 드래곤의 비늘이란 것은 세상에 없으니 얇은 철판을 두들겨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만한 품질을 보일 것이라곤 기대할 수 없다.
시종장 아트만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현수가 리아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양복은 또 어떠한가.
동그란 단추가 있는데, 크기가 정확히 일치한다. 평민들은 입을 수 없는 것이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조금 열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아트만 시종장님, 소인 로이이옵니다.”
“어, 그래! 들어오게.”
“네에.”
문이 더 열리고 이제 서른 살쯤 된 호리호리한 사내가 들어선다.
“로이! 인사드리게. 리아 제국에서 오신 하인스 킴 백작님이시네.”
“아! 처음 뵙겠습니다. 황실 시종 로이라 하옵니다. 하인스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깊숙이 허리 숙여 예를 갖춘다.
“그래, 허리를 펴게.”
“네, 백작님!”
로이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면서 아트만 시종장을 바라본다. 이제부턴 보고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고 내용은?”
“폐하께서 접견을 허(許)하셨다 하옵니다.”
“알았다. 너는 이만 물러가라.”
“네에.”
로이는 뒷걸음질로 조용히 물러난다.
“그럼 가시지요.”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황궁답게 엄청난 크기이면서도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 궁엔 엠버룸이란 곳이 있었다.
사방 14m, 높이 5m의 방 전체를 22개의 거대한 호박8) 세공품과 그림, 금세공품 등으로 장식한 방이다.
1716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러시아 피터대제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 정교함과 화려함 때문에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를 침략한 히틀러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나 최근 복원되었다.
현수는 엠버룸을 본 적이 없지만 이곳과 흡사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인사하십시오. 대 라이셔 제국 황제 폐하십니다.”
시종장의 나직한 속삭임이다.
“허흠, 안녕하십니까? 본인은 어스 대륙에 소재한 리아 제국에서 온 하인스 킴 백작입니다, 폐하!”
“리아 제국? 일단 아국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리아 제국에 관한 이야긴 나중에 듣기로 합시다. 그보다 시종장으로부터 이야길 들었소.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네, 이곳을 여행하던 중 폐하께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어려움? 그게 뭔가?”
제국의 황제가 겪을 어려움이란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여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제가 알기론 밤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으음!”
황제가 시선을 돌려 시종장을 바라본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는 의미이다. 이에 시종장이 납작 엎드린다.
“폐, 폐하,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저도 모르게 흘린 게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부디 소신을 벌하여 주시오소서.”
“……!”
황제는 본인의 치부가 세상에 까발려진 것에 화가 났지만 현수가 있는 자리인지라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트만, 자네는 나중에 보세.”
“네, 폐하!”
시종장은 나중에 겪을 일이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떤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의 시선은 현수에게 돌려진다.
“짐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듣고 찾아왔다면 해결책이 있을 터, 그게 무언지 말해보게, 백작!”
황제는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다.
“두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반응은 보이지만 부작용이 우려되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것부터 말해보게.”
“먼저 폐하를 진맥해 보아야 이것의 사용 여부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진맥? 그건 뭔가?”
“제가 폐하의 혈류 흐름을 알 수 있도록 손목을 잡아보는 것입니다.”
“내 손목을?”
황제는 본인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에 혹했는지 순순히 손목을 내민다. 이때 지금껏 뒤쪽에 서 있던 수신호위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안 됩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폐하! 리아 제국의 백작이라곤 하지만 신분이 완전히 확인된 것이 아닙니다.”
“……!”
현수로선 뻘쭘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 하여 마냥 서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폐하, 혹시 심장에 이상이 있는지요?”
“심장? 멀쩡하오.”
“그렇다면 복용이 가능하겠군요.”
“먹는 건가?”
“그렇습니다. 한데 하루에 반 알 이상은 드시면 안 됩니다. 약효가 너무 세서 자칫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어라……? 폐하! 저자가 권하는 건 절대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맞습니다. 이상한 것을 잘못 먹으면…….”
“경들은 조용히 하라! 백작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니니!”
“……!”
황제의 일갈에 수신호위 둘의 입이 다물린다.
“백작은 계속하게.”
“네. 제가 드릴 것은 하루에 한 번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도 몇 가지 부작용이 있는데, 두통, 소화불량, 안면 홍조 및 일시적인 시각 장애를 겪을 수 있습니다.”
“……!”
황제는 현수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자를 믿어도 되는지 여부를 느껴보려는 것이다.
이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폐하, 소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아트만 시종장은 말하라.”
“하인스 백작께서 처방한 것을 소인이 먼저 복용해 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시종장이……? 이보시게, 백작!”
“네, 폐하!”
“나이가 70에 이른 시종장이 복용해도 괜찮은가?”
“나이가 많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효과가 없을 것이란 단언도 못하겠습니다. 실험이 목적이니 조금 더 젊은 사람에게 써봄이 어떨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먼저 효능을 느끼게 하는 것이 확실하다 여기기에 말한 것이다.
“흐음, 그런가? 그건 좋네. 그건 그렇고, 그걸 복용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복용하고 한 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귀족 체면상 이 자리에서 설명 드리기 어려우니 대신 복용해 볼 사람을 먼저 구해주시지요.”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제의 시선이 수신호위들에게 향한다. 시선을 받은 둘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독약이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 현수는 하루에 한 번만 쓰라고 했다. 약효가 너무 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페인 경, 짐을 위해 자네가 먼저 사용해 보게. 아니다. 린센 경도 같이 해보게. 둘이 실험해 보면 더 확실히 알 것이니.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