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0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니 덜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약병에서 한 알을 꺼냈다.
“그전에 두 사람 모두 사용해도 좋은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두 분, 손목을 내주시지요.”
페인 자작과 린센 자작이 손목을 내민다. 둘 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흐음! 페인 경은 괜찮군요. 다음은 린센 경입니다.”
린센이 불안한 시선으로 손목을 내민다. 진맥 결과 복용하면 안 된다는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3장 노처녀 히스테리
“린센 경도 좋습니다. 자, 이걸 복용하십시오. 한 시간 뒤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두 분 모두 결혼을 하셨을 테니 한 시간 뒤엔 부인 곁에 있어야 합니다. 다음엔 뭘 하고 오셔야 하는지 아시죠?”
“아, 아네.”
“알겠네.”
페인 자작과 린센 자작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독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을 가져오너라.”
“네, 폐하! 가서 물을 가져오너라.”
아트만 시종장의 말에 다른 시종이 얼른 밖으로 나간다.
둘은 비아그라 복제약을 복용했다. 이제 남은 건 시간이 걸려야 확인되니 현수는 잠시 물러나 있기로 했다.
페인 자작과 린센 자작이 비아그라의 효능을 몸소 체험하는 동안 현수는 황궁 구경을 하기로 했다. 독약일 수도 있기에 아직은 황궁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것이다.
현수의 안내는 로이라는 젊은 시종이 맡았다.
“여기는 황실근위대의 연무장입니다.”
“아! 그런가요?”
제국이라 그런지 규모가 크다. 한국으로 치면 관중석을 포함한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다섯 배쯤 된다.
현재 500여 기사가 열심히 수련 중이다.
한쪽에선 기마술을 연마하고 있고, 그 옆에선 렌스(Lance) 사용법을 숙지하고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선 검술 훈련이 진행 중이다. 보아하니 갓 서임된 수련기사들인 듯싶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로이가 설명한다.
“석 달간의 수련을 마치면 카이엔 제국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수련기사들입니다.”
“아! 그런가?”
교관의 호령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검법 수련이 한창이다. 살상을 목적으로 한 검법인 듯 제법 예리하다.
“자, 가시죠. 이번에 보실 것은 조각공원입니다. 폐하께서 각별히 아끼시는 곳이지요.”
로이의 안내를 받아 가보니 각종 조형물이 전시장처럼 진열되어 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아주 정교하지는 않지만 제법 솜씨가 괜찮다는 느낌이다. 하나하나 구경하며 이동하다 보니 공원의 맨 끝에 당도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 비슷한 건축물이 보인다. 상당히 공을 들인 듯 매우 아름답다.
“이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나?”
“그쪽엔 장미궁이 있습니다. 남성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요. 폐하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신 세피아 공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아! 그런가?”
“자, 이쪽으로 가시지요.”
로이가 안내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설명이 이어진다.
“이제 보시게 될 것은 오르세 회랑이란 곳입니다.”
“오르세 회랑?”
“네, 아치형으로 조성된 이 회랑엔 역대 황제 폐하와 황비 마마들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가? 한번 가보세.”
“네, 이쪽으로.”
로이의 안내를 받아 오르세 회랑에 발을 들여놓은 현수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이러니까 혁명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국민은 굶는데 화려한 장식에 얼마나 많은 돈과 공이 들었을지 충분히 짐작되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의 현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오르세 회랑은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듯하다. 폭 32m, 길이 200m, 높이 21m짜리 회랑 전체가 금빛 찬란하다.
회랑을 떠받치는 기둥마다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가로 1.8m, 세로 3.6m짜리 그림들엔 역대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사진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로 섬세한 붓 터치가 인상적이다.
로이의 설명에 의하면 라이셔 제국은 47대를 이어왔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는 475년간 34명의 왕이 있었고, 조선은 517년간 27명의 왕이 있었다.
적어도 500년 이상 제국이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라이셔 제국은 건국된 지 얼마나 되었나?”
“내년이 건국된 지 꼭 천 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여 대대적인 건국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습죠.”
“허어, 천 년이나 되었다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지구에선 천 년 이상을 이어온 국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네. 내년에 오셨으면 참 좋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얼마나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하게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되는 말이다.
“그러게. 기대되는군. 그나저나 어느 분이 라이셔 제국의 건국 시조이신가?”
“방금 보신 초상화는 얼마 전에 서거하신 전대 황제의 용안이죠. 저 안쪽 맨 끝에 초대 황제 폐하께서 계십니다.”
“그런가? 한번 가보세.”
“네, 그런데 우리 국법엔 전대 황제 폐하들의 용안을 뵐 때마다 정중히 예를 갖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타국 귀족이신 줄은 아나 예를 갖춰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산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이들의 초상화를 보며 하는 것이다.
추모의 의미를 담으면 될 것이기에 기꺼이 대답했다.
마흔다섯 번의 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초상화는 다른 것들의 네 배 크기이다.
가로 3.6m, 세로 7.2m짜리 대형 초상화를 마주하는 순간 건국 황제의 두 눈으로부터 레이저 광선이 쏘아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이건 뭐지?’
곁에 로이가 있기에 정중히 고개를 한 번 숙여주었다.
그리곤 천천히 허리를 펴며 초상화의 아랫부분으로부터 차츰 위쪽을 우러렀다. 워낙 그림이 크기에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건국 황제의 두 눈에서 또 레이저가 쏘아지는 듯하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림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데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있다.
“짐을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다니 참으로 담대하도다. 나는 라이셔 제국 건국 황제인 알렉산더 폰 라이셔이니라.”
“……!”
이건 무협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혜광심어인 듯하다.
전음(傳音)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진기로 소리를 압축한 후 뜻을 전하고자 하는 이에게만 소리를 전하는 기술이다.
혜광심어(慧光心語)는 전음의 기술 중 최고 난이도로써 텔레파시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짐이 남긴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대는 나와 같은 그랜드 마스터이겠지? 인간으로서 오르기 힘든 경지에 오른 그대에게 감축의 뜻을 전하네.”
‘대체 무슨 말을 전하려고 이렇듯 서론이 길지?’
“짐은 본시 중간계의 조율자로서 알렉산더 에머리어스 카르테로사이라는 긴 이름을 가졌다. 인간으로 유희를 하며 카이엔이란 애송이를 도와 라이셔 제국을 건국하였지. 그대가 혹시라도 제국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있거든 일찌감치 그 뜻을 접으라 경고하는 바이다.”
“……!”
“천 년이 흘렀어도 라이셔는 나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니라. 그러니 조용히 물러가기 바라노라. 만일 제국의 안위에 문제가 발생된다면 짐의 분노를 경험하게 될 것이노라.”
현수는 내심 실소를 지었다.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뭔 개소리래. 한껏 폼 잡고 서 있는 저 모습이 폴리모프한 것이란 말이지? 드래곤이 이러면 안 되지. 반칙이잖아.’
인간과 드래곤은 덩치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다.
능력 또한 드래곤이 월등하다. 이곳에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50도 안 된다.
전쟁도 많고 의료 기술도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남자들 평균 수명이 46세였다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드래곤은 다르다. 현수 같은 능력자를 적으로 만나지 않는 한 8,000∼10,000년을 거뜬히 산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마법과 검법 모두를 완숙의 경지까지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자가 사람으로 변신하여 인간들을 제압하고 나라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수의 경우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이웃 나라 정복도 우습다.
그렇게 하여 영토를 늘려 제국을 선포하면 그만이다.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알렉산더는 본인이 만든 제국을 끔찍이도 아끼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초상화에 이런 마법을 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짐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를 충고하면서 이만 줄이노라. 이제 짐에게 경배하고 물러서라.”
‘웃기지 마슈!’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물론 시종 로이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 커다란 초상화를 우러러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림은 누가 그렸지? 상당히 잘 그렸네. 극 사실주의 화가인 영국 출신 라파엘라 스펜스(Raphaella Spence) 뺨치겠네.’
얼굴의 주름은 물론이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그림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제 가지.”
“네, 이쪽으로…….”
로이의 안내를 받아 왔던 길을 되돌아오며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표정이 온순해진다. 그리고 전대 황제에 이르러선 뭇 인간들을 제압하는 제왕의 기백이 많이 사라져 있다.
‘흐음, 특별한 일이 없어도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군.’
최고 권력자가 정권 장악 능력이 부족해지면 밑에 있던 잔챙이들이 권력 다툼을 시작한다. 그러다 내전이 일어나 국토는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제국은 무너질 것이다.
전대 황제의 초상화를 지나 이동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오고 있다.
“저어, 백작님!”
“왜 그러나?”
“잠시 자리를 피하심이…….”
로이가 말을 이으려 할 때 다가오던 사람 중 하나가 멈춰 서더니 버럭 소리를 지른다. 여성의 뾰족한 음성이다.
“로이, 너! 내가 이 길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
“……!”
로이의 얼굴이 금방 창백해진다. 그러면서 달달 떨기까지 한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바라보니 서른쯤 된 여인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이쪽을 째려보고 있다.
“어이! 거기 너! 당장 이리로 와!”
로이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부복하고 있기에 현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누가 있나 싶어서이다.
물론 아무도 없다. 하여 나를 부른 거냐는 손짓을 했다.
“그래! 거기에 말 안 듣는 로이와 거기밖에 더 있어? 시간은 5초 준다. 지금 즉시 내 앞으로 뛰어오도록!”
보아하니 성질 더럽다는 공주인 듯싶다. 그런데 공주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갈 이유가 없다.
라이셔 제국의 귀족이라면 의당 그래야 할 것이다. 황제의 분노를 한 몸에 받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현수는 라이셔 제국의 귀족이 아니다. 게다가 공주 따위에게 불려 다닐 위치도 아니다.
하여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어쭈! 당장 안 뛰어오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수행하던 시녀들이 벌벌 떨며 물러선다. 평상시에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되는 모습이다.
현수는 상대의 신분은 파악했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며 반문했다.
“네가 누군지 모르냐고? 당연히 모르지. 오늘 처음 봤는데. 그러는 넌 누구냐?”
“뭐, 뭐, 뭐라고? 너? 이런 발칙한……!”
현수의 반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바르르 떨며 분노를 삭인다. 그래도 공주라고 체면을 완전히 버리진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