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2
부러 코를 찡그리고는 보아두었던 항아리로 향했다.
물이 반쯤 들어 있는 것이다. 화재가 나면 소방수로 쓰기 위해 떠다 놓은 듯하다
“자, 그럼 이 옷을 빨면 얼마나 구정물이 나오나 볼까요?”
샤를의 옷을 넣고 옥시크린 리퀴드를 조금 따라 넣었다. 그리곤 손짓으로 샤를을 불렀다.
“가봐.”
“네, 공주님.”
공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온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던 차이다.
4장 이것이 세탁이다
“샤를, 빨래할 줄 알지?”
“그럼요, 백작님.”
“그럼 이 옷을 비벼. 너무 세게 비빌 필요 없고 그저 문지른다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면 돼.”
“네에, 알았습니다.”
소매를 걷은 샤를이 물속에 손을 담갔다.
겨울이라 차가워야 하는데 미지근하다는 느낌이다. 옷을 넣기 전에 히팅 마법으로 데운 결과이다.
샤를이 능숙한 솜씨로 옷 빠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제 그만하고 옷을 꺼내.”
“네, 백작님,”
샤를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꺼낸다.
“그걸 옆에 있는 항아리에 넣어서 헹궈.”
“네, 알겠습니다.”
샤를이 옷을 헹구는 동안 손짓으로 공주를 불렀다.
“이제 이쪽으로 와서 보시지요.”
공주가 가까이 오자 현수는 항아리를 기울였다. 그러자 세탁한 물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물색이 투명하지 않고 구정물처럼 누리끼리한 색이다.
이곳 항아리에 담겨 있는 물은 매일 간다.
화재가 발생할 경우 이 물로 불을 끈다. 역대 황제의 초상화에도 불이 붙을 수 있다. 그때 썩은 물을 부을 수는 없기에 매일 물을 가는 것이다.
서거한 전대 황제 시절, 매일 마셔도 될 정도로 매일 깨끗한 물로 갈라고 하였다.
하여 맑은 물이어야 하는데 색이 싯누렇다.
“샤를, 이제 그만! 그 옷을 주게.”
“네, 백작님.”
샤를이 열심히 헹구던 본인의 의복을 건넸다. 물론 물이 뚝뚝 떨어진다. 현수는 가방 속에서 옷걸이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엔 가방이지만 아공간에서 꺼낸 것이다.
옷걸이에 걸어 벽돌의 턱진 부분에 걸치자 물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공주님, 조금 전의 의복 색깔과 지금의 색깔 차이가 느껴집니까?”
공주가 보기에도 샤를의 옷은 현수의 와이셔츠와 비슷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다.
“공주님께서 걸치고 있는 옷도 빨면 이렇게 됩니다.”
“…아까 물에 넣은 것이 무엇이죠?”
“그건 세제라는 겁니다. 의복을 세탁할 때 조금 넣으면 이처럼 깨끗하게 해주는 거지요.”
“냄새도 제거되나요?”
“물론입니다.”
LG 생활건강에서 만든 샤프란도 줄까 하다 말았다. 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혼동하여 쓸까 싶었던 것이다.
“에르렌, 가서 100골드 가져와.”
“네, 공주님.”
공주는 본인이 내기에서 졌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현수는 싱긋 웃어주었다.
“돈은 되었습니다. 돈을 벌자고 내기를 한 건 아니니까요. 이건 공주님을 만난 기념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현수는 사용했던 옥시크린을 샤를에게 건넸다. 초록색 손잡이 달린 통에 파란색 캡이 끼워져 있는 2.5리터짜리이다.
“빨래할 때 뚜껑으로 하나만 따라 넣으면 되니까 너무 많이 넣지 않도록 하게.”
“네, 백작님.”
“세탁 이외의 용도로 사용해선 안 돼. 먹어서도 안 되고.”
“네, 알겠습니다.”
샤를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받았다는 듯 옥시크린을 소중히 받아 안는다.
“에르렌, 지금 즉시 100골드 가져오도록!”
“네, 공주님!”
공주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 여겼기에 에르렌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간다.
“돈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공주님.”
현수가 아르센 식으로 허리를 슬쩍 굽히자 공주의 아미가 치켜 올라간다. 치욕만 주고 간다고 여긴 것이다.
“가면 안 됩니다. 샤를이 안고 있는 저것의 값을 치르려는 거예요. 100골드면 적당하지요?”
“글쎄요? 그것 가지고 될까요? 저게 보기보단 상당히 비싼 겁니다.”
짐짓 하는 말이다. 하지만 공주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래요? 보아하니 리아 제국의 물건인 듯싶네요. 그쪽에선 저것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요?”
“12,500골드입니다, 공주님.”
아까 용기를 꺼내면서 본 정가가 12,500원이기에 이 금액을 부른 것이다.
“……!”
너무나 큰 금액이라 놀랐는지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되찾는다.
“샤를, 가서 12,500골드를 꺼내오도록.”
“네, 공주님!”
샤를 역시 후다닥 뛰어간다. 공주의 심사가 편치 않다 여긴 것이다.
“굳이 값을 치르시려면 골드 대신 다른 것으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무슨 뜻이냐는 표정이지만 여전히 도도한 자태이다.
“황제 폐하를 뵈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사이에 차나 한잔 주시지요.”
현수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질병이라는 것을 읽은 바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시집을 못 가 성적으로 욕구 불만인 상태에서 부리는 신경질 정도로 알고 있다. 실제론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라는 질병인 경우가 많다.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지나치게 두려울 때도 발생한다.
서거한 선황에겐 아홉 명의 황비가 있었다.
당연히 많은 자식을 생산했다. 그런데 현재는 황제와 공주 딱 둘만 남았다.
치열한 권력 암투 속에서 모두 목숨을 잃은 결과이다.
어린 시절부터 차기 황제가 되려는 오빠들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그 두려움이 히스테리를 만든 것이다.
“좋아요.”
공주에게도 12,500골드는 적은 돈이 아니다. 이걸 차 한잔과 바꾼다니 얼른 승낙한 것이다.
장미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텁텁하기 이를 데 없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공주님은 밖에 나도는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소문이요? 내게 관한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밖에 공주님이 어떤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라 하던가요? 신경질만 부리는 나쁜 공주라고 하죠?”
본인이 본인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신경질이 심하지만 나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
공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찻물만 한 모금 들이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리아 제국에선 과도한 두려움이 빚은 신경질을 전환장애라 합니다. 이건 일종의 질병이지요.”
“질병? 그럼 내가 병에 걸렸단 말인가요?”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약은 있어요? 고칠 수 있는 거예요?”
“즉효약은 없습니다. 다만 증상을 많이 완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잠깐만요.”
가방으로 위장한 아공간에 손을 넣어 대추를 꺼냈다.
언젠가 읽었던 신농본초경과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기를 대추는 신경 안정 효과가 있는 약재라 하였다. 이 밖에 노화를 방지하고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되어 있다.
또 하나 꺼낸 것은 칼슘 보충제이다.
뇌세포 내에 칼슘이 충분하면 스트레스를 느끼는 정도가 완화된다. 이것이 부족하면 짜증을 많이 부리기 때문이다.
공주는 두 가지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대추는 아르센 대륙엔 없는 식물이고, 칼슘 보충제는 유한양행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대추라고 하는 건데 물에 넣고 달여서 먹는 겁니다. 달이는 방법은…….”
잠시 설명이 이어졌다. 공주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인다.
“이건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하나씩 복용하는 것으로…….”
이번엔 칼슘 보충제 복용법을 설명했다.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2∼3년은 복용해야 할 것이란 생각에 조금 넉넉히 꺼냈다.
설명이 끝나자 공주가 눈빛을 반짝인다.
“그리고 페가수스와 유니콘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동물입니다. 드래곤조차 구하지 못할 것이니 아랫사람들 닦달은 이제 그만하세요.”
“…알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공주가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성질 낼 때보다 훨씬 예뻐 보인다. 이때 시종 로이가 다가왔다.
“백작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 그런가? 알겠네.”
시선을 돌려 공주를 바라보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맛있는 차였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또 뵙지요.”
“네에, 고마웠어요.”
이 말을 끝으로 현수는 다시 접견실로 불려갔다.
‘거 참, 신전 농장 한 번 들어가기 힘드네. 쩝!’
속으로 투덜거리며 접견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구경은 많이 하였는가?”
“네, 리오가 잘 안내하여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거두절미하겠네. 내게도 그것을 주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루에 반 알 이상은 절대 안 됩니다. 약효가 강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일단 하나 줘보게.”
꺾고 싶은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늘 감상만 하고 물러나야 했던 황제이다. 몸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줄 방도를 찾은 듯하다. 그렇기에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현재 황제의 좌우에는 수신호위가 없다.
린센 자작과 페인 자작은 아직도 침대에 있기 때문이다.
비아그라는 별문제 없는 남자의 경우 약 4∼5시간 정도 약효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은 원래부터 팔팔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둘이 오지 않자 황제는 시종들을 보냈다. 그리곤 도저히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아울러 독약이 아니라 정말 끝내주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현수를 불러들인 것이다.
가방 속에서 비아그라 복제약을 꺼낸 현수는 황제에게 다가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매지션스 마나필드!”
이 마법이 구현되면 일정 범위 내의 마나 유동을 제어할 수 있다. 황실 마법사들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리곤 곧바로 다른 마법을 구현시켰다.
“마나여, 모든 것을 정상화시켜라.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르릉―!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황제의 체내로 스며든다. 혹시 있을지 모를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덕에 잔뜩 쪼그라들어 있던 황제의 고환이 서서히 복원되고 있다. 현수도 황제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황제의 손에 비아그라 복제약이 올려졌다.
이곳 사람들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하여 한 알은 과한 반응이 있을 것 같아 반으로 쪼갠 것이다.
“그것을 물과 함께 복용하시고 대략 한 시간 정도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겁니다. 효능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길게는 다섯 시간까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 그래, 알겠네. 아트만, 물을 가져오도록 하라.”
“네, 폐하!”
시종장 아트만이 물러나자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이건 단기 처방이라 하였고, 장기적인 방법도 있다 하였는데 그건 무엇인가?”
“석류주스와 참치샐러드, 그리고 적포도주를 처방으로 준비했습니다. 참치샐러드엔 참치뿐만 아니라 양배추와 삶은 계란도 곁들여집니다.”
“석류? 참치샐러드? 적포도주? 그게 다 뭔가?”
“리아 제국의 특산물입니다. 석류와 포도, 그리고 양배추는 식물이고, 참치는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이입니다.”
“흐음,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폐하꼐서는 자세한 내용을 아실 필요 없으십니다. 대신 황실 주방장을 불러주시면 폐하께서 섭취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는 사이에 아트만 시종장이 물을 가져왔다.
복용 방법을 알려주니 기다렸다는 듯 꿀꺽 삼킨다.
“짐에게 이토록 신경을 써주니 고맙군. 백작의 말대로 효과가 있다면 무엇을 원하든 한 가지 청을 들어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게. 아트만, 하인스 백작을 빈관으로 안내하라.”
“아닙니다. 라이셔 제국엔 처음이니 저잣거리 구경을 할 겸 황궁 밖 여관에서 머물겠습니다. 리아 제국과 무엇이 다른지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