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3
“그런가? 그럼 그러게.”
황제는 얼른 침실로 가고 싶은지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시종장을 바라본다.
“아트만, 황궁 밖 여관을 잡아주고 비용을 지불하라.”
“네, 폐하!”
“백작님, 이곳이 적당할 겁니다.”
아트만의 지시를 받은 로이가 현수의 안내를 담당했다. 그리고 안내한 곳은 귀족의 저택처럼 호화스런 여관이다.
“수고했네.”
“내일 아침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게.”
로이가 물러간 후 현수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귀족의 침실과 다를 바 없이 호사스럽다. 그러고 보니 시중 전담 시녀가 다소곳하게 대기하고 있다.
스무 살쯤 된 제법 예쁜 아가씨이다.
“이름이 뭐지?”
“세렌이라 하옵니다.”
“그래, 세렌. 필요하면 부를 것이니 나가 있어.”
“네? 아니 되옵니다. 소녀는 이곳에 있으면서 귀족님의 시중을…….”
깨끗한 의복과 정갈한 몸가짐, 제법 괜찮은 미모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니 잠자리까지 시중들라고 보낸 모양이다.
“괜찮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기니 나가 있어라. 필요하면 부를 터이니.”
세렌은 잠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방에 들려면 백작 이상은 되어야 한다.
지금껏 차례가 되지 않아 오늘 처음으로 객실 대기 시녀가 되었지만 귀족들이 시녀를 내보내려는 경우는 처음이다.
부인과 함께 오거나 늙어 기운이 없는 경우를 빼고 나면 모두들 밤시중까지 든다.
그리고 나면 그 귀족을 따라 영지로 가는 것이 관례이다.
혹시라도 임신이 될 수 있으니 데리고 가는 것이다. 객실 대기 시녀는 미모 우선으로 뽑기에 미색에 끌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현수는 지금까지 들어온 귀족 중 가장 젊다.
그렇기에 은근히 기대했다. 기왕 안길 바엔 늙은이보다는 젊은이의 품에 안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저어, 제가 못나서 그러시나요?”
“아니다. 그러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좀 피곤해서 일찍 쉴 것이니 내일 아침 세수할 물만 떠다 다오.”
“…알겠습니다.”
세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간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흐음, 일단 신전 농지엔 들어갈 수 있겠군. 시간이 나니 라세안을 만나고 와야겠어.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사라진다.
다음 순간 라수스 협곡 모처에 몸이 드러난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나?”
마나의 의지를 실어 혜광심어 비슷한 방법으로 뜻을 전하니 금방 답이 온다.
“하인스! 그러는 자네는 어디에 있나?”
“여긴 드래고니안 마을 인근이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어딘지 알지?”
“잠시 기다리게.”
불과 몇 초 후 현수는 라세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몰라도 텔레포트 마법으로 현신한 것이다.
“오랜만이네, 라세안!”
“하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재미는 좋았고?”
라세안은 다소 익살스런 표정이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여섯 여인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하나 현수는 이런 뜻인지 모르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지냈지. 그러는 자네는? 쉐리엔 500상자 채워온다고 큰소리치고 사라졌는데 다 구했나?”
“하하! 그럼, 그럼! 다 구해놓았네.”
라세안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런데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나?”
“채취하는 김에 조금 더 많이 하느라 그랬지. 이제 곧 겨울이지 않은가.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세.”
“그러지.”
라세안의 안내하는 곳은 드래고니안 마을이다. 아직도 본인이 라이세뮤리안이란 것을 밝히고 싶지 않는 듯하다.
“그나저나 내게 큰소리 뻥뻥 쳤는데 그건 어찌 되었나?”
“내가? 자네에게 큰소리를 쳐?”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 말이네. 나와 화해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렸네. 그리고 다시는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있으셨네.”
“그래? 그렇담 한번 만나봐야겠군. 진짜인지 아닌지.”
“…자네가 직접? 어떻게?”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가보면 알겠지. 화해를 한다고 했으니 못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그래. 그건 그렇지.”
라세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예상치 못한 답변 내지는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쉐리엔은 얼마나 모았는데?”
“가보면 아네. 내가 그거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아! 거의 매일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했네.”
“그래? 아무튼 가보세.”
마을로 들어가자 레뮈가 환히 웃으며 맞는다.
“오랜만이네, 하인스!”
“아, 레뮈 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있었죠?”
“우리야 뭐……. 아무튼 자네가 우리 마을에 다시 온 것을 환영하네.”
“하하, 네. 저도 여러분을 다시 뵈니 반갑네요.”
“그래. 이따가 대련 한판 잊지 말게.”
“그럼요. 전보다 더 세졌으니 각오하십시오.”
“우리도 강해졌으니 자네도 각오하게.”
“하하! 네.”
마을엔 약 150여 명이 살고 있다. 그들 전체가 모두 나와 현수를 환영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전보다 신수가 훤해 보이십니다.”
“하하, 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와우! 그동안 깨달음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전에 보았을 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던 이의 기세가 달라졌기에 한마디 했다.
“그럼요. 저도 이번엔 대련 자격이 있는 거죠?”
“하하! 물론입니다. 이번엔 마법 없이 순수 검술로만 상대해 드리지요. 기대하십시오.”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며 마을로 들어가던 현수가 걸음을 멈췄다.
컨테이너 500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작지 않으니 작은 동산 정도이다.
“어떤가? 500개 다 채웠네. 뿐만 아니라 내 아공간에도 상당히 많이 있네.”
“오오! 그래? 그간 수고 많았네. 일단 아공간에 담겠네. 아공간 오픈! 입고!”
현수의 입술이 달싹이자 눈앞을 가리던 500개 컨테이너가 일순간에 아공간으로 사라진다.
“자네 아공간에 보관해 둔 것은 분량이 얼마나 되나?”
“여기 있는 것 정도는 되네. 빈 컨테이너 더 있지?”
“물론이네. 아공간 오픈! 출고!”
공터이던 공간에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요구한 대로 500개를 꺼내놓았다. 그러자 라세안이 나선다.
“모두들 플라잉 브랜켓 마법을 구현시켜라!”
“네! 플라잉 브랜켓!”
“플라잉 브랜켓! 플라잉…….”
“아공간 오픈! 출고!”
드래고니안 마을에는 7서클 마법사가 여섯 명, 6서클 마법사가 일곱 명 있었다. 이 중 하나가 깨달음을 얻어 7서클이 된 듯하다.
어쨌거나 이들이 만든 마법 담요 위로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많은 쉐리엔이 올려졌다.
“자, 모두 이걸 컨테이너에 담아라.”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나선 것은 소드 마스터들이다. 서른한 명의 소드 마스터와 네 명의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 나서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채취된 쉐리엔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당부한 대로 뿌리와 열매가 따로 채취되어 있고, 깔끔하게 세척되어 있다. 곧바로 원료로 사용해도 될 정도이다.
현수와 라세안 역시 작업을 시작했다. 둘이 구현시킨 마법은 빅 핸드이다.
소드 마스터들이 빠른 속도로 삽질하는 것이라면 마법사들은 커다란 굴삭기로 한 번에 퍽퍽 퍼 담는 격이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워낙 양이 많았기에 컨테이너에 담는 데 걸린 시간은 꽤 길었다.
“에구, 차라리 처음부터 1,000개를 달라고 하지.”
“그러게 말이네. 가을이 깊어지면서 쉐리엔 채취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다행히 남은 것이 많았네. 이걸로 전에 주었던 자유시간 값은 퉁 친 것이네.”
이전에 현수는 해태제과에서 만든 자유시간 1,000개를 주었다. 그것 하나당 손질된 쉐리엔 100㎏을 받기로 했다.
총량으로 따지면 100톤이다.
그런데 컨테이너 하나당 이 정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컨테이너의 숫자는 정확히 1,000개이다.
약속대로라면 자유시간 999,000개를 더 줘야 한다.
“아닐세. 내가 준 것보다 훨씬 과하네. 거꾸로 자네에게 자유시간을 더 줘야 하지.”
“역시 자넨 계산 하나는 똑 부러져서 좋네.”
라세안은 자못 기대된다는 표정이다.
“그래, 그래! 곧 계산하지. 하지만 만드라고라와 바꾸기로 한 브라보콘 값은 아직이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세안이 웃는다.
“그것도 걱정 말게. 플라잉 브랜켓!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서 만드라고라가 쏟아져 나온다.
“세어보게. 정확히 1,000개네.”
“오오! 질이 아주 좋군.”
한눈에 보기에도 모두 최상품 내지는 극상품이다.
이쯤 되면 보답을 해야 한다. 아공간을 확인해 보니 자유시간은 대략 20,000개가 있어서 꺼내주었다.
“다른 것으로 줘도 되지?”
“뭐든 좋네. 자네가 주는 거라면.”
이번에도 라세안은 싱긋 웃는다. 대체 현수의 아공간엔 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이다.
허쉬 쿠키앤크림을 시작으로 아트라스, 핫브레이크, 가나 초코바, 크런치 초코바 등 각종 초콜릿 제품을 꺼냈다.
나중엔 일반 초콜릿 종류와 초코볼 등도 꺼냈다. 물론 페페로쉐와 빼빼로도 있다. 심지어 초코송이로 있다.
꺼내놓고 보니 그야말로 산더미 같다.
“세어보게. 대강 980,000개쯤 될 것이네.”
백두마트 세 곳에 있던 초콜릿 제품의 수효가 예상외로 많았기에 수량을 맞춰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와우!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라세안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물론 좋아서이다.
기왕 꺼낸 것이기에 브라보콘 종류를 드래고니안 전체에게 돌렸다. 일인당 두 개씩이다.
라세안이 아깝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건 자네에게 주는 보너스이네.”
이번에 꺼낸 건 해태에서 만든 호두마루 500개이다. 그중 하나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어주자 라세안의 눈이 커진다.
브라보콘과 맛이 다르다. 달고 부드러우면서 고소한 맛까지 추가되어 있다.
“추르릅! 추르르릅!”
라세안을 물론이고 모든 드래고니안까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느라 여념이 없다. 이를 보곤 싱긋 웃었다.
“다들 고생했으니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내지.”
“추르릅! 크흐흐! 삼겹살에 소주! 그걸로 하세. 그동안 그걸 못 먹어서 아주 죽을 뻔했네. 추르르릅!”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돋는다는 듯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다.
5장 자네가 수호해 줄 거지?
현수와 헤어진 라세안은 곧장 라수스 협곡과 인접한 영지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리곤 각 영지마다 컨테이너 50여 개씩 내려놓고 가득 채울 것을 요구했다.
영주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감을 드러낸 드래곤에게 밉보여 좋을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을걷이가 끝난 때라 일손이 많았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많은 양을 채취할 수 있었다.
이건 각 영지의 영주가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 경쟁을 한 때문이다.
라세안은 영주들에게 아이스크림 열 개씩을 꺼내주었다. 물론 그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모두들 환장했다.
하지만 더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때 라세안이 달콤한 말을 한다.
쉐리엔을 더 채취하면 컨테이너 다섯 개당 하나씩을 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여 현재에도 각 영지에선 남은 쉐리엔을 채취하느라 여념이 없다.
어쨌거나 나머지 500개 컨테이너도 현수의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뒤엔 삼겹살 파티이다.
당연히 소주도 나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위에 놓인 석쇠에선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삼겹살이 익어갔다.
익는 대로 후춧가루와 맛소금, 그리고 참기름이 섞인 종지에 쿡 찍었다 한 입씩 집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