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6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인지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곤 아르센에서 녹음해 온 것들을 하나하나 악보로 옮겼다.
그러고 보니 장르가 다양하다. 탱고, 왈츠, 보사노바, 록, 컨트리 등이다.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며 작업하는 모습을 좋게 보았는지 알바 하는 아가씨가 말도 안 했는데 커피를 리필해 준다.
두 시간이 지날 무렵 현수는 네 곡의 악보를 완성시켰다.아르센 대륙에 전래되던 아름다운 멜로디에 지구의 리듬을 섞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다.
현수는 이 작업을 위해 여러 권의 작곡 관련 서적을 읽은 바 있다.
음악 통론과 그 실습, CD와 함께하는 내 맘대로 작곡법, 리듬과 베이스, Sonar와 Cubase를 위한 시퀀싱과 믹싱, 뻔뻔한 작곡법 등 30여 권이다.
머리가 좋아져서 그런지 대강 훑어본 것 같지만 요체는 고스란히 이해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기본 멜로디는 아르센의 것이지만 현대적 감각에 맞춰 편곡하면서 많은 가감이 이루어졌다.
이쯤 되면 절반은 현수가 작곡한 것이나 다름없다.
걸그룹 다이안은 비주얼과 댄스 음악 위주의 활동을 한다.
리드보컬인 서연뿐만 아니라 예린, 정민, 연진, 세란 모두 뛰어난 가창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걸 써먹을 기회가 적다.
춤 또한 잘 추니 노래보다는 비주얼로 승부한 때문이다.
현수는 악보를 보다 세심히 살피면서 각각의 파트를 정해보았다. 그러기 위해 다이안이 발표한 곡들을 들어보았다. 누구의 음색이 어느 부분에 잘 맞는지 찾아본 것이다.
다섯 번째 악보를 끄덕이고 있는데 지현이 들어선다. 그새 손님이 제법 늘어 빈자리가 얼마 없다.
현수는 두리번거리는 지현을 보며 손짓했다.
“지현 씨, 여기!”
“아! 네!”
눈이 많이 오는지 어깨며 머리에 눈이 쌓여 있다. 그것을 툭툭 털며 들어서는데 너무나 예쁘다.
문득 떠오르는 가사가 있어 얼른 메모했다. 이런 건 쉽게 잊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 어깨 위에 쌓인 흰 눈처럼
내 맘속의 당신은 순결한 호수
당신의 여린 마음속 나는…….
다섯 번째 곡은 발라드로 편곡된 상태이다. 그에 맞는 가사를 얼른 쓰고 있으니 지현이 소리 없이 마주 앉는다.
그리곤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사랑하는 사내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이다.
다섯 번째 곡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0여 분이다. 그사이에 지현은 커피를 주문하고 절반쯤 잔을 비웠다.
“미안. 내가 뭣 좀 하느라고.”
“네. 근데 그거 악보 맞아요?”
“응. 다이안에 곡을 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미안해. 자기가 왔는데도 이러고 있어서.”
“아니에요. 근데 다이안이요? 아! 우리 결혼식 때 축가 불러준 5인조 걸그룹 말하는 거죠? 근데 그 곡,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처음 들어볼 순 있는 거죠?”
“그럼. 한번 들어볼래? 이쪽으로 와.”
현수가 환히 웃으며 손짓하자 지현 또한 웃는다. 아주 아름다운 미소이다.
“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냉큼 옆자리로 옮긴다.
현수는 누가 보든 말든 지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와아! 이 노래, 가사도 좋지만 멜로디가 정말 좋아요.”
“자기가 듣기에 그랬어?”
“네. 참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곡이에요. 근데 이거 하나뿐이에요?”
“아니. 조금 더 써줄 거야.”
“그것들도 제게 먼저 불러주실 거죠?”
“그럼. 당연하지! 그나저나 이제 슬슬 걸어볼까? 밖에 눈 많이 오지?”
“네. 우리 나가요. 뽀드득거리는 소리 듣고 싶어요.”
커피잔을 비우고 밖으로 나가니 눈발이 더 굵어져 있다. 완전한 함박눈이다.
“와아! 이 정도면 최소 10㎝는 쌓이겠어요.”
“아니. 조금 전에 뉴스에서 그러는데 기상청 관측 사상 최고 기록이 2010년 1월 4일에 내린 25.8㎝가 103년 만에 최고였대. 근데 오늘 그거 깨진대.”
“어머! 정말요? 얼마나 더 온대요?”
“한 30㎝쯤 쌓일 거래. 완전 폭설이지.”
“와아! 엄청나네요.”
지현은 어린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팔짝팔짝 뛴다.
인적 끊긴 도로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지현은 빙빙 돌기도 하면서 내리는 눈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작곡한 곡들을 불러주었다. 모두 좋다면서 환히 웃는다. 사내를 기분 좋게 해주는 재주가 있는 여인이다.
그렇게 둘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강남역 인근이다.
“배고프지? 뭣 좀 먹을까?”
“네, 좋아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곳은 뒷골목에 위치한 빅 플라토(Big Plato)라는 곳이다. 이 집의 메인 메뉴인 BBQ 플레이트와 치킨샐러드피자를 주문했다.
사람은 많았지만 시끄럽지 않아 좋았다.
지현은 냅킨으로 입술에 묻은 것들을 닦아낸다.
“근데 다이안에 곡을 몇 개나 주실 건데요?”
“글쎄? 얼마나 줘야 하는지 나도 몰라. CD 한 장은 채워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열두 곡에서 스무 곡 사이쯤 될 텐데 그만큼 곡이 많아요?”
“그거야 뭐… 그건 써봐야 알겠지. 난 열 곡쯤 주려고 했는데 그걸로 부족할까?”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현이 배시시 웃는다.
“그러지 말고 당사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그게 제일 빠르잖아요.”
“그럼 그래볼까?”
식사도 거의 다 했다. 그렇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케이원 엔터테인먼트의 조연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그냥 걸었어. 너무나 아파서.
당신이 날 버렸으니까.
눈물이 나왔어. 하지만 참았어.
널 위해 흘리긴 싫었으니까.
난난난 니가 미워. 너무 미워.
다시는 널 만나기 싫어.
날 사랑한다고, 내가 전부라고
그렇게 떠들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날 찰 수가 있다는 말야.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
다이안의 최신곡인 듯 경쾌한 멜로디이다. 안타까워하는 내용인데 비트 때문인지 신나는 댄스곡처럼 느껴진다.
묘한 언밸런스의 느낌이다.
“네, 케이원 엔터테인먼트의 조연입니다.”
“아! 조 대표님. 반갑습니다. 저 김현수입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김 사장님께서 어떻게……. 안녕하시죠? 신혼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대놓고 반가워한다.
“하하, 네. 결혼식에 와주셨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양가 부모님 모두 모시고 여행 떠난 거 다 아는데요, 뭐.”
대부분의 혼주들은 결혼식을 마친 뒤 하객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뜻이 담긴 서한을 보낸다.
그런데 현수네는 양가 부모님까지 모두 여행을 갔으니 이런 요식행위를 할 수 없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이안도 잘 있죠?”
“네, 그럼요. 다들 잘 있습니다.”
“저번에 제가 곡을 써주기로 했잖습니까?”
“아! 벌써 다 된 겁니까?”
전화기를 다시 움켜쥐는 모습이 느껴질 정도의 반응이다. 기다렸다는 뜻이고, 기대된다는 의사 표시이다.
“몇 곡은 됐는데 곡을 얼마나 써줘야 하나 해서요.”
“네? 벌써 몇 곡이나 된 겁니까? 얼마나 쓰신 거죠?”
매우 놀랐는지 말꼬리와 음성의 톤이 확연히 올라간다.
작곡가들이 하나의 곡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10∼20분 만에 후딱 한 곡이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그건 그야말로 필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았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쥐어짜고 또 쥐어짜야 하나의 곡이 완성된다. 세상에 발표된 수많은 곡과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도 자칫 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으므로 거르고 또 걸러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수는 이것으로부터 매우 자유롭다.
아르센의 음악은 지구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르센의 곡은 화성도 다르지만 힐링 기능이 있다.
다시 말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서가 순화되며,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게 한다.
마나를 실어 노래를 부르면 그 자체만으로도 치유 효과까지 갖게 된다. 그렇기에 짧고 강렬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후크송도 아니면서 강력한 중독성을 갖게 된다.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현수는 아직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렇기에 태연하다.
“지금까지 완성된 건 다섯 곡뿐입니다. 근데 얼마나 더 써드려야 하는지…….”
“저어, 죄송한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네?”
조연 대표의 음성엔 다급함이 배어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음반을 내지 못하면 묻혀 버리는 것이 아이돌 걸그룹이다.
하여 가진 돈을 톡톡 털어 곡을 사는 데 썼다.
그럼에도 메인타이틀로 쓸 곡이 마땅치 않아 노심초사하던 상황이다.
사놓은 곡만으로 음반을 내면 이번에도 죽을 쑤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모두 평범하다고 느낀 때문이다. 그러면 다이안은 가요계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천지건설 김현수 부사장이 써준 곡이라면 질과 관계없이 일단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
후속곡 불발로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는 다이안의 극적인 생명 연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급한 마음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여긴 강남역 부근인데 설마…….”
현수의 말은 끊겼다. 조 대표가 먼저 입을 연 때문이다.
“아! 다행입니다. 저도 마침 근처에 있습니다. 어디에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헐!”
음성이 컸기에 지현도 통화 내용을 모두 들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만나서 오붓한 산책을 했고,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이제 집에 갈 일만 남았다.
그렇기에 모처럼의 데이트가 끝났다 여긴 것이다.
“여긴 빅 플라토라는 곳으로 강남역 인근…….”
“거기 압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분 내로 가겠습니다.”
“네? 조 대표님, 여긴…….”
현수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상대가 끊어버린 때문이다.
“그냥 끊었네. 이 사람 되게 급한가 봐.”
현수의 시선을 받은 지현이 배시시 웃는다.
“호호! 네에. 그런가 봐요. 밖에 눈도 오고 하니 구경하면서 기다려요.”
“그래, 그럼 그럴까?”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하늘에서 밀가루가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걷지만, 어른들은 종종걸음이다. 바쁘게 귀가하는 중인 모양이다.
그중 한 사람의 손에는 도넛 박스가 들려 있다. 열두 개씩 든 박스가 두 개이니 가족과 함께 먹으려는 모양이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될까?”
“…저렇게 보이려면 몇 년 더 있어야 하는데요?”
“아……!”
현수는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본인의 수명이 700년이라는 사실을 깜박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실제론 1,000년이 수명이다.
500살이 될 때까지 25세로 보일 것이다. 600살엔 35세, 700살 때는 45세로 보이게 된다.
800살이 되면 55세로 보이고, 900살은 65세 정도로 보인다. 수명이 끝나는 1,000살이 되어야 75세로 보일 것이다.
호호백발 노인의 모습은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젊은 모습으로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어서 좋잖아요.”
“그래, 그게 훨씬 더 좋지. 안 그래?”
“호호! 네.”
지현이 머리를 기대온다. 부부가 된 이후 스스럼없이 안기기도 하고 먼저 뽀뽀해 달라고 입술을 내밀기도 한다.
현수는 지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눈 내리는 창밖 풍광을 즐겼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헉헉! 헉헉! 제가 조금 늦었지요? 헉헉!”
눈길을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조 대표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땀까지 흘린다.
“아뇨. 괜찮습니다.”
“헉헉! 다행입니다. 길이 너무 막혀서… 그래서 그냥 뛰어왔더니……. 헉헉! 참, 두 분 결혼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