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9
돈이 없어 마탑엔 가볼 생각조차 못한다.
약초꾼들에게 보였지만 모두 고개를 흔든다. 본인들이 아는 병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특정 약초를 먹으면 통증이 훨씬 덜하다. 문제는 그것이 비싸다는 것이다.
하여 몸을 버릴 생각을 하고 이 여관을 찾았다. 귀족의 마음에 들면 엄마를 치료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흑! 고맙습니다. 흐흑! 정말 고맙습니다.”
세렌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솟더니 앞섶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울지 말고 천천히 먹어. 알았지?”
현수는 눈물을 닦으라는 뜻으로 냅킨을 꺼내주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 백작님,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그래, 로이! 잘 잤는가?”
“네, 백작님.”
“그럼 갈까?”
“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로이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큼지막한 팔두마차가 서 있다.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래, 가지.”
따각따각! 따각! 따각!
팔두마차는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 여섯 명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이를 본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평민뿐만 아니라 기사나 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차 바깥에 황실 문장이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13장 드디어 만난 성녀!
“오오! 어서 오시게. 핫핫! 반갑네.”
황제는 지나치게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드디어 염원하던 바를 이루어낸 사내의 얼굴이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하하, 안녕? 아니, 그렇지 못했네. 백작 덕에 밤새 깨어 있었지. 하하하! 대단해. 대단했어. 하하하!”
황제는 지난밤이 지극히 흡족했다는 듯 환히 웃는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던 페인 자작과 린센 자작도 환히 웃고 있다. 그런데 조금 피곤해 보인다.
비아그라 복제약의 강력한 효과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황제와 두 자작은 어제 한잠도 못 잤다. 모처럼 용맹스런 수컷 행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하인스 백작, 어제 내게 주었던 그건 얼마나 있나?”
“제가 가진 것은 300알입니다. 반 알씩 드시면 600회 사용이 가능합니다.”
“오, 그런가?”
“이걸 사용하시는 동안 제가 말씀드렸던 장기적인 개선 방법이 병행되면 나중엔 필요 없을 겁니다.”
“어제 말한 석류주스와 양배추와 삶은 계란이 곁들여진 참치샐러드, 그리고 적포도주 말인가?”
“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황실 주방장을 불러주시면 폐하께서 꾸준히 섭취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아트만, 주방장을 불러오도록!”
“네, 폐하!”
아트만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그러면 정말 괜찮아지겠는가?”
“그러하옵니다. 30알 정도를 쓰시고 50알은 훗날을 위해 보관하십시오. 나머지 220알은 밤이 두려운 제국의 귀족들에게 하사하시기를 권합니다.”
“하아, 밤이 두려운 귀족이라……. 표현이 절묘하군.”
황제는 무릎을 치며 환히 웃는다.
그제까지만 해도 밤이 되면 두려웠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있지만 눈으로만 봐야 했기 때문이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론 신랄하게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 정복왕의 포효를 터뜨렸다. 얼마나 늠름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끈질겼으며 얼마나 화끈했던가!
샨크스 왕궁에서 온 절세미녀는 새벽 무렵 기절해 버렸다. 깨어나면 황제를 위대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좋네, 백작의 말대로 하지.”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제 낮 같았으면 두 수신호위가 버럭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제국의 황제를 대함을 마치 동료 귀족 대하듯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무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황제에게 건네지는 비아그라 복제약인 팔팔정을 바라본다.
몇 알만 얻었으면 하는 속내 섞인 눈빛이다.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짐에게 귀한 것을 주었으니 어제 말한 대로 백작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겠네. 무엇을 바라는가? 말을 하게.”
“먼저 황제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현수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속한 리아 제국은 늘 식량 부족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전 농장을 방문하여 개량된 밀의 종자를 얻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신전 농장? 개량된 밀의 종자?”
“그러하옵니다. 그 종자를 가져가 리아 제국 백성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으음, 리아 제국이 어디에 있다고 하였지?”
잠시 말을 끊은 황제의 물음에 현수는 기다렸다는 거짓말을 한다.
“리아 제국은 아드리안 공국 항구에서 배를 타고 적어도 일 년은 가야 하는 어스 대륙에 있습니다.”
“호오, 그런 대륙도 있는가? 금시초문이네.”
“저도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지 않았다면 아르센 대륙이 있다는 것을 모를 뻔했습니다.”
“아! 그런가? 그래서 수행원이 없는 건가?”
모종의 조사를 한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난파될 때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지요.”
“그런가? 그런데 왜 멀고 먼 이곳까지 왔는가? 아드리안 공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되돌아가면 될 것을.”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리아 제국의 반대방향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공국에서 저는 라이셔 제국의 상인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신전 농장에서 재배하는 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걸 얻고자 이곳까지 온 겁니다.”
“그랬군. 수행원도 없었으니 고생이 많았겠네.”
황제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신전 농장에서 재배하는 밀은 우리의 전략 상품이라 할 수 있네. 그게 없었다면 매년 카이엔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을 수입해야 했을 것이네.”
“그 이야긴 들었습니다.”
카이엔 제국이 라이셔와 크로완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무역 불균형 때문이다. 놔두면 거의 모든 재원이 카이엔으로 흘러들기에 그것을 시정코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하여 자네가 귀족으로서 하나만 약조하면 신전 농장의 출입을 허하겠네.”
“말씀만 하십시오.”
“귀족으로서 신전 농장에서 얻을 밀의 종자를 아르센 대륙의 어느 나라에도 전파하지 않도록 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이곳에서 얻은 밀의 종자는 오로지 어스 대륙에서만 재배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현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찌푸려졌던 이맛살이 펴진다.
“좋네, 자네에게 신전 농장을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시종장은 들라!”
“네, 폐하.”
아트만 시종장이 고요히 다가선다.
“하인스 백작으로 하여금 신전 농장을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칙서를 만들어 오도록 하라.”
“네, 폐하! 그리고 주방장 들었사옵니다.”
“그래? 그럼 들라 하라.”
“네, 폐하!”
아트만 시종장이 불러간 문으로 오십 대의 풍채 좋은 장년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어전에 당도하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린다.
“황실 주방 소속 세르반이 폐하께 문후 여쭙사옵니다.”
세르반은 몹시 떨고 있다.
오늘 아침에 올린 어식(御食)에 문제가 있어 불려온 것으로 오인한 때문이다.
오늘 만든 음식 중 며칠 전에 도축된 사슴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보존 마법이 걸린 식재료 창고에 보관했다.
요즘 날씨가 추워 쉽게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리해서 올렸다. 그리고 잠시 쉬려는데 아트만이 호출했다.
주방에만 있을 숙수를 어전까지 부른 것은 음식이 맛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황실 주방장은 무조건 맛있는 것을 만들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상한 음식이 있었거나 맛이 없어서이다.
차라리 맛이 없다면 질책 섞인 눈빛 몇 번 받거나 주방에서 쫓겨나면 된다.
하지만 상한 음식이 있었다면 황제의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의심 받을 수 있다.
적이 파견한 간세인지의 여부를 알아내기 위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평생 음식만 만들며 살아왔기에 그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다.
“세르반, 왜 그렇게 떠는가? 짐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폐, 폐하,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도축된 지 이레나 되었지만 보존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서 상하지 않았다 판단하였사옵니다.”
“……?”
황제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이다.
“신이 감히 폐하가 드실 어식에 상한 음식을 올렸으나 이는 신의 불찰 때문이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사옵니다.”
“오늘 내게 준 음식 중 썩은 것이 있었다고?”
“네? 아, 네에. 썩었다기보다는 썩은 건지도 모를…….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세르반은 이마가 깨질 정도로 강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쿵! 쿵―!
“음식 맛 괜찮았는데? 상한 것 같지도 않았고.”
“네? 그럼 왜 소인을…….”
세르반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음식이 상하거나 맛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대체 왜 불렀느냐는 표정이다.
“여기 있는 하인스 백작이 자네에게 무엇인가를 일러줄 것이네. 잘 듣고 그대로 하라.”
“네?”
“백작의 말을 허투루 들었다간 치도곤을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게야.”
“아! 네에, 알겠사옵니다.”
세르반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는 동안 황제의 시선은 현수에게 향해 있다.
“백작, 이제 되었는가?”
“네, 폐하! 그럼 주방장과 함께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러게.”
세르반과 함께 주방으로 향한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석류주스, 양배추, 계란, 참치 통조림, 그리고 적포도주를 적당량 꺼내주었다. 그리곤 상세하게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처음 보는 식재료에 어리둥절해했으니 금방 알아들었다.
주방을 나서 어전으로 향하는데 아트만이 다가온다.
“하인스 백작님, 잠시 멈추시지요.”
“아, 아트만 자작님!”
“여기 이것 받으십시오.”
아트만 자작이 내민 것은 조선시대 때 쓰던 교지30) 비슷한 두루마리이다.
“그걸 가져가시면 신전 농장의 출입이 가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트만이 재차 입을 연다.
“어전에선 현재 귀족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백작님께선 타국 귀족이시니 들어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라이셔 제국은 현재 카이엔 제국과 전쟁 중이다. 그에 관한 회의가 열리는 모양이니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폐하께서 우리 제국을 떠나시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해 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합니다. 제국을 떠나기 전에 폐하께 하직 인사를 하러 오겠습니다.”
“네, 그럼 조심해서 용무 보십시오. 제국에 머무시는 동안엔 황실근위대가 백작님을 호위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밖으로 나가니 기사 열두 명이 보자마자 군례를 올린다.
“라이셔 제국 황실근위대 소속 제3근위대 부대장 죠지아 레인스가 하인스 백작님을 뵈옵니다.”
“하인스 백작님을 뵈옵니다.”
모두의 군례를 받는 동안 아트만이 속삭인다.
“죠지아 레인스는 남작입니다, 백작님.”
호칭을 어찌할지 알려주는 것이다. 현수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반갑다. 제국에 머무는 동안 내 안위를 자네들에게 맡기니 나를 잘 보호해주기 바란다.”
“백작님을 뫼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좋아, 이제 나는 신전 농장으로 갈 것이다. 안내하라.”
“알겠습니다.”
현수는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에 올라탔다. 말 타는 게 익숙하진 않지만 금방 균형이 잡힌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황도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니 지나치는 백성들이 볼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귀족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가는 동안 확인해 보니 죠지아 레인스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다. 나머지 기사들은 모두 초급이다.
모두 한 덩치 하여 현수가 왜소해 보일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