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50화 (650/1,307)

# 650

* * *

“잠시 멈추십시오.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요?”

황실근위대는 갑옷에 라이셔 제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지극히 공손한 어투이다.

“여기 계신 하인스 백작님께서 신전 농장에 들어가시고자 한다.”

문지기는 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농장에 들어가고 싶으면 황실의 허가를 받아오라고 해서 갔던 귀족이다.

“죄송합니다만 허가서가 있으신지요?”

“여기 있네.”

현수가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 든 문지기는 내용을 읽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백작님의 농장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문지기라곤 하지만 무릎 꿇고 있는 자도 신관이다.

하여 남작 정도 되는 귀족은 우습게본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보이는 이유는 두루마리에 쓰인 글귀 때문이다.

리아 제국의 백작 하인스 킴은 본국을 방문한 귀빈이니 항상 짐을 대하듯 하라. 또한 신전 종자의 반출을 허하노라.

글귀의 말미엔 라이셔 제국 황실 로고와 제47대 황제의 어인이 같이 찍혀 있다. 다소 파격적인 내용이다.

두려웠던 밤을 극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좋아서이다.

그보다는 다소 뻣뻣한 신관들이 현수에게 함부로 대할까 싶었던 것이 더 큰 이유이다.

어쨌든 신관은 황제 대하듯 무릎을 꿇었다. 황실근위대의 호위를 받고 있으니 이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에 들어가 농장을 둘러보고 싶네. 아울러 경작지를 관리하는 사람을 보고 싶네.”

“네, 저를 따라오시지요.”

문지기 신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세렌의 말대로 훈기가 느껴진다. 마나로 조성한 마법적인 결계가 있나 살펴보니 그건 아니다.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아하니 신성력이란 것으로 농장 전체를 거대한 결계 안에 넣어둔 듯싶다.

잠시 후, 농사일을 거들던 머리가 허연 신관 앞에 당도했다. 전에 만났던 자이다.

“페룸 신관님, 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님이십니다. 농장을 둘러보시겠답니다.”

“황실의 윤허는 얻으셨는가?”

“네. 물론입니다. 황제께서 폐하를 대하듯 하라는 칙령을 내리셨습니다.”

“아! 가이아의 종 페룸이 하인스 백작님을 뵈옵니다.”

이번에도 무릎을 꿇는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일흔다섯은 넘었을 노인으로부터 이런 예를 받는 것은 익숙지 못하다.

현수는 손을 내밀어 제지하려다 말았다. 이것이 이쪽의 예법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인스 킴이라 하네. 농장을 보고 싶어 왔고, 어떻게 가꿔지는지 알고 싶네. 많은 도움 바라네.”

페룸 신관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문지기 신관이 먼저 입을 연다.

“폐하께서 신전 종자의 반출을 허락하신 분입니다.”

“……!”

페룸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다. 얼마나 종자에 대한 관리가 철저한지 짐작된다.

“페룸 신관, 이곳에서 얻은 종자는 아르센 대륙이 아닌 어스 대륙에서만 재배할 것을 약속드렸네.”

“어스 대륙이라 하셨습니까?”

웬 소리냐는 표정이다.

“그러하네. 아르센의 남단에서 배를 타고 족히 1년은 가야 당도할 수 있는 멀고 먼 곳에 있는 대륙이라네.”

“아……!”

황제가 왜 허락했는지 알겠다는 듯 굳었던 표정이 펴진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농작물이 풍부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엔 별다른 이적을 행하지 않는 신이다.

다른 신들이 베푸는, 병자를 치유시키는 등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제국이나 왕국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라이셔 제국은 달랐다. 척박한 토지로 인해 농작물의 수확량이 적었기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전은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신관들의 엄격한 감독 아래 라이셔의 농지에서만 재배된다.

가이아 신관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종자를 자신들을 환대하지 않은 국가의 영토에서 자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나라에도 가이아 신전을 조성하지 않았다.

대륙 전체가 가뭄으로 몸살을 앓을 때에도 신관들을 파견하지 않았다. 일종의 보복이다.

가이아 신전이 이러는 이유는 라이셔 제국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가 있는 나라이다.

여기에 가이아의 은혜를 베풀기도 바쁜데 굳이 환영하지 않는 곳까지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농지에서 재배되는 것을 견학하고 싶네.”

“견학이요? 아, 네. 저를 따르시지요.”

페룸 신관의 안내를 받아 농지를 둘러보았다.

신전 농지는 엄청나게 넓다고 한다. 설명을 들어보니 농지 면적만 약 500㎢는 되는 듯하다.

지구에서 밀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평균 2.3톤/㏊이다.

1㏊는 0.01㎢이다. 따라서 지구를 기준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해보면 매년 11만 5,000톤의 밀이 수확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을 수확해 낸다.

단위면적당 11.5톤/㏊이니 지구보다 다섯 배나 많다. 게다가 1년에 2모작을 한다.

하여 신전 농지에서 수확하는 밀의 양은 115만 톤이다. 지구와 비교하면 정확히 10배를 수확하는 것이다.

아르센 사람들은 조선시대와 비슷한 식사량을 보이고 있다. 1인당 양곡 소비량이 연간 172.8㎏ 정도 된다는 뜻이다.

라이셔 제국의 인구를 2,000만 명으로 잡으면 총 345만 6,000톤의 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중 3분지 1일을 신전 농장에서 수확해 낸다.

신전 농장이 있기 전에는 늘 곡물 부족으로 시달렸지만 현재는 자급자족을 하고 있다.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 많은 밀의 종자가 보급된 덕이다.

각각의 영지는 농지 보호에 매우 엄격하다. 만에 하나 밀의 종자가 다른 나라로 흘러간 것이 확인되면 해당 영지의 영주는 곧바로 사형에 처해지며 전 재산이 몰수된다.

또한 영주 가족은 노예가 된다.

이런 상황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종자를 지켜내는 것이다.

“저쪽으로 가시면 연구 시설이 있습니다.”

페룸 신관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흰색 석조 건축물이 줄지어 서 있다.

“제가 듣기로 더욱 좋은 종자를 개량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은 성녀님이 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관 가운데 가장 성력이 깊으신 분이지요. 하여 종자 개량 작업을 전담하고 계시죠.”

“그렇다면 성녀님을 뵐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지금 성녀님을 만나러 가는 중이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현수는 페룸 신관의 뒤를 따라 석조 건물에 발을 들여놓았다. 입구부터 성기사들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경계 근무 중이었지만 페룸 신관의 말 몇 마디에 즉시 물러난다.

황제의 귀빈이라는 이야길 들은 것이다.

이들 성기사들에게 첫 번째 경배 대상은 당연히 가이아 여신이다. 다음이 성녀이다.

세 번째가 교황과 황제이다. 가이아 신전에 얼마나 많은 혜택과 지원을 주었으면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튼 황제와 동등한 대우를 해주라는 칙령이 있었다는 말에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대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귀빈의 성전 방문을 환영합니다.”

“고맙네. 수고들 많네.”

황제와 동등하니 말을 놓아도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들과 척지어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밖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정갈하다. 석재가 깔린 긴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천장의 높이가 서서히 낮아진다.

그리고 한 공간에 이르자 제단이 보이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경건하게 기도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이아 여신의 낙점을 받아 어린 시절에 성녀가 된 스테이시 아르웬일 것이다.

올해 25세인 성녀는 백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난 귀족이다. 그러다 여섯 살 때 성령의 은총을 받아 성녀가 되었다.

이후 신전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를 학습하였고, 요즘은 종자 개량에 몰두하는 중이라고 한다.

“성녀님, 황제 폐하의 귀빈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손녀 같은 나이임에도 페룸 신관은 존경의 눈빛을 담아 나직이 알렸다.

모자 달린 성녀복을 걸친 성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귀빈을 접객실로 안내하여 주세요.”

“네, 성녀님.”

정중히 고개 숙여 명을 받들겠다는 뜻을 밝힌 페룸 신관이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백작님, 이쪽으로.”

안내된 곳은 별다른 장식물이 없는 공간이다. 페룸은 자신의 소임은 여기까지라며 정중히 예를 갖추곤 물러났다.

“흐음!”

주변을 둘러보니 신전이라 하기엔 평범하다는 느낌이다.

“귀빈을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 성녀님!”

하얀 제복을 걸친 성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수 또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스테이시 아르웬이라 합니다. 앉으시지요.”

“아, 네에. 리아 제국에서 온 하인스 킴 백작입니다.”

자리에 앉아 시선을 주니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눈만 보인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자면 성녀는 금발이다. 그리고 눈이 큰데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소유자이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상당히 특이한 의복을 입으셨군요.”

“이건 제가 속한 나라의 예복입니다.”

“그렇군요. 상당히 편해 보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신전 농장을 방문하셨는지요?”

“밀의 종자를 얻고자 합니다. 또한 제가 가진 종자들의 개량이 가능한지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아! 그래요?”

자신의 전공 분야를 물어주어 고맙다는 눈빛이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종자를 개량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 방면에 상당히 많은 연구를 했음에도 이곳만큼 획기적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요?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성녀는 눈빛을 반짝이고 있다.

어쩌면 종자 개량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여 깊이 연구해 본 결과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유전자요? 그게 뭐죠?”

“부모에서 자식으로 물려지는 특징, 즉 형질을 만들어내는 인자로써 유전 정보의 단위입니다. 그건 생물 세포 내의 염색체를 구성하는 DNA가 배열된 방식인데…….”

현수는 전문적인 용어가 섞인 설명을 시작했다.

“잠깐만요. 세포는 뭐고 염색체는 뭐죠? 그리고 DNA라는 건 또 뭡니까?”

“세포는…….”

현수는 찬찬히 하나하나 설명했다. 최대한의 협조를 얻기 위함이다. 말이 길어지자 목이 마르다.

자연스레 아공간에 있던 음료수를 꺼냈다.

물론 성녀의 것도 있다. 달달한 식혜이다. 한번 맛을 보더니 입맛을 다시는지라 말을 하면서 계속 따라주어야 했다.

면사 때문에 불편할까 싶어 빨대도 꽂아주었다.

“교배를 통한 육종 방법으론…….”

완전히 전문적인 이론으로 접어들자 성녀의 눈빛이 서서히 바뀐다. 그동안 막연히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했던 부분에 대한 세부적인 진리가 설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눈빛은 존경을 넘어 흠모로 접어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명쾌한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자 성녀의 눈빛이 또다시 바뀌었다.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어린아이의 눈빛이다.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는 그런 끈적끈적한 눈빛이지만 현수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결국 모든 설명이 끝났다. 성녀는 감탄스럽다는 눈빛이다.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있죠?”

“그냥 상식인데요, 뭐.”

유전공학과 육종학이 현수에겐 일반 상식 수준밖에 안 되기에 한 말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성녀에게 있어 이 설명은 말라비틀어져 쩍쩍 갈라져 있던 논바닥에 스며드는 장맛비 같았다.

『전능의 팔찌』 2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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