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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651화 (651/1,307)

# 651

1장 성녀가 이렇게 예뻐도 돼?

신전 농장이 획기적인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은 종자에 부여된 신성력 때문이다.

이것 덕분에 병충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낱알은 훨씬 굵어졌다. 대신 밀의 키는 대폭 줄었다.

줄기가 생장할 영양분이 모두 열매로 간 것이다.

밀의 생육 시간은 반년이다. 성녀는 신성력으로 농장 전체의 온도를 보존시켰다. 그 결과 이모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전에서 개량한 종자를 제게 주십시오. 아울러 이것들에 대한 연구도 당부드립니다.”

현수가 꺼내놓은 것은 이실리프 상사의 민주영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각종 종자와 묘목이다.

아공간에 담기 전에 산소 공급이 가능한 장치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묘목은 물론이고 씨앗도 호흡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건 뭐죠?”

“어스 대륙에서 생장하는 각종 곡물입니다. 이것에 신성력을 부여했을 때 얼마만큼 수확량이 느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거 아시죠?”

성녀의 말에 현수가 대꾸했다.

“타임 패스트 마법은 어떻습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당연히 괜찮겠죠. 근데 마법사인가요?”

사실을 말하라는 듯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필요에 의해 익힌 겁니다.”

“……!”

성녀는 대꾸 대신 현수의 면면을 살핀다.

“이걸 해드리면 제게 득 될 일은 뭐가 있죠?”

대가를 요구하는데 마땅히 해줄 것이 없다. 일반 여염집 여인이라면 금은보화로 꾀어볼 수 있다.

하지만 성녀는 불가능하다. 재물엔 관심 없고 오로지 작물 연구에만 신경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으음. 나중에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소원이요? 제 능력으로 안 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렇겠죠. 백작님이 할 수 있는 걸 해달라고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계약은 성립된 겁니다?”

나중에 무엇을 요구하든 들어주면 된다. 아공간에 담긴 막대한 금은보화로 못할 일은 없다.

이곳에 와서 드래곤도 만났고 엘프와 드워프도 만났다. 다들 관계가 괜찮으니 웬만하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리곤 벼, 수수, 콩, 옥수수, 감자, 고구마, 커피, 파인애플, 바나나 등 각종 작물의 종자 및 묘목들을 내놨다.

성녀는 하나하나 어떤 작물인지를 확인하고 어떤 온도에서 생육했던 것인지 세세한 부분까지 메모한다.

상당히 꼼꼼한 성격인 듯싶다.

그런데 메모하는 속도가 너무나 느리다.

너덜너덜한 양피지에 글씨를 쓸 때마다 잉크가 튀는 깃털 펜으로 써서 그렇다. 보다 못한 현수가 스프링 노트와 볼펜을 꺼내 대신 기록해 주었다.

“어머! 그건 뭐죠?”

“이건 스프링 노트와 볼펜이란 겁니다. 이렇게 넘겨가면서 쓸 수 있지요.”

“상당히 쓸모 있는 물건이군요.”

“네, 성녀님을 만난 기념으로 드리지요.”

노트와 볼펜을 건네자 신기하다는 듯 쓱쓱 그어본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리고 정말 이것들의 수확량이 늘어나게 해주면 제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예요?”

“물론입니다. 제 고향 리아 제국엔 남아일언중천금이란 말이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사내라면 한번 내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아! 좋은 말이군요. 좋아요. 백작님을 믿죠.”

성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현수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물론 기분이 좋아서이다. 이게 나중에 어떤 일로 발전될지는 아직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성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종자를 살핀다. 이렇게 해서 신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며칠간은 아주 꼼꼼히 묻기만 했다. 종자가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가지 의논을 했다.

그 결과 신전 밖에 새로운 농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신성력이 없는 땅에서 재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꾼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추수기가 지난 후라 널린 게 일손이었다.

땅을 일궈놓은 뒤 일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신성력 결계를 쳤다. 성녀는 현수가 준 종자들을 파종하도록 했다.

일꾼들이 물러간 뒤 타임 패스트 마법을 걸었다.

밖에서 대기하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들어가 작물의 생육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신전엔 숙소가 없기에 현수는 여관에 투숙했다. 세렌이 시중들어 주었기에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한 번 확인하면 시간이 비기에 수시로 라수스 협곡을 다녀왔다. 드래고니안들과의 비무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31명의 소드 마스터는 그랜드마스터가 된 현수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당 불가였던 것이다. 하여 2:1, 3:1 비무가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31:1의 비무가 이루어졌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대결이다.

심판은 라이세뮤리안이 보았고, 현수가 승리했다.

강아지가 떼로 덤벼도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내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비무를 통해 드래고니안들의 검술은 한 단계 올라섰다. 마음 놓고 검을 휘둘러도 끄떡없는 상대가 있었던 덕분이다.

현수의 경지 또한 깊어졌다. 소드 마스터들과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에서 많은 수확을 얻은 때문이다.

하여 세상에 또 다른 그랜드 마스터가 있더라도 결코 패하지 않을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련을 통해 여러 검법을 섭렵할 수 있게 된 때문이다.

* * *

“아이고, 어서 오시게.”

“네, 그간 잘 있으셨지요?”

“그럼, 그럼!”

벌건 대낮임에도 빌모아 일족의 족장 나이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있다.

“그런데 낮술 하셨습니까?”

“하하, 그래. 기분이 좋아서, 정말 좋아서 한잔했네.”

나이즐 빌모아의 오른손엔 발찌까 맥주가, 왼손엔 오리온에서 만든 포카칩이 들려 있다.

“다들 안녕하신 거죠?”

“그럼, 그럼! 당연하지. 근데 여긴 웬일인가? 또 할 일이 있는 건가?”

“네, 몇 가지 부탁을 드리려 왔습니다.”

“그래? 중요한 일인가?”

“네, 빌모아 일족 전체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우들을 부르겠네.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네.”

“그러시죠.”

나이즐 빌모아가 형제들을 데려왔는데 모두가 똑같이 생겼다.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이다.

“내 아우들이네. 이 녀석이 둘짼데 나보다 열 살 밑이지. 얘는 셋째고, 애는 넷째, 그리고…….”

차례대로 인사를 시키기에 유심히 살폈는데 모두 똑같다는 것만 재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까지 같아 보인다.

아무튼 소개는 끝났다.

“자, 형제들을 다 불러 모았으니 우리 일족의 도움 받을 일이 뭔지 이야기해 보게.”

“제게 새 영지가 생겼습니다.”

“아, 그런가? 감축하네. 어느 나라에 있는 어딘가?”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묻는다.

“바세른 산맥 아래쪽에 자리한 테리안 왕국의 영토 중 일부를 할양 받았습니다.”

“할양? 봉토가 아니고?”

한 나라의 귀족이 되면 왕으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는데 이를 봉토라 한다.

이걸 받는 것은 신하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네, 봉토가 아니라 할양입니다. 제가 테리안 왕국의 귀족이 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아르센 대륙 어디에도 없던 상황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껏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제가 이실리프 마탑주이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고? 어디? 이, 이실리프 마탑? 9서클 대마법사였던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만든… 그 마탑 맞나?”

나이즐을 비롯한 다섯 아우 모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산속 동굴에 처박혀 세공품이나 만들고 있지만 광룡까지 잡은 드래곤 슬레이어는 아는 것이다.

“맞습니다. 그분이 제 스승님이시죠.”

“허어, 세상에! 맙소사! 이실리프 마탑주라니…….”

나이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곁의 형제들 역시 아무런 말도 못한다. 너무도 엄청난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 그럼 몇 서클이신가?”

나이즐의 말이 슬쩍 올라간다. 9서클 이상이면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쎄요. 제 경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 친구 라세안이 말하길, 참 라세안은 이곳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인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입니다.”

“……!”

모두들 눈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다. 입은 딱 벌어졌지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다.

드워프 알기를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다 여기는 레드 드래곤이 친구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친구가 말하길 9서클 마스터를 지나 10서클에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

드래곤이 인정한 10서클 마법사라는 말에 나이즐과 형제들은 진정한 멘붕이란 이런 것이라고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다. 턱이 빠질 정도로 크게 벌린 입,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눈,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뇌이다.

“아니, 왜 말들이 없으십니까?”

“호, 혹시 위, 위대하신 존재가 아니십니까?”

“무슨 소리예요? 전에 그랬잖아요. 드래곤 아니라고요. 드워프에게 맥주랑 안주 주는 드래곤 본 적 있어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인간이 어찌……. 대륙 역사상 10서클 경지에 오른 분은 없으셨습니다.”

나이즐의 말은 확연히 올라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드래곤 아닙니다. 사지 멀쩡한 인간이죠. 아시겠습니까?”

“네, 네, 그럼요. 그렇습죠. 그렇고말고요.”

나이즐이 횡설수설하는 듯하자 곁에 있던 동생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아, 아차! 나이즐 빌모아가 빌모아 일족을 대표하여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대마법사님을 알현하옵니다.”

“대마법사님을 뵙게 되어 지극한 영광입니다.”

오체투지하듯 바닥에 바싹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다. 10서클 마법사이면 드래곤보다도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워프는 손재주만 좋은 종족이 아니다. 배틀 액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전투 종족이기도 하다.

엘프와 사이가 좋지 않아 종종 그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겨본 적도 없다.

엘프들은 활이라는 장거리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수는 인류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드워프는 그 힘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종족이지만 납작 엎드린 것이다.

드래곤의 경우 이럴 때 왕창 뜯어간다.

오래전 라이세뮤리안이 그랬다. 힘을 앞세워 위협하고 적지 않은 세공품을 강탈해 갔던 것이다.

“아이, 왜들 이러세요? 이러지 말고 얼른 일어서세요.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일어나죠.”

나이즐을 비롯한 모두가 일어났지만 아까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다. 현수는 이런 분위기가 싫었지만 금방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말했듯이 제가 영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엔 작은 마을 하나밖에 없습니다.”

“……!”

드워프들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할 수 없이 반응이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그곳에 성을 지어주었으면 합니다.”

“성을? 마탑이 아니고요?”

“네, 성입니다. 조만간 결혼도 할 겁니다. 그럼 애도 낳을 테니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거처가 필요합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나……?”

힘센 자가 까라면 까는 것이 이곳 아르센의 율법이다. 자존심 따위는 없다. 생존의 문제가 걸린 때문이다.

드래곤도 때려잡는 게 9서클 마스터이다.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증명해 냈다. 그런데 그보다 경지가 높은 10서클이란다. 감히 반항해 볼 생각조차 해선 안 될 존재이다.

“생각해 놓은 크기는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백작가 정도면 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곳까진 너무 멀어서……. 가려면 한참 걸린다는 것을 양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주신다면 이곳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만들어놓겠습니다. 수시로 오갈 수 있도록 하지요.”

“아! 그렇지. 텔레포트가 있었군요!”

드워프에게 마법은 없다. 그렇기에 생각지 못했다는 듯 이마를 친다.

“어떻습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의 노고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맥주를 달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고 다른 것을 원하면 그것 또한 구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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