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2
나이즐 빌모아가 형제들을 바라본다. 눈빛으로 의견을 묻는 것이다.
모두들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다. 10서클 마법사의 뜻을 따르자는 의미일 것이다.
“마탑주님의 뜻대로 하지요.”
“아! 고맙습니다. 그쪽에서 일을 하다 보면 많은 광물이 필요할 겁니다. 말씀만 하시면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메탈 디텍션이란 마법을 쓰면 광맥을 쉽게 찾으니까요.”
“그 말 정말입니까?”
나이즐의 눈빛이 반짝인다. 요즘 철광석이 없어서 놀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대낮부터 맥주를 마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혹시 필요한 광물이 있는지요?”
“철광석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그럼 한번 찾아보죠.”
말 나온 김에 밖으로 나왔다.
“플라이! 메탈 디텍션!”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 땅 속의 금속 물질을 찾는 마법을 구현시켰다.
천천히 유영하듯 하늘을 날며 드워프들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점점 범위를 넓혔다. 바로 옆에 철광석 광산이 있었지만 광맥이 고갈되었는지 느껴지는 정도가 시원치 않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가다 보니 확연히 느껴지는 곳이 있다. 상당히 많은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위치를 확인하곤 곧바로 돌아왔다.
“철 광맥을 찾았습니다.”
“아! 그래요? 어딥니까?”
나이즐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난다.
“저기 저쪽 저 바위 보이십니까?”
“어떤 바위요?”
“요 앞의 산 너머 뾰족한 봉우리 보이죠? 그 봉우리 좌측을 보면 오른쪽으로 절벽이 있는 곳이요.”
현수의 손짓과 설명에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이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쪽 붉은 바위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마치 말안장처럼 생긴 거요.”
“네, 보입니다.”
“그 산에 철 광맥이 있습니다. 확인해 보니 매장량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이즐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거긴 광산을 만들 수 없는 곳입니다.”
“네? 왜죠?”
“거긴 라이세뮤리안님의 레어와 너무나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짧은 우리가 거기까지 가려면 최소 이틀은 걸어야 합니다.”
“……!”
이번엔 현수가 대꾸하지 않았다.
“라이세뮤리안님이 허락을 해주셔도 멀어서 힘들어요. 우리 거처를 그쪽으로 옮기기 전에는 말이죠.”
“그럼 거처를 옮기세요. 제가 라세안에게 이야기해 드리죠. 제 말이라면 들어줄 겁니다.”
“아뇨. 그래도 어렵습니다.”
“왜죠?”
드래곤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데 못한다니 의아하다.
“저긴 싸가지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입니다.”
“싸가지라니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수 없는 키다리를 말하는 겁니다.”
“키다리요? 아! 혹시 엘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긴 그 녀석들의 앞마당입니다. 우리가 이사 가면 아마 이틀에 한 번 꼴로 놈들과 전투할 겁니다.”
“아! 그럼 어쩌죠? 이 근방엔 철광산이 없는데.”
현수가 말꼬리를 흐리자 나이즐이 묻는다.
“혹시 바세른 산맥에 우리 거처를 마련해도 되는지요?”
“네? 제 영지로 이사하시려고요?”
“우리 일족이 이곳에 머문 게 1,000년이 넘었습니다. 인근에 개설된 광산의 광맥들도 거의 모두 소진되었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오십시오. 저야 환영입니다. 오시면 원하는 곳에 자리 잡게 해드리죠.”
한자어에 불감청 고소원이란 말이 있다.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원래부터 바라던 바라는 뜻이다.
드워프들이 이실리프 영지로 이주하면 여러모로 이롭다.
만들 것은 많고 손재주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이삿짐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아공간에 담아 가면 문제없습니다.”
“하긴…….”
엄청난 수의 맥주를 아공간에 담아왔고, 수천 톤의 황금이 들어가는 아공간이다. 빌모아 일족의 이삿짐 정도는 한 번에 옮겨줄 수 있을 것이다.
“저쪽엔 화전민 마을 하나밖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임시로 머물 만한 거처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영구적인 것이 아니니 당도하는 대로 일족의 마을부터 만드세요.”
“고맙습니다, 대마법사님.”
나이즐이 정중히 고개 숙인다. 드래곤 같았으면 본인의 레어 먼저 만들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사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조만간 다시 오겠습니다. 언제 오면 되죠?”
“보름은 걸릴 겁니다. 이것저것 챙길 게 많으니.”
1,000년 이상 살아온 터전을 옮기는 일이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 * *
빌모아 일족을 떠난 현수는 신전 농장에서 종자 개량 작업에 힘을 쏟았다. 타임 딜레이 마법과 반대로 타임 패스트 마법은 시간을 180배 빨리 흐르게 한다.
결계 밖 하루가 결계 내에선 반년인 셈이다.
벼는 파종→발아→생장→출수→성숙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친다. 최종적으로 벼 알의 수분이 20% 정도 될 때가 수확 가능 시기이다. 이 기간은 6개월 이내이다.
따라서 결계 밖 시간으로 아침에 파종을 하면 오후엔 수확 가능하다. 참고로 수확하기 위해 결계 안으로 들어갈 때 마법진의 마나석을 빼면 외부와 시간이 같아진다.
그렇기에 성녀와 현수는 다양한 품종의 지속적인 교배육종1)를 통해 우수한 형질을 찾았다.
성녀는 신성력을 불어넣은 것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을 구분하여 비교를 계속했다. 경험상 이렇게 해야 효율적임을 체득한 때문이다.
벼뿐만이 아니다. 보리, 콩,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아르센의 주요 곡물인 밀도 마찬가지이다.
현수가 가져온 밀의 종자는 지구에서 가장 수확량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신전에서 개량한 밀과 교배되었다.
오늘은 그것을 확인하는 날이다.
“페룸 신관, 결과가 나왔나요?”
머리가 허연 페룸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게 10초쯤 지나자 고개를 든다.
“성녀님, 새 품종의 수확량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요? 얼마나 늘었지요?”
기대 어린 표정이다.
“제 계산이 맞는다면 이전보다 4분의 1이 늘었습니다.”
“네? 정말요? 정말 그렇게 많이 늘었다는 말씀이세요?”
성녀는 몹시 흥분한 표정이지만 페룸 신관은 또 대답이 없다. 자신의 계산이 맞았는지를 확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성녀는 재촉하지 않고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전의 수확량은 11.5톤/㏊였다. 이게 14.4톤/㏊ 정도로 상향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전 품종보다 줄기의 길이가 더 짧아져 수확량이 늘 것이란 기대는 했다. 이런 경우 줄기를 만들 영양분이 낱알로 간다는 것을 배운 때문이다. 물론 현수가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25%나 늘어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종자 개량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녀님, 제 계산이 맞습니다. 수확량이 대폭 늘었습니다.”
“어머, 정말요? 정말, 정말, 정말, 정말이요?”
“하하! 네. 정말, 정말 수확량이 늘어났습니다.”
페룸도 성녀처럼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와아아아! 만세, 만세, 만세!”
성녀는 체통을 잃고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작약한다.
같은 시각, 현수는 벼 재배지에 있다.
이쪽도 수확량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 작업 중이다.
“안토니오, 어떻게 되었는가?”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님.”
수확량을 계산하고 있는 일꾼 안토니오는 매일 일당을 지급하는 현수를 하늘처럼 여긴다.
품삯을 넉넉히 주기 때문이고, 기분이 좋아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게다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고 했더니 값비싼 포션을 주었다.
하여 고질을 앓고 있던 아내가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든 시키기만 하면 마치 제 일처럼 열심히 한다.
“어때? 이제 다 된 건가?”
말없이 잠시 하는 양을 지켜보던 현수가 입을 열자 안토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다 되었습니다. 이번 품종은 어제의 것보다 수확량이 20분지 1 정도 늘어났습니다요.”
“그래? 그렇게나 많이? 하하, 이거 정말 좋군.”
여러 번 교배를 해보았지만 수확량이 5%나 증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신성력을 받은 쪽이 그런 건가?”
“그렇습니다. 성녀님이 축복해 주지 않은 것도 늘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알겠네. 수고했네.”
현수는 준비했던 막걸리를 꺼내 건넸다. 퇴근할 때마다 한 병씩 꺼내주는 중이다.
“에구, 또 이걸……. 고맙습니다요.”
“빈병 가져오는 거나 잊지 말게.”
“아이고,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안토니오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자 뒤쪽에서 달려오는 성녀가 보인다.
“백작니임∼! 백작니임∼!”
“어라? 누구지? 아! 성녀님이시군.”
달려오는 성녀의 얼굴이 보인다.
늘 면사로 가리고 있어 어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지금은 면사가 어디로 갔는지 맨얼굴이다. 바쁘게 달려오는 동안 떨어져 나간 듯하다.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이다. 그런데 몹시 아름답다. 전성기 때의 그레이스 켈리와 비슷한데 그보다 더 예쁘다.
“허어! 성녀가 이렇게 예뻐도 되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모르셨습니까? 성녀님은 우리 라이셔 제국 최고의 미인이십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안토니오에게 시선을 돌리니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성녀님보다 아름다운 분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요. 정말 천사 같은 분이시죠. 나중에 누구에게 시집을 가실지 모르지만 신랑 될 사람은 정말 복 받는 겁니다.”
“…성녀도 결혼을 하나?”
“네, 가이아 신전의 성녀는 결혼을 하죠. 남편 되는 분은 신성력이란 지참금을 받게 되구요.”
“지참금으로 신성력을 받아? 그게 뭐지?”
“성녀님과 합방을 하면 신성력이 옮겨간대요. 금슬이 좋을수록 더 많은 신성력을 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성녀의 남편은 신관이 되는 건가?”
“아뇨. 그렇다 해서 신관이 되는 건 아니라고 해요. 그렇지만 웬만한 신관보다 더 많은 신성력을 쓸 수 있으니 신관 대접을 받지요. 거의 추기경급 대접입니다.”
안토니오와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성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두 팔을 벌린 채 환호작약하며 뛰어오는 것을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하다.
2장 교배육종 해볼까요?
“백작니임∼! 백작니임∼!”
“네, 성녀님.”
“백작니임∼! 허억―!”
“앗! 성녀님!”
와락―! 뭉클―!
“……!”
“어머, 어머머머! 미, 미안해요. 돌부리에 발이 걸려서……. 미안해요.”
설명은 길었지만 상황은 순식간이다.
환한 얼굴로 뛰어오던 성녀는 몇 m 앞에서 걸음을 멈추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앞에 작은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성녀의 발이 거기에 걸리는 순간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놔두면 와당탕 하고 엎어질 상황이다.
그러면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날 것이다.
현수는 얼른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엎어지는 성녀의 교구를 받아 안았다. 그 순간 가슴에서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든다. 뭔지는 대강 짐작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화들짝 놀란 성녀는 얼른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은 직후 현수의 표정을 본 때문이다.
“성녀님, 발 괜찮으세요?”
“네? 아, 네, 그, 그럼요. 괜찮아요. 으읏!”
이상 없음을 보여주려는 듯 발로 바닥을 툭툭 치려던 성녀의 아미가 확 찌푸려진다. 고통을 느끼는 듯하다.
“아파요? 어디 봐요.”
얼른 쪼그려 앉은 현수는 성녀가 신은 얇은 가죽신을 벗겼다. 두 번째 발가락이 부어오르고 있다.
부러진 모양이다.
“이런! 부러진 모양이네요.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점차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
“신발이 찢어졌군요.”
돌부리에 걸리는 순간 꿰맨 부분이 터진 모양이다. 발 크기를 가늠하고는 아공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