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4
“오늘 이사하는 드워프들이 있어 도와줘야 합니다.”
“어머! 드워프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성녀는 꼭 데리고 가달라는 표정이다.
“네? 왜요? 성녀님이 드워프들은 왜……?”
“그분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것들이 있어요. 종자 개량에 꼭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
“모처럼 바람도 쐬고 싶구요.”
“자리를 비우셔도 되겠습니까? 하루 종일 걸릴 일입니다.”
“괜찮아요. 페룸 신관과 안토니오라면 우리가 없어도 알아서 해줄 테니까요.”
“하긴…….”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룸과 안토니오는 성녀와 현수의 입안의 혀처럼 원하는 바를 알아서 척척 해준다.
그래서 요즘엔 파종만 하고 자리를 비웠다가 수확할 때 확인만 한다. 직접적인 작업은 페룸 신관과 안토니오가 다 하기 때문이다.
“저, 여기 말고 다른 곳의 바람을 쐬고 싶어요. 그러니 꼭 데리고 가주세요. 네?”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표정이다. 이런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대신 오늘 갔다 오는 곳에서 보고 들은 건 전부 비밀입니다. 약속해 주실 거죠?”
“그럼요. 교황님이 물으셔도 대답하지 않을게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는다. 반쯤 승낙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서십시오.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을 써야 하니까요.”
“그래요? 알았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싹 다가선다. 얼마만큼 가까워야 하는지 모르기에 거의 포옹 수준이다.
“……!”
비누나 샴푸를 쓰지 않기에 성녀지만 냄새가 난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냄새이다. 악취는 아니기에 견딜 만하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진다.
“어머! 여긴 어디죠? 경치가 참 좋아요.”
“여긴 라수스 협곡입니다. 이곳에 드워프 일족이 살죠.”
“아! 그래요? 근데 어디 있나요?”
드워프가 안 보인다는 듯 두리번거린다.
“저쪽에 있어요. 따라오세요.”
성큼성큼 걸어간 현수가 바위를 쿵쿵 두드리자 문이 열린다.
삐거덕―!
“아! 어서 오시게, 귀빈! 통행료는 알지?”
살짝 윙크하며 눈웃음치는 드워프에게 맥주 여섯 캔을 꺼내주었다.
“크으, 역시! 족장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지?”
“그럼요.”
“어! 손님이 또 계시네?”
눈웃음이 사라지는 대신 경계의 눈빛이 된다.
“네.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 그렇담 통과지. 통과!”
드워프들의 작업장까지 가려면 낮고 긴 통로를 지나야 한다. 자신들의 키에 맞춰 통로를 만든 때문이다.
한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광장 비슷한 곳이 나온다. 거기엔 짐이 그야말로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어서 오십시오. 대마법사님!”
나이즐 빌모아와 그 형제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에구! 족장님, 이젠 이러지 마세요. 그냥 전처럼 대해주세요. 그게 더 편해요. 그러니 이제부턴 전처럼 말 낮추셔도 됩니다.”
“그, 그렇습니까?”
나이즐은 쉽게 말을 놓지 못한다. 현수의 마음이 변하면 큰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네, 그게 더 정감 있잖아요. 그러니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아셨죠?”
“그, 그래도 어떻게……. 아, 알겠습니다.”
나이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성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드워프는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다.
하여 자신들을 힘으로 깔아뭉갤 수 있는 드래곤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는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결코 존대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왕이지 드워프의 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워프 족장이 현수에게 존대를 하며 절절매는 인상이다. 대체 왜 이러나 싶은 것이다.
“족장님, 이쪽은 가이아 여신을 모시는 성녀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스테이시 아르웬이라 해요.”
“네? 성녀요?”
나이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신전에나 있을 성녀가 이 심심산골에 왜 왔느냐는 뜻이다.
더구나 드워프는 신전과 거의 관계가 없다. 신은 인간만 돌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네, 저는 가이아 여신을 모시고 있는 성녀예요.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네에.”
나이즐은 현수를 보곤 슬쩍 말을 높인다. 둘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삿짐은 다 싸신 거죠?”
“그, 그럼요. 아니, 그럼.”
“여기 있는 이게 전부인가요?”
“그, 그렇… 다네.”
눈치를 보더니 슬쩍 말을 내린다. 현수는 개의치 않고 이삿짐의 규모를 눈짐작으로 재봤다.
“아공간 오픈! 입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커먼 공간이 허공에 일렁이더니 광장에 쌓아둔 이삿짐 전부를 단숨에 빨아들인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난 보름간 거처 곳곳에 있던 것들을 낑낑 매면서 이곳에 쌓아놓은 것이다.
갓난아이를 뺀 종족의 모든 인원이 총동원된 일이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아공간에 담아버리니 허탈하다는 표정이다.
“이게 끝인가?”
“그럼 짐이 더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무 쉬워 보여서…….”
“그럼 족장님도 마법을 배우세요. 한 50년쯤 배우면 아공간 마법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싶지만 드워프는 마법을 못 익히네.”
“왜죠?”
“그건… 드워프는 수학에 젬병이거든.”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학과 건축은 상관관계가 상당히 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학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대형 건축물의 축조가 어렵다.
그럼에도 드워프가 수학을 못한다는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왜 그런지를 깨달았다.
“아!”
마법에 사용되는 수학은 일반적인 공학 수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고차원이다. 다시 말해 건축에 필요한 수학으론 마법에 적용되는 최고난도 수리(數理)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 것이다. 드워프로선 50년이 아니라 500년이 지나도 익힐 수 없는 것이 마법인 것이다.
“자, 이제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립니다. 50명씩 차례대로 서면 진을 발동시켜 드릴 겁니다.”
“50명씩?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
마법은 펼칠 줄 모르지만 텔레포트가 뭔지는 안다. 들어본 풍월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이동에 열 명 이내가 안전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현수가 너무나 많은 숫자를 부르니 의아한 것이다.
물론 이건 기우이다.
현수는 10서클 마법사이므로 한꺼번에 100명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안전을 위해 규모를 반으로 줄인 것이다.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자, 그럼 조금씩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물러선다. 현수는 텅 빈 광장에 커다란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렸다.
포탈 마법진이나 워프 마법진이 아닌 이것을 그리는 이유는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원과 삼각형, 오각형, 육망성 등이 차례대로 그려졌고, 룬어가 빈자리에 채워졌다.
대략 30분이 지나자 진이 완성되었다.
“자, 이제 50명씩 올라서십시오.”
“이거 진짜 안전한 거지?”
“그럼요. 걱정 말라니까요.”
“우린 어디로 가게 되는 건가?”
“아! 그 말씀을 안 드렸군요. 잠깐 모여보세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빌모아 일족의 수뇌부가 모였다.
현수는 준비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실리프 영지 위쪽을 비행하면서 찍은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지도이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여기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도착 즉시 진 밖으로 물러서야 뒤에 당도하는 분들이 안전하다는 거 잊지 마십시오.”
“알겠네.”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에 현수는 지도의 한곳을 손으로 짚었다.
“여러분의 거처가 완성될 때까진 이곳에서 머물게 될 겁니다. 여기 가시면 쇠로 만든 임시 거처가 있습니다. 이건 임시이니 제대로 된 거처를 만드셔야 할 겁니다.”
현수가 준비해 놓은 컨테이너는 가로 6.08m, 세로 2.43m, 높이 2.59m짜리이다. 전형적인 수출 화물용 컨테이너이다.
이것엔 항온과 공간 확장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곧 겨울이 오기에 실내 온도는 늘 25℃가 유지되도록 해놓았다. 14.7㎡ 정도 되는 내부 면적은 100㎡ 정도로 늘어나 있다. 한국으로 치면 전용면적이 약 30평인 것이다.
이 정도면 드워프 가족이 생활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근처에 백두마트에서 가져온 이층침대 샘플을 꺼내놓았다.
이걸 보면 자신들의 체구에 맞는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여러분이 머무실 곳이고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엔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와 여긴 구리 광산이고요. 여긴 은 광맥이 있습니다.”
“뭐? 철 광맥이 셋이나 있다고?”
나이즐이 몹시 흥분된 표정을 짓는다.
“그렇습니다. 매장량도 풍부하니 최소 1,000년은 머무셔도 될 겁니다.”
“…어서 빨리 보내주시게.”
광맥이 풍부하다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 미스릴 광맥이 있습니다.”
“뭐? 미, 미스릴도?”
“그렇습니다. 매장량도 적지 않더군요.”
현수는 태연한 표정이지만 나이즐 등은 몹시 흥분해 있다. 물론 미스릴이 있다는 말 때문이다.
“그리고 여긴 뭔지는 모르지만 금속 광맥이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십시오.”
“알겠네. 그리고 고맙네.”
“…네.”
나이즐과 잠시 시선을 맞추곤 환히 웃어주었다.
“여러분의 영구적인 거처는 이곳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좌우에 절벽이 있어 입구만 제대로 막아놓으면 혹시 있을지 모를 몬스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지형입니다.”
현수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태블릿PC 화면으로 보여준 것이다.
당연히 총천연색이고, HD급 화질이다.
드워프는 물론이고 성녀까지 눈이 커진다. 세상에 이런 게 있다는 걸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절벽은 약간 찌그러진 ∑ 모양이다.
입구 쪽이 좁다. 높이는 100m가 넘는다. 입구를 막으면 공격당할 곳이 없다.
공간이 부족하면 안쪽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면 될 것이다.
“……!”
드워프들은 너무도 생생한 HD급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여기엔 수맥이 있습니다. 도착하면 우물을 만들어 드리지요. 제 성은 이쪽에 지어주십시오.”
지도를 손으로 짚고는 성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곳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말을 잇는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와 여기, 또 여기에도 수맥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우물을 만들 것이니 그것을 감안하여 각종 건물을 배치해 주십시오.”
드워프들은 계속해서 지도와 태블릿PC를 번갈아 본다. 이런 것이 있으면 살기 편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당분간은 몬스터의 공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친구 라이세뮤리안이 브론테 왕국 쪽으로 몰아내고 있으니까요.”
“네? 라, 라이세뮤리안님이요?”
모두들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설명은 이어진다.
“네, 우리 영지가 안전해야 하기에 몬스터를 전부 몰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세상에!”
드워프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뜨린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드래곤이 친히 나섰다는 뜻으로 들은 때문이다.
“성이 완성되면 여기와 여기, 그리고 이곳에 마을을 조성해 주십시오. 각 마을의 인구는 2,000명 수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수맥은 여기,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이곳에도 우물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수의 계속된 설명에 드워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인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3장 본격적인 영지 개발의 시작
이실리프 영지의 개략적인 개발 계획을 들은 드워프들은 눈을 크게 떴다. 아르센 역사상 처음으로 상하수도 개념이 도입된 계획도시에 대해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로는 널찍널찍하게 조성된다.
한국으로 치면 4차선 도로쯤 된다. 이 모든 도로엔 가로, 세로 20㎝ 정도 되는 보도블록이 깔리게 된다.
처음 도로가 조성되는 부분의 자재는 지구에서 가져갈 계획이다. 이것을 만들 인력이 현재로썬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중엔 자체 생산하여 포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