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57화 (657/1,307)

# 657

“그나저나 날 왜 부른 거야?”

“내가 몬스터 쫓아내랬지 산짐승들까지 몰아내라고 했어? 사슴 같은 건 있어도 되잖아. 무해하니까.”

방금 전 라세안이 성녀에게 한 말은 나중에 따로 해명하면 된다. 그렇기에 곧장 용건을 꺼낸 것이다.

“그런가? 알았네. 그놈들만 따로 추려서 이쪽으로 몰지. 근데 겨우 그것 때문에 불렀어?”

“아니,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도 알고 싶어서.”

“많이 몰았어. 근데 생각보다 몬스터들이 많아. 오크나 오우거는 물론이고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엄청나게 많더군. 트롤이나 샤벨타이거도 많고.”

표정을 보니 진짜 숫자가 많은 모양이다.

“그래? 하긴, 여긴 인적이 드문 곳이니. 토벌 작업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 거야.”

“게다가 요즘 로드가 수면기에 들어서 그런 모양이야.”

“드래곤 로드가 수면기에 들어?”

“그래, 바세른 산맥은 드래곤 로드인 옥시온케리안의 영역이야. 근데 지금 수면기거든. 그래서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불어난 모양이야.”

“여기가 드래곤 로드의 영역이라고?”

“그래. 자네가 로드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네.”

“으으음! 별문제 없겠지?”

“있을걸. 로드는 번거롭고 시끄러운 거 되게 싫어해.”

“으으음.”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드래곤 로드와의 불협화음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든 드래곤과 척지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방금 전 라세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곱씹던 성녀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지려 했다.

그런데 드래곤 로드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말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현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저 사내의 여자가 되어서 사는 삶은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엄청나게 넒은 영지를 가진 사람이다. 어떤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왕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이실리프 마탑주이고 매지션 로드이며 그랜드 마스터이다.

드래곤이 친구를 자처하고 있고, 1,500명에 가까운 드워프들이 기꺼이 솜씨를 부려준다고 한다.

영지 개발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은 장차 아르센 어느 곳에도 없는 화려한 문물을 가진 곳이 될 것이다. 여기에 신전을 짓고 영주의 부인이 되어 사는 삶을 생각해 보았다.

여긴 온갖 신기한 물건이 다 있는 곳이다.

상하수도와 수세식 변기, 비누, 라이터, 양초, 휴지, 치약, 칫솔, 가스레인지 등이 있다.

신전에서도 시녀들이 수발을 들어주지만 이곳보다 편리하고 쾌적하며 아늑하진 못할 것이다.

“여기서 저 사람과 결혼해서 살아볼까?”

현수와 라세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할 때 성녀가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린 말이다.

“네? 뭐라 하셨습니까?”

성녀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본 현수가 물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녀가 반문할 때 라세안이 나선다.

“아니긴, 성녀가 너하고 결혼해서 여기서 살고 싶대.”

“…네? 정말요?”

현수의 시선을 받은 성녀의 귀가 금방 빨개진다. 잠시 후 볼도 빨개진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인다. 긍정의 뜻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현수가 입을 연다.

“…성녀님, 저에겐 이미 아내가 있습니다.”

“……?”

성녀는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하다. 라이셔 제국의 최고 미녀이자 성녀인 자신을 거절하는 듯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황제 또는 황자와는 맺어질 수 없다는 신전 법만 없었다면 일찌감치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 제국의 모든 귀족가에서 성녀를 지켜보고 있다.

인연만 맺어지면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연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녀의 남편이 되면 평민이라 할지라도 곧바로 후작위를 받는다. 아울러 신전 인근의 토지를 봉토로 하사 받는다.

모반의 죄만 아니면 처벌 받지도 않는다. 영지전의 대상도 안 된다. 그러면 신전과 완전히 척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모든 사내가 성녀와의 결혼을 바란다. 그들에게 있어 성녀와의 결혼은 단독 당첨된 로또복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가 선을 긋자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보게, 친구.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다프네와 케이트가 있네. 참, 카트린느도 있지. 게다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여섯 명이나 더 있잖은가.”

“……!”

방금 언급된 것만 열한 명이다. 성녀는 정말 이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있느냐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정색하며 라세안을 바라본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만 아내이네.”

“그건 아니잖아. 전에 다프네와 케이트, 그리고 카트린느를 점찍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쓱싹은 했는데 그새 마음이 변해서 아내가 아니라고 하는 건가?”

라세안이 진짜냐는 표정을 짓는다.

“쓱싹이라니?”

“전에 자네가 밤마다 자리를 비웠을 때 내가 묻지 않았나? 케이트를 쓱싹하고 왔느냐고. 그때 자네가 뭐라고 그랬어? 내 기억엔 그렇다고 했네. 그건 자네가 케이트랑 밤새 같은 침상에서 뒹굴었다는 걸 의미하네.”

“그건…….”

현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케이트를 만나고 온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귀찮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라고 하면 다프네와 케이트, 그리고 카트린느를 데려다 새끼를 낳는 모체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다프네가 라세안의 딸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기에 그녀를 포함시킨 것이다.

라세안은 같이 있을 때 입버릇처럼 친구가 점찍은 게 아니라면 그러고 싶다면서 몹시 아쉬워했다.

특히 케이트와 카트린느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몸매, 그리고 명석한 두뇌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면서 다프네를 슬쩍 끼워 넣은 건 현수와의 인연을 만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딸을 시집보내 사위가 되어야 라수스 협곡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핵배낭 이야기를 들은 이후의 일이다.

아무튼 현수가 어물쩍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라세안이 말을 잇는다.

“이보게, 친구. 케이트는 밤마다 가서 만나지 않았는가? 사내가 어찌 같이 밤을 보낸 여인을 버리려 하나? 그럼 안 되지.”

“끄응!”

현수는 대답하기 난감하여 침음을 냈다.

“어쨌거나 열한 명이나 있으면서 성녀는 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아주 괜찮은데.”

라세안의 이런 물음엔 음흉한 속내가 감춰져 있다. 겉으로만 성녀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는 것이다.

한편, 성녀는 현수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이다.

왜 자신을 거부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절세미녀이다. 그리고 배경도 빵빵하다.

과일로 치면 향기도 그윽하고 가장 달콤한 맛을 낼 진짜 먹음직한 상태이다.

이때 라세안의 전음이 있었다.

‘친구, 성녀는 마누라 삼을 거 아니지? 그치?’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라세안의 전음이 들린다.

물론 성녀는 들을 수 없다.

‘그래? 진짜지? 그럼 나 좀 도와주게.’

현수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내가 데려다가…….’

라세안의 전음은 중간에 끊겨야 했다. 현수가 먼저 입을 연 때문이다.

“알았네. 자네 말대로 성녀도 받아들이지.”

“……!”

현수가 이런 돌발 발언을 한 이유는 라세안이 성녀를 데려다 모체로 삼으려 한다는 걸 눈치챈 때문이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여인이 한낱 드래곤의 애첩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자네 욕심은……. 내 이럴 줄 알았네.”

라세안이 왜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인간 중 희대의 바람둥이가 여심에 관해 논해놓은 책이다.

그것의 내용 중에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 있다. 지금처럼 상대로 하여금 치욕감 내지는 불쾌감을 느끼게 해서 접근하는 방법이다.

예쁜 여인일수록 이런 수법이 잘 먹혀든다. 본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오기가 솟기 때문이다.

라세안은 현수의 이런 수법은 배워둘 만하다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성녀는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받아들여 준다니 고맙기는 하지만 자신이 현수의 열두 번째 여인이 될 거라는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다.

“정말 성녀를 받아들일 건가?”

현수는 성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점찍었네. 지금 작업 중이지. 그러니 넘보지 말게.’

말로 하면 성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이렇게 전음으로 말한 것이다.

조금 전 행동은 나중에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다.

성녀도 드래곤의 새끼를 낳는 모체로 전락하긴 싫을 것이기 때문이다.

“흐음, 알겠네. 자네가 그렇다면야…….”

라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덤벼봤자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에 괜한 도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영지개발 건으로 드래곤 로드와 문제가 생기면 중재해 줄 거지?”

“내가? 난 별로 안 친한데?”

로드는 골드드래곤이고 라세안은 레드드래곤이다. 전통적으로 둘 사이는 껄끄럽다. 성향 때문이다.

골드는 다혈질인 레드가 못 마땅하고, 레드는 홀로 점잖은 척 하는 골드의 그런 태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재를 못해준다고?”

“아마 그럴 거야. 로드는 나와 말 섞는 것조차 싫어하니까. 나하곤 조금 껄끄러운 사이거든.”

“끄응! 그럼 어쩐다?”

드래곤 로드와의 분쟁은 미리 준비되어야 하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어 나지막한 침음을 냈다.

“그럼 제니스 불러줄까?”

“제니스? 제니스는 왜?”

“그야 로드의 쌍둥이 동생이니까.”

“뭐?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근데 제니스가 나를 위해 나서줄까?”

현수는 반색을 하며 이맛살을 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자네에게 당한 게 있으니까.”

“아!”

인간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니 제니스의 자발적인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번 만나는 봐. 혹시 알아? 밑져야 본전이잖나.”

“그렇지. 그래, 조만간 한번 보자고 해주게.”

라세안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진다.

“오케이! 그럼 난 이만 가네. 몬스터 숫자가 너무 많아 제니스 혼자선 못 몰 테니.”

“그래, 알았네. 수고 부탁하네.”

“나중에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알지?”

“그래. 삼겹살과 소주, 아주 원 없이 먹게 해주지.”

“크흐흐! 그래야지. 제니스도 그건 한번 먹어보고 싶다더군, 그걸로 한번 꼬셔 봐.”

삼겹살과 소주에 중독된 라세안이 하도 이야길 많이 해서 제니스가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순식간에 라세안이 사라진다.

“성녀님, 이제 슬슬 가볼까요?”

“네? 아, 네.”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지만 묻지 않았다. 라세안이 아직 근처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수에게 있어 라세안은 다소 의뭉스런 존재이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경계하는 마음이 있다.

현수가 공터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성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나를 받아준다고? 겨우 열두 번째로? 근데 왜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떨렸지? 내가 저 사람을 진짜 좋아하는 건가?’

성녀는 복잡 미묘한 마음을 정리할 수 없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머릿속의 상념들을 떨구려는 몸짓이다.

“벌써 다 하셨는가?”

나이즐 빌모아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삿짐 정리는 잘 되어가는 거죠?”

“당연하지. 아주 잘 진행되는 중이네. 그나저나 자네 곁에 있는 성녀님은 아주 예쁘네.”

“아, 그래요? 그야 성녀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흐음, 성녀이기 때문이라…….”

산속에 처박혀 무구를 만들거나 보석을 다듬지만 신전과 성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성녀의 입이 열린다.

“저어… 초면이지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는지요?”

“부탁? 우리에게 말이오?”

가이아 여신의 성녀라 하였기에 나이즐은 처음 보는 인간이지만 말을 놓지 않는다.

“네. 농사지을 때 쓰는 농기구들을 만들어주셨으면 해요.”

신전 농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전용 대장간에서 만든다. 그런데 내구도가 형편없다.

이곳엔 아직 담금질 같은 기술이 전파되지 않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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