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5
“어머, 하인스 백작님!”
“아, 세렌!”
“여기 떠나신 거 아니었어요?”
“잠시 어디 좀 다녀온 거야. 근데 혹시 성녀님 보았어?”
“조금 전에 신전 밖 리아 농장으로 가셨어요.”
“아, 그래?”
현수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세렌은 뛴다.
“백작님! 백작님! 제가 모실게요!”
“…그래, 같이 가자.”
걸음 속도를 늦추자 금방 따라와 배시시 미소 짓는다. 참 건강한 미소이다.
“근데 백작님은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떠난 시각에 맞춰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구에서 보낸 기간이 이곳에서도 같이 지나갔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오늘은 12월 2일이다. 아흐레가 후딱 지나간 것이다.
“아! 주인님 오셨습니까?”
리아 농장 작업반장으로 임명된 안토니오가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그래, 잘 있었는가?”
“그럼요. 주인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토니오와 아들 스테파노는 현수로부터 10년 치 삯을 미리 받은 바 있다. 그 돈으로 아담한 집을 마련해 이주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아주 흐뭇한 삶을 사는 중이다.
농장에서 일하는 다른 일꾼들에게 지급하는 일당은 성녀가 보관 중이다. 하여 현수가 없어도 매일매일 일당이 지급된다.
일당은 성전에서 일하는 것보다 후하다. 그렇기에 너도 나도 리아 농장에서 일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성녀님은?”
“조금 전에 저쪽으로……. 아! 저기 오시네요.”
안토니오가 가리킨 곳을 보니 성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오고 있다. 작물의 생장 현황을 세심히 살피는 중이다.
몇 발짝 떼곤 뭔가를 스프링 노트에 메모하면서 오느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금방 가까워지지 않는다.
현수가 아무런 말도 없기에 안토니오 역시 아무런 말 없이 성녀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우와아앙! 하인스님! 왜 이제 오셨어요?”
“엥?”
현수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이때 안토니오가 슬그머니 물러난다.
지난 며칠간 리아 농장 일꾼들은 성녀의 심술 때문에 미칠 뻔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닦달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에 일꾼들은 성녀만 보면 슬슬 도망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안토니오는 성녀가 왜 그러는지 대강 짐작했다. 젊었을 때 인물이 좋았기에 제법 많은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도망칠 때 스스로 나서서 성녀의 투덜거림을 들어주었다. 그게 의무라 생각한 때문이다.
성녀는 한동안 같이 움직이던 현수가 사라지자 상실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 짜증을 부린 것이다.
그것의 저변엔 현수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깔려 있다.
사라지기 전에 알게 모르게 신호를 보냈다.
당신이 나를 열두 번째 여인으로 받아들였으니 다정스런 말 한마디라도 해달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다. 게다가 언제 올지 기약도 없다.
갑작스런 상실감에 성녀는 혼돈을 느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갈하게 수욕을 하고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한다. 성녀라면 의당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런데 그걸 빼먹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아 허둥댄 날도 있다.
마음이 불편하니 신관이나 일꾼들도 못마땅해 보인다. 하여 뭐라 잔소리를 했더니 슬슬 피한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누군가에게 악다구니라도 퍼붓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성녀는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홀연히 사라진 현수는 잊고 예전으로 되돌아가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하여 이전처럼 신전 농장을 다 둘러본 후 리아 농장을 찾았다. 사람은 없어졌지만 교배육종은 계속하기로 했다.
매일매일 결과가 나오기는 하는데 왠지 예전 같지 않다.
교배를 하면 늘던 줄던 수확량의 변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결과표를 보면 거의 변화가 없다.
혹시라도 뭔가 잘못되어 그런 건 아닌가 싶어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파종 후 흙은 제대로 북돋았는지, 토양이 너무 푸석푸석해진 것은 아닌지 등을 살핀 것이다.
신성력 결계는 지구로 치면 비닐하우스의 비닐과 같다. 신전의 경우는 성물이 있기에 규모가 커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리아 농장은 신전 밖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에 마치 비닐하우스처럼 필요한 부분만 결계가 쳐져 있다.
혹시 이것에 문제가 발생된 것은 아닌가 싶어 유심히 살피며 이동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니 꿈에도 그리던 하인스 백작이 보인다.
처음엔 잘못 보았나 싶었다. 하여 눈을 비볐다.
그래도 보인다. 너무나 보고 싶어 해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르센 대륙에서 누가 양복을 입고 다니는가!
성녀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며 달렸다.
20m를 전속력으로 달린 성녀는 현수를 덥석 끌어안았다.
“왜! 왜 이제야 왔어요? 흐흑! 보고 싶었어요! 흐흐흐흑!”
“끄응!”
현수가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하고 침음을 낼 때 성녀가 팔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진다. 당연히 가슴 부위에서 뭉클한 무엇인가가 찌그러지는 느낌이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흐흑! 이제 가지 마요. 나 혼자 두고 가지 말란 말이에요. 흐흐흑!”
“……!”
“왜 대답이 없어요? 날 받아준다면서요. 열두 번째라도 좋아요. 그러니 이제 가지 마요. 네? 흐흑, 흐흐흐흑!”
여심을 조금은 짐작하게 되었는지라 라세안과의 대화 직후에 왜 그랬는지를 설명했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았기에 성녀 혼자 마음을 키워왔고, 며칠 못 보는 사이 이런 상황까지 만든 것이다.
“이제 안 갈 거죠? 어디 가더라도 나 꼭 데리고 갈 거죠? 그쵸?”
“성녀님!”
“아잉! 싫어. 싫어요. 성녀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스테이시라 불러줘요. 백작님은 그렇게 부르셔도 돼요.”
“끄으응!”
현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어쨌거나 성녀는 잠시 현수의 품을 파고들며 나직이 흐느꼈다. 그렇게 3분쯤 지나자 조금 진정된 듯하다.
품에 있던 성녀를 떼어내며 나직이 불렀다.
“성녀님.”
“싫어요. 스테이시라고 불러요.”
“아니요.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성녀님이시잖아요.”
“가이아 여신의 성녀는 결혼할 수 있어요.”
성녀의 표정을 본 현수는 지금 당장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됨을 느꼈다. 하여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성녀님, 저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습니다.”
“알아요. 열한 명이나 있는 거.”
“열한 명이 아니라 두 명입니다.”
“네?”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라세안과 있을 때 제가 다른 여자들도 아내인 척한 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라세안은…….”
라세안이 폴리모프 마법으로 유희를 하면서 많은 여자를 꾀어내 드래고니안의 모체로 삼았음을 이야기했다. 다프네와 카트린느, 그리고 케이트를 몹시 탐냈음도 말했다.
“성녀님은 드래고니안의 모체가 되고 싶으십니까?”
“……?”
성녀는 대꾸 대신 지금 하는 말이 진실이냐는 눈빛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말을 이었다.
“제가 성녀님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던 건 라세안이 성녀님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
“제가 곧바로 사실을 밝히지 않은 건 혹시라도 성녀님이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싶어 그런 겁니다. 그 후엔 적당한 기회가 없었고요.”
“그, 그래서 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제겐 이미 두 아내가 있습니다. 아직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아앗! 성녀님!”
이야기를 하던 현수는 얼른 손을 내밀어 쓰러지는 성녀의 교구를 잡았다. 심적 충격으로 인해 혼절한 것이다.
“성녀님! 성녀님……!”
두어 번 흔들었지만 헝겊 인형처럼 흔들거릴 뿐이다.
“이런! 어웨이크!”
마법을 걸었다. 그런데 여전히 혼절한 상태이다.
현수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는 순간 스스로 의식을 단절한 때문이다. 잠든 것이 아니기에 마법의 효력이 없다.
“성녀님! 성녀님!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르릉―!
서늘한 푸른 빛 마나가 성녀의 교구로 스며든다.
하지만 깨어나진 않는다. 어딘가에 상처를 입어 혼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마나가 스며들지만 깨어나지 않는다. 의식은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성녀님! 성녀님!”
여전히 헝겊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으으음!”
현수는 축 늘어진 성녀를 안고 두리번거렸다. 일단 어딘가에 눕혀야 한다.
마땅한 곳이 없기에 신전으로 향했다.
“어엇! 성녀님께서 어디 다치셨습니까?”
위병 근무를 서던 신전기사가 화들짝 놀란다.
“갑자기 기절하셨네. 성녀전은 어딘가?”
“저, 저쪽… 아닙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신전기사를 따라 한참을 가니 흰 건물이 나타난다. 정갈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어머나! 성녀님이 왜 이러세요?”
“갑자기 기절하셨다. 침상으로 모시자.”
“네. 쇤네를 따라오셔요.”
성녀전 시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출한 방이 나타난다.
침상 하나와 기도를 할 수 있는 포단이 깔려 있다.
“이, 이쪽에 눕혀주세요.”
“그러지.”
성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물러서며 살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끄으응!”
“백작님은 이제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현수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터덜터덜 리아 농장 쪽으로 이동했다.
지금껏 선의로만 대했고 각종 곡물의 교배육종도 제 일처럼 열심히 해줬다. 게다가 마음까지 줬다.
그런데 개량된 종자만 가지고 쏙 빠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꼴이 된 것이다.
하여 착잡한 기분이다.
농장에 가보니 모두들 일하러 가고 없다.
잠시 앉아 있다 시가지 쪽으로 움직였다. 오늘은 왠지 한잔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농지를 벗어나자 황제가 붙여준 호위들이 따라붙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휘적휘적 걸어 주점으로 향했다.
삐이꺽―!
“어서 옵……! 어, 어서 오십시오.”
경첩이 없는 문이기에 나직한 마찰음이 났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례적인 인사를 하려던 사내가 눈을 크게 뜬다.
현수의 뒤쪽에 서 있는 황실근위대 소속 기사들 때문이다.
제3근위대 부대장 죠지아 레인스 남작과 그의 부하 열한 명은 현수의 뒤를 호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선두에 선 사내의 복식이 매우 독특하다.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주점이기에 별의별 패션을 다 보았지만 양복은 처음 본 것이다.
“이,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주인이 안내한 곳은 주점 중 유일하게 창밖을 볼 수 있는 자리이다. 다시 말해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되었다.
“저어, 귀족 나리, 뭘 올릴깝쇼?”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과 술 한 병 주게.”
“네, 아, 알겠습니다요.”
사내는 더 묻지 않고 후다닥 주방 쪽으로 사라진다.
같은 순간 죠지아 레인스 남작과 그의 휘하 기사 열한 명이 현수를 호위하듯 주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는다.
“자네들도 한잔하게.”
“아닙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으니까 한잔들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한잔씩만 하겠습니다.”
날씨가 싸늘하여 체온을 잃은 상태인지라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음식과 술이 세팅되었다. 현수는 자음자작하며 성녀에 관한 문제를 어찌 풀까 고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긴장되었던 실내 분위기가 풀린다. 그리곤 뒤쪽에 앉은 사내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보게, 아무래도 이레나 상단의 주인이 바뀌겠지?”
“엥? 그건 왜? 이레나 상단의 주인이 왜 바뀌어?”
“몰라서 물어? 지금 로이어 영지와 하켄 공작령 간에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잖아.”
“아! 그렇군. 그럼 이레나 상단이 먹히는 건가?”
“그러겠지. 하켄 공작령엔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아차! 잊고 있었다!’
『전능의 팔찌』 2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