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76화 (676/1,307)

# 676

1장 로이어 영지의 위기

“이런 바보같이!”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켄 공작이 로이어 백작령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간 어찌 되어가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종자 개량 작업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혼자서 조용히 자작하던 현수가 벌떡 일어나자 죠지아 레인스 남작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묻는다.

“아, 아닐세. 난 이만 가네. 자네들은 더 마시고 오게.”

“네에?”

남작과 휘하 기사들이 앉은 테이블에는 이제 막 음식과 술이 나왔다. 아직 한 모금도 못 마신 상황이다.

그런데 보호해야 할 대상이 간다고 하니 황당하면서도 당황스런 것이다.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나와서 그러네. 곧장 농장으로 갈 테니 자네들은 나온 음식 다 먹고 천천히 오게. 주인장! 주인장! 여기 주인장 없나?”

현수의 거듭된 부름에 주인이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황급히 달려온다.

“네, 귀족 나리.”

“여기 음식 값이네. 이거면 되는가?”

현수가 건넨 것은 1골드짜리 금화이다.

“아이고, 그럼요. 다 치르고도 남습니다요.”

“그래? 그럼 이 친구들에게 음식과 술을 더 주게.”

“네? 아, 알겠습니다요.”

주인이 허리를 꺾을 때 현수는 바람처럼 밖으로 나간다.

“배, 백작님!”

남작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부른다.

“난 괜찮으니 그거 다 먹고 오게. 그럼 먼저 가네.”

현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곧장 농장 쪽으로 뛰어갔다.

뒤따라 문을 열고 나선 죠지아 레인스 남작은 현수가 농장 쪽으로 향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외길이니 농장으로 간다는 말이 사실로 들린 것이다.

한편, 주점에서 볼 수 없는 곳에 당도한 현수는 아공간에서 좌표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페이지를 넘겨 로이어 영지 좌표를 확인했다. 그런데 로이어 영주성이 아닌 그 아래 좌표를 읽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좌표를 써넣느라 너무 촘촘해서 일어난 일이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지만 이런 현상을 주목한 시선은 하나도 없다.

* * *

“여긴가, 로이어 영지가?”

첫인상은 왠지 친숙하다는 느낌이다. 전능의 팔찌를 얻었던 덕항산 어느 능선에 서 있는 기분이 든 것이다.

시선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태백산맥의 한복판처럼 첩첩산중 한가운데 있는 듯하다.

“농사지을 형편이 안 된다더니 정말 그렇군.”

대한민국은 전 국토의 64%가 산지이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어느 곳에서든 높고, 낮은 산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로이어 영지는 대한민국보다 더한 듯싶다.

영지 면적의 90% 이상이 산지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산이 웬만해선 오르기도 힘들 정도로 산세가 험하다.

숲도 울창해서 사람들이 드나들기 힘들 듯싶다.

이렇듯 농사짓는 면적이 얼마 되지 않으니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다는 말이 맞다. 가이아 신전에서 개량된 종자를 가져다 심어도 그럴 것이다.

“와이드 센스!”

감각의 지평을 열어보니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

아드리안 공국의 나이젤 산맥은 몬스터가 많아 우글우글 산맥이라 불렸다.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많다.

인구에 비해 농지는 좁고 몬스터가 많으면 살기 힘들다.

일찌감치 상업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한탄이 절로 나올 척박한 땅이다.

“흐음, 근데 영주성은 대체 어디에 있지? 이런 첩첩산중에 있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찾아보자. 플라이!”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는 한참을 찾았지만 사람 사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그 좌표는 어딜 찾아놓은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 이동하자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몬스터들의 서식지로부터 다소 멀리 떨어진 곳이다.

허름한 목책으로 다가가니 누군가 소리친다.

“누구냐!”

“지나가던 길손이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는가?”

명백한 반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의 음성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혹시… 귀족이십니까?”

“그렇다. 물을 말이 있다.”

“헛!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삐이꺽―!

목책의 일부분이 열리자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볼품없는 사내가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을 들고 서 있다.

5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뼈다귀 위에 간신히 가죽만 입혀놓은 듯 삐쩍 말라 있다.

“드, 들어오십시오.”

“허험, 그러지.”

목책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약 20∼30여 호가 모여 사는 화전민 부락인 듯싶다.

“촌장은 어디에 있나?”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요.”

후다닥 달려간 사내가 6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을 부축하며 온다. 그런데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리는 모습이다.

“아이고, 귀족 나리가 오신 줄도 모르고 이놈이 안에만 있었습니다요. 어서 오십시오. 죄송합니다요.”

현수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무너지듯 엎드리며 한 말이다.

“일어나라.”

“네, 나리!”

촌장의 곁에 함께 엎드려 있던 사내가 조심스레 촌장을 일으킨다.

이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살 썩는 냄새가 풍긴다.

“조심, 조심! 으윽! 으으으윽!”

50대 사내가 조심한다고 했지만 촌장의 상처를 건드린 듯 나직한 신음을 토한다.

“다리가 아픈가?”

“네? 아, 네. 이놈이 조심성이 없어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그만 비탈에서 구르는 바람에 다리를 조금 다쳤습니다요.”

“흐음, 그래? 옷을 걷어 올려 보게.”

“네? 아, 네에. 그, 그러지요.”

촌장이 다 떨어져 해지기 일보 직전인 바지를 걷자 복합 골절되어 뼈가 살을 뚫고 나온 상처가 보인다.

며칠 지났는지 상처 주위가 심하게 곪아 있다.

“으으음!”

현수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촌장이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요.”

촌장은 계속 고개를 조아렸고, 곁에 있던 마른 사내는 불안한 듯 눈동자가 심하게 움직인다.

“아니네.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 어찌 견뎠나?”

“그게, 너무 아프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궁벽한 산골이다.

제대로 된 약이나 의료 시설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이렇게 되도록 신음만 했을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 종일 햇볕을 받으며 평생 일만 한 듯싶다.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색과 거친 손마디가 그 증거이다.

지금 급한 건 로이어 영지를 찾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냥 버려두고 갈 수는 없다.

이곳을 다시 찾을 계획은 없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죽을 것이다. 못 보았다면 그냥 갈 수 있지만 눈에 뜨인 이상 그럴 수 없다.

“흐음,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과산화수소수이다. 이런 상처엔 포비돈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지만 다음 과정 때문이다.

“이걸 상처에 뿌려 소독할 것이니 조금만 참게.”

“네? 소독이요? 아, 네에. 알겠습니다요.”

촌장은 몹시 불안한 시선이다.

현수가 마법사라는 걸 눈치챈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처 부위에 과산화수소를 뿌렸다. 즉시 허연 거품이 인다.

통증이 느껴지는지 촌장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발을 빼거나 그러진 않았다.

마법사에게 잘못 보이는 것보다는 나은 탓이다.

“흐음, 어디 보세. 아공간 오픈!”

이번에 꺼내 든 것은 의료용 면봉이다. 조심스럽게 고름을 면봉에 묻혀냈다. 처치를 끝낸 후 촌장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퍼랠러시스(Paralysis)!”

마비 마법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 후 메스1)를 꺼냈다. 그리곤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절개했다.

누런 고름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지만 촌장과 사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마법사의 비위를 거스르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래전 이 마을에 들렀던 어떤 못된 마법사 때문이다. 음식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시중들어 주던 아낙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켰던 것이다.

현수는 세심히 살피며 이미 괴사한 조직들을 도려냈다. 이런 상태에서는 컴플리트 힐도 제대로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많은 양의 선혈이 흘러나왔으나 지혈하진 않았다.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자, 이제부턴 뼈를 맞출 것이네. 통증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참아내게.”

“네? 아, 알겠습니다요.”

촌장의 고개가 끄덕여지던 그때 촌장의 발을 잡아당겼다. 피부를 뚫고 나왔던 허연 뼈가 안으로 들어간다.

마비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면 절로 비명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현수는 수시로 더듬어 보며 조심스레 뼈를 맞췄다.

“……!”

얼마나 긴장했는지 촌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곁에 있던 사내도 마찬가지이다.

“흐음, 이제 괜찮은 듯싶군. 아공간 오픈!”

뼈를 맞추곤 아공간에서 회복 포션 한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상처에 뿌리자 천천히 아물기 시작한다.

잠시 상태를 살펴보곤 입술을 달싹였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상처로 마나가 스며들자 아무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다.

아공간에서 상처를 보호하기 위한 붕대를 꺼내려던 현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훨씬 말끔하게 상처가 아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요. 정말 고맙습니다요.”

촌장은 괴사된 조직을 도려내고 뼈를 맞추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상처가 아물 때도 마찬가지이다.

현수가 모든 치료를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물을 말이 있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소인이 아는 거라면 무엇이든…….”

“이곳은 로이어 영지인가?”

“네? 아, 아닙니다. 여긴 하켄 공작령입니다요.”

“그래? 그럼 로이어 영지는 어디에 있지?”

현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촌장은 지금껏 현수가 온 방향의 반대쪽을 가리킨다.

“저기 저쪽의 산 보이시지요? 그 산을 넘어가면 거기부터가 로이어 영지입니다요.”

“그래? 그럼 로이어 영주성은 어디에 있나?”

“네? 그건 소인이 잘……. 죄송합니다요. 소인은 이 마을에서 나서 자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요. 하여 로이어 영주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다.”

더 캐물어도 나올 것이 없기에 현수는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오두막 저쪽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

이 마을의 아이들이다. 하나같이 꾀죄죄하다.

그리고 몹시 말라 있다.

“식량이 충분하지 못한가?”

“네? 아, 네. 올해 농사가 흉작이라 곡식을 충분하게 수확하지 못했습니다요.”

“얼마나 부족한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간신히 견뎌낼 것 같습니다요.”

“흐음, 그래?”

현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보아하니 이 마을엔 젊은 층이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연령별 인구 분포가 모래시계 모양인 듯하다.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나?”

“사냥을 한다고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요.”

“사냥? 이 근처에 짐승이 있나?”

“네, 가끔 사슴이 보입니다요.”

“그래? 그럼 산에 사슴만 있나?”

“아이고, 아닙니다. 늑대도 있습니다요.”

“그럼 사냥은 잘되는가?”

“그게… 사실은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요. 저희가 가진 사냥 도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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