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78화 (678/1,307)

# 678

2장 변태 마법사 리히스턴

하켄 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컨디션 조절을 한다. 반면 로이어 영지군은 밤낮으로 긴장해 있어야 한다.

그 상태로 두 달이 지난 후 하켄 군의 대대적인 공성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날 로이어 영지군은 ‘지리멸렬이란 이런 것이다’를 처절하게 보여주게 된다.

세 배가 넘는 병사 수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는 로이어 영지군을 제압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주와 소영주는 목숨을 잃고 생포된 병사와 기사들은 노예로 전락한다. 이레나 상단의 모든 이권은 하켄 공작이 가져가며, 영지민은 하켄 영지의 농노가 된다.

타 영지를 공격하여 영지민을 농노로 삼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하켄 공작은 이를 무시할 수 있는 권력자이다.

그렇기에 이런 작전을 짠 것이다.

물론 현수가 없을 때 일어날 일이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서서 중갑보병이 쇄도하는 것을 지켜보던 현수는 C급 용병 차림으로 의복을 갈아입은 뒤 슬그머니 하켄 공작이 고용한 용병들 속에 끼어들었다.

“짜식들, 지금쯤이면 식겁해서 쫄아 있겠지?”

“크크, 당연하지. 우리가 누구야? 기사 잡는 중갑보병이잖아. 크크, 우리 숫자가 너무 많아 완전히 쫄았을 거야.”

현수는 계속해서 중갑보병들 간에 주고받는 대화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그 결과 간세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놈인지 참…….”

로이어 영지의 인물 중 누군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슬쩍 화가 난다.

에델만 백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곧 장인이 될 사람이다.

장인을 영어로 표현하면 Father―in―law이다. 법률적으로는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족을 배반한 자가 상층부에 있다.

이레나 상단은 부를 추구하는 상단이기는 하지만 평판이 나쁘지 않다. 매점매석이나 고리대금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이익을 취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늘 정당한 상거래로 적정한 이윤을 취했기에 지금껏 성장했고, 버텨왔으며,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이런 체계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아주 잘 정립되어 있다. 사실은 이 이유 때문에 하켄 공작이 더 집착하는 것이다.

수뇌부가 바뀌어도 이레나 상단은 별 탈 없이 굴러가도록 조직되어 있다는 뜻이다.

지구에 비하면 마법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분야가 후진적이다. 하지만 이레나 상단은 아니다. 지구의 잘나가는 회사와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된 조직이다.

어쨌거나 내부에 배반자가 있다. 그가 누군지는 확인해야겠기에 하켄 공작군 사이를 누비며 첩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하켄 공작이 어떤 작전으로 이번 영지전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성 안에 숨어서 수성전을 펼칠 게 아니라 한시바삐 중갑보병과 용병들을 물리치고 영지를 헤집고 다니는 하켄 공작군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모르니까 성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대강의 작전을 파악했지만 현수는 로이어 영주성으로 갈 수 없었다. 아직 배반자를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다.

부지런히 중갑보병들 사이를 누볐지만 이들은 명령을 받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다. 하여 그게 누군가를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낡은 로브를 걸친 50대 중반의 마법사를 보게 되었다. 네 개의 마나 링이 완전한 걸 보니 4서클 마스터에서 이제 곧 5서클로 넘어가려는 자이다.

“이봐, 용병!”

“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리 가까이 와봐.”

“그러죠.”

현수는 C급 용병처럼 어슬렁거리며 다가섰다.

“흐음! 1서클이군. 몇 급인가?”

마법사는 현수의 심장 부위에 존재하는 휴먼 하트를 하나의 고리로 인식한 모양이다.

“네? 아, 네. C급입니다.”

“이름은?”

“하인스라 합니다.”

“그래? 너는 오늘부터 내 보좌를 하게.”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부터 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라고.”

“저어… 저는 전투용병인데요.”

현수의 대꾸에 시답지 않은 녀석이라는 표정이다.

“알아! 하지만 지금부턴 날 따라다녀라. 너는 고용된 용병이고 나는 여기서 가장 상급자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좋아, 저걸 들고 따라와라.”

마법사가 가리킨 것은 커다란 가방이다.

4서클 마법사는 아공간 마법을 쓸 능력이 없다.

그리고 공간 확장 마법이 인챈트된 마법 가방은 비싸서 웬만한 사람들은 갖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소지품을 담아갖고 다니는 모양이다.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자 그 모습을 주시한다. 제법 무거운 가방이니 잘 들고 따라올지 가늠한 것이다.

거뜬히 들어 올리자 두말 않고 어딘가로 향한다.

현수는 그 뒤를 따라갔다. 가장 상급자라니 누구로부터 성 내의 첩보가 흘러드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을 쫓아다녔다. 첩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답답했지만 참고 견뎌냈다. 발본색원하지 못하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흘째 되는 날에도 여느 날처럼 4서클 마법사의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했다. 별별 허접한 심부름을 다 시켰지만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과 달리 경계하는 마음이 누그러진 듯하다.

“너는 여기서 대기해라!”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따로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흘깃 바라보니 탁자 비슷한 것이 있고 통신용 수정구가 올려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수정구에 대고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장거리 통신을 위한 룬어를 영창하는 중이다.

파아앗―!

어느 순간 수정구에서 파란 빛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곤 이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수정구에 흐릿하지만 사람의 영상이 보인다는 것뿐이다.

“라르센 남작, 보고하시오.”

“반갑습니다, 리히스턴 자작님. 이쪽 상황을 보고하자면 현재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은 있소?”

“아닙니다. 현재 수성전 준비만 하는 중입니다.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소?”

“설사 나가라 해도 제가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염려 푹 놓으시고 편안히 쉬셔도 됩니다.”

“알았소. 참, 내일부터 우물에 그걸 푸시오.”

“그렇지 않아도 준비 다 해놓았습니다. 내일 점심나절부터 매일 조금씩 넣겠습니다.”

“지금부턴 라르센 남작의 활약이 매우 중요하오.”

“압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에 이야기된 대로 일을 진행시킬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알았소. 다음 통신은 이틀 후 이 시각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뵙죠.”

라르센 남작의 말이 끝나자 리히스턴 자작이라 불린 자가 수정구에서 손을 뗀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같은 시각, 현수는 20보쯤 떨어진 바위에 앉아 있다. 그 상태에서 엿듣기 마법으로 통신 내용을 들은 것이다.

“하인스!”

천막을 나서면서 현수를 부르던 마법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현수를 보곤 말문을 닫는다.

방금 전의 통신 내용을 들었을까 싶어 확인하려 했는데 이 정도 거리면 못 들었을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다.

“부르셨습니까?”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리히스턴 자작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투덜거린다.

하켄 공작은 휘하 마법사들까지 총동원하여 영지민 사냥에 나섰다. 하여 시중들어 줄 보조 마법사가 없었던 것에 대한 투덜거림이다.

통신용 마법수정구의 통신 거리는 마법사의 서클과 관련이 있다.

2서클 이하는 사용 불능이다.

따라서 최소 3서클은 되어야 마법 수정구를 쓸 수 있다.

4서클이 넘으면 그때부터 장거리 통신이 가능해지는데 서클 수가 올라갈수록 더 길어진다.

공작은 휘하 기사와 병사를 총동원하여 로이어 영지를 훑는 중이다. 그런데 영지 크기가 커서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통신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리히스턴 자작을 파견한 것이다.

아무튼 자작의 뒤를 따라가니 제법 규모가 큰 천막이 나타난다. 곁에는 작은 천막 세 개가 쳐져 있다.

“들어가자.”

“네.”

천막 안에 발을 들여놓으니 22∼23세 정도 된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메리, 춥고 배고프다. 따끈한 음식을 가져와라.”

“네, 자작님.”

메리라는 아가씨가 나가자 턱으로 가방을 내려놓으라는 제스처(gesture)를 취한다.

“하인스, 너는 밖에 나가 내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라.”

“네, 알겠습니다.”

현수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가 음식을 차려서 들어간다.

전장이지만 주방이라도 옮겨왔는지 먹음직한 스테이크와 따끈따끈한 스튜, 그리고 술 한 병을 들고 있다.

잠시 후, 짐승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메리는 자작을 위한 잠자리 시녀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난 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의복을 정리하며 메리가 나선다. 이런 일이 다반사였는지 부끄럽다든지 수치스럽다는 표정은 아니다.

“따라오세요.”

“나?”

“네, 자작님이 배고플 테니 스튜를 주라 하시네요.”

“……!”

현수는 흘깃 자작의 천막을 바라보았다.

자작은 빼빼 마른 몸이다.

눈초리가 날카로워 신경질적으로 생겼다. 그런데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이상스러웠던 것이다.

메리를 따라 작은 천막으로 들어갔다. 임시 주방인 듯 자그마한 아궁이가 갖춰져 있다.

메리가 스튜를 떠서 건넨다. 다소 지친 듯한 표정이다.

“드세요.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하시구요.”

“고마워. 근데 조금 지쳐 보이네.”

“네, 조금 힘들어요. 그래도 좋은 분이세요, 자작님은.”

이마에 솟은 진땀을 소매로 닦아낸 메리는 아궁이 곁 장작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어디 가서 말은 못하지만 리히스턴 자작은 변태이다.

때리는 것은 아니다. 심하게 깨물 뿐이다.

그렇기에 한 번 상대하고 나면 온몸에 이빨 자국이 난다. 다음 날이 되면 시퍼렇게 멍들 정도이다.

그럴 때마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신음이나 비명을 내면 안 된다. 고통을 참아내는 리얼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한다.

리히스턴 자작은 남들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는 변태인 것이다.

조금 전에도 수십 번이나 깨물렸다. 사나흘에 한 번은 당하는 일이지만 참기 힘든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하여 상당량의 진땀을 흘렸다.

이러고 나면 전신의 맥이 탁 풀린다. 고통을 참느라 너무 힘을 줘서 기운이 쏙 빠진 때문이다.

노인네 냄새나는 나이 많은 늙은이에게 당하는 것도 치욕스러운데 고통까지 견뎌내야 하니 도망이라고 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그랬다간 하켄 공작령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이 어떤 꼴을 당할지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당할 때마다 받는 50실버는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휴우우!”

메리가 긴 한숨을 내쉰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름이 메리라고?”

“네.”

“집은 어디야?”

“하켄 공작령 나젤 영지에 있는 콘카트 마을이에요.”

“나이는 몇 살이야?”

현수의 물음에 시선을 준다. 이 작자가 지금 나를 꾀려고 하나 하는 눈빛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