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0
그러고도 돈이 없으면 비싼 마법시약들을 무슨 재주로 사겠는가! 따라서 경제도 필수이다.
다음은 지리와 지구과학이다. 워프나 텔레포트 같은 마법을 익히기 위한 기본이다.
미술은 마법진 그리기에 필수이다. 그런데 평범한 미술이 아니라 정밀 설계와 맞먹을 정교함이 요구되는 미술이다.
이렇듯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야 마법사가 된다.
리히스턴은 당연히 그러하다. 그렇기에 뒤죽박죽 섞여 있는 서류 뭉치 속에서도 원하는 것을 단번에 찾아낸다.
“좌표, 여기 있습니다, 로드!”
리히스턴이 건넨 것을 살펴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멀지 않다 여긴 때문이다.
“수고했네.”
“감사하옵니다.”
“로드로서 자네에게 명을 내리겠네.”
“하명만 하시옵소서, 로드!”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엔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 우쭐댈 수 있는 신 나는 일이다.
선생님의 눈에 들지 않으면 시키기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리히스턴이 바로 그러하다. 매지션 로드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는 중이다.
그렇기에 다소 상기된 표정이다.
“공작군 모두 하켄 공작령으로 후퇴하도록 하라.”
“명을 받잡습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켄 공작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그 권력은 라이셔 제국 내에 국한된다.
반면 매지션 로드는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이다. 다시 말해 아르센 대륙 전체에 영향력이 발휘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제국의 황제 정도는 너끈히 갈아치울 수 있다. 마음에 안 들면 나라 하나쯤 멸망케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로드의 명이 우선이다.
군대로 치면 하켄은 하찮은 소대장이고 매지션 로드는 지엄하신 사단장이다.
소대장은 진격 명령을 내리고, 사단장은 후퇴를 명한다면 분대장은 어찌해야 하겠는가!
더 생각할 것도 없기에 즉시 명을 받은 것이다.
“리히스턴 자작, 아내는 몇이나 있나?”
“네? 잡자기 그건 왜……?”
이 대목에서 물을 말이 아니기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혹시 무슨 뜻이 있나 싶은 것이다.
“아내가 몇이나 있느냐고 물었네.”
“아, 아내는 아직…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메리와 결혼하게.”
“네?”
“결혼하거든 깨물지 말고.”
“……!”
리히스턴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창피를 느낀 것이다.
“처갓집 식구들도 잘 보살펴 주게.”
“……!”
리히스턴 자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다. 로드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가늠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테리안 왕국에 이실리프 령이 있네. 바세른 산맥 아래쪽이지. 하켄 공작령보다는 살기 나을 것이네.”
“……!”
3장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들이!
“메리와 결혼을 하면 오게.”
“로, 로드……!”
지금껏 대답 없던 리히스턴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는다. 이실리프 마탑으로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처갓집 식구도 다 데리고 와도 되네. 그래야 그곳에서 오래 살지 않겠나?”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로드!”
리히스턴 자작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일생의 영광이라 느낀 것이다.
“그런데 로이어에 심은 하켄 측 간세는 누구인가?”
“네? 아, 네에. 영지 수석기사 라르센 남작과 마법사 로네안입니다.”
“라르센 남작과 로네안? 로네안은 몇 서클이지?”
“4서클 비기너입니다.”
“흐음, 그래? 그 둘뿐인가?”
“제가 아는 인물은 그 둘뿐입니다. 그 밑에 누가 더 이쪽에 붙었는지는 모릅니다.”
리히스턴 자작의 말은 사실이다.
하켄 공작은 조만간 권력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나선 때문이다. 그러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실리프 마탑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부터 충성을 바칠 상대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매지션 로드인 마탑주이다.
거짓을 고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알겠네. 아무튼 로이어 영지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는 중지하도록 하게. 아울러 통신 가능한 하켄 영지군에 연락하여 로이어 영지민을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전하게.”
“알겠습니다, 로드!”
리히스턴 자작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궁금하다. 하여 고개를 들며 묻는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뭔가?”
“로이어 영지와 로드의 관계는 대체…….”
리히스턴 자작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로이어 영지는 내 처가이네.”
“네에? 아, 알겠습니다. 즈,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리히스턴 자작은 이번 작전의 입안자이다. 따라서 로이어 영지의 주요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을 꿰고 있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처가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은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이다.
라이셔 제국엔 두 송이 아름다운 꽃이 있다.
하나는 홀리 플라워(Holy flower)이다.
당연히 성녀 스테이시 아르웬을 지칭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골든 플라워(Golden flower)이다.
카이로시아가 상단에 몸담고 있어 이렇게 불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라이셔 제국을 떠나 멀고 먼 미판테 왕국에 있지만 카이로시아의 미모는 이곳까지 소문난 것이다.
어쨌거나 리히스턴 자작이 즉각 카이로시아를 떠올린 이유는 영주 일가 중 미혼은 그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당한 것에 분노한 하켄 공작은 전군을 이끌고 로이어 백작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때 리히스턴은 그걸 말렸다.
영지전이 벌어지면 많은 인명이 살상된다.
하켄 공작처럼 어느 한쪽이 분노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리히스턴은 평화주의자는 아니지만 무고한 인명이 살상당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여 무자비한 공격의 대체 방안으로 영지민을 데려다 농노로 쓰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하켄 공작 입장에선 에델만 백작 일가만 죽이면 된다. 그렇기에 리히스턴의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런 피해 없이 기사와 병사들을 훈련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아무튼 리히스턴의 제안이 없었다면 공작군은 지금쯤 헬 파이어 몇 방에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600개로 잘게 쪼개진 하켄 공작군은 현재 로이어 영지 곳곳을 누비고 있다.
이들에겐 거의 매일 파발을 주고받도록 명령이 내려져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로이어 영지군의 강력한 저항에 대비한 비상 연락망이 갖춰진 것이다.
리히스턴 자작은 그걸 이용하여 현 사태를 정지시켜 보려 하는 것이다.
“자네만 믿고 가네. 나중에 다시 보세.”
“네, 로드시여!”
리히스턴 자작이 깊숙이 고개를 숙일 때 현수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다.
나흘 전 공작이 있었던 곳으로 텔레포트한 것이다.
“메리! 메리!”
“네, 자작님.”
리히스턴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튀어 들어온 메리는 왜 불렀느냐는 표정이다.
또 깨물릴까 봐 몹시 불안한 듯 달달 떨고 있다.
“…나와 결혼해 주겠느냐?”
“네? 바, 방금 뭐, 뭐라 하셨습니까?”
“메리, 너와 결혼해서 살고 싶다.”
“……?”
“앞으론 깨물지 않겠다. 나와 결혼해 다오. 너와 네 부모 형제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우마.”
“자, 자작님……!”
“그동안 너를 함부로 대한 것 미안하다. 용서해라.”
“자, 자작님……!”
느닷없는 상황에 메리는 넋이 반쯤 나간 듯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천막 안으로 들어간 하인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메리는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었다.
혹시 리히스턴 자작이 마법으로 하인스를 해치고 자신마저 어쩌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이때 자작은 가방 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반지 하나를 꺼냈다.
오래전 연모했던 첫사랑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 주려고 준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여인은 하켄 공작의 애첩이 되어버렸다. 이번 사건의 빌미가 된 베르나르 빈셀 드 하켄이 그녀의 아들이다.
“메리, 이건 내 마음의 징표이다. 나와 결혼해 다오.”
“자, 자작님! 지, 진심이신 거예요?”
“그래. 내 나머지 인생을 너와 함께 보내고 싶구나.”
땡그랑―!
자작이 부르기에 얼떨결에 들고 들어왔던 프라이팬이 바닥에 떨어졌다.
리히스턴 자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반지를 내민 때문이다. 기사들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할 때의 모습이다.
“메리, 나와 결혼해 다오.”
리히스턴의 눈에는 어서 허락하라는 빛이 가득하다. 메리를 얻지 못하면 이실리프 령과는 끝이기 때문이다.
“조, 좋아요! 자작님과 결혼할게요.”
메리가 반지를 받아 들자 리히스턴 자작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일 때 이후 첫 웃음이다.
현수가 둘의 결혼을 권한 것은 메리가 임신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표 나지 않지만 임신 4개월은 되었다.
그냥 놔두면 미혼모인 메리와 애비 없는 아기가 어떤 고초를 겪을지 짐작되었기에 결혼을 권한 것이다.
* * *
“흐음, 여긴가?”
탁 트인 초지에 내려선 현수는 세심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많은 인원이 야영했음이 분명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발자국이 확인되자 곧장 방향 잡고 이동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머물렀는지라 몬스터의 기척은 없다.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방향을 가늠하곤 곧바로 뒤를 따랐다. 이동한 흔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여 쫓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흘 이상 시차가 있지만 공작군은 대규모 병력이 이동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쫓으면 금방 조우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서너 시간 정도 지나자 산등성이 너머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흐음, 저긴가?”
빠른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10㎞ 정도 떨어진 곳에 당도하는 데 불과 15분 걸렸다. 시속 40㎞이다.
이를 변환하면 100m 기록이 9초 이내이다.
100m 달리기의 세계 기록은 9.58초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된 IAAF World Championship에서 우사인 볼트가 세웠다.
이건 잘 정비된 트랙에서의 기록이다.
현수가 이동한 곳은 나무가 우거진 산속이다. 만일 평지였다면 채 5초도 되기 전에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현수가 당도한 곳은 화전민이 살던 마을이다.
목책은 부서져 있고 오두막들은 이미 잿더미이다. 현수가 본 것은 다 타고 난 뒤 가물가물 피어오른 연기이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지? 와이드 센스!”
샤라라라라랑―!
마나가 뿜어지며 주변의 상황을 속속들이 보고한다. 반경 100m 내엔 움직이는 생명체가 없다.
범위를 조금씩 넓혀 보았다. 100m 단위로 넓혔다. 200m, 300m, 400m가 되었을 때에도 반응이 없다.
500m가 조금 넘었을 때 세 개의 생명체가 탐지된다.
후다닥 달려갔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분명 셋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하여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자그마한 동굴 입구가 보인다. 돌로 입구를 교묘히 막아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런 건 몬스터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안에 있는 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와이드 센스 마법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