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1
“안에 사람 있습니까?”
“……!”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안에 세 명 있는 거 압니다. 대답하십시오.”
“……!”
여전히 대답이 없다. 대신 셋의 숨소리가 가늘어진다. 극도로 긴장한 때문인 듯싶다.
“하켄 공작의 군사들은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나와도 됩니다.”
“……!”
“계속 그 안에 있다가 굶어 죽을 겁니까? 안전하니 나오세요.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갑니다.”
말을 하며 입구를 막은 돌을 툭툭 찼다. 그리 견고하진 못한 듯 위쪽의 돌이 흔들린다.
“나, 나갑니다. 제, 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세요.”
“……?”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입구를 막았던 돌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젊은 사내와 젊은 여자,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듯한 아이이다. 사내와 여인 모두 서른쯤 되어 보이고 아이는 열 살쯤 된 듯싶다.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보다시피 아내는 임신 중이고 아이는 아직 어립니다요.”
그러고 보니 꾀죄죄한 여인의 아랫배가 불룩 나와 있다. 임신이 분명하다.
“저 앞쪽 마을 사람입니까?”
“네? 아, 네. 그, 그렇습니다요.”
“저 마을은 모든 집이 불탔고 사람은 하나도 없더군요. 무슨 일입니까?”
“모두 불타고 아무도 없다고요?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흐흑! 나쁜 놈들이… 나쁜 놈들이… 흐흐흑!”
털썩 주저앉은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곁의 여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소리 없이 솟는다.
잠시 진정하도록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사내가 왜 숨어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사내는 이 마을 토박이이고 부인은 인근 마을 사람이다.
출산을 앞두고 친정 부모를 보고 싶다 하여 그곳을 방문하러 갔다. 농한기인 지금이 아니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처가에 당도할 즈음 수많은 병사가 마을을 에워싸는 중이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셋은 곧바로 몸을 숨겼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이다.
잠시 후, 마을 사람 전부 죽임을 당했다. 모든 양식과 재물은 약탈당했고, 젊은 여자들은 능욕당한 후 죽었다.
사내들은 모두 목이 베어졌으며, 시신은 마차에 실어 계곡 아래로 던져 버렸다. 다음은 방화이다.
처가가 있던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본 사내는 얼른 도망쳤다. 그리곤 자신의 집으로 오던 중 일단의 병사를 보게 되었다. 얼른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마을 인근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리곤 병사들이 수색을 하더라도 찾을 수 없게 입구를 교묘히 위장했다.
사내의 바람처럼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들은 이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만 하루가 지났다.
사내는 궁금했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자칫 가족 모두 죽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현수가 온 것이다.
“흐흑! 흐흐흐흑!”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마을 뒤쪽으로 향한다.
예상대로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다. 피 냄새가 나니 조만간 몬스터들이 한바탕 잔치를 할 것이다.
안력을 높여보니 사내의 말대로 여자들은 전부 능욕을 당했다. 사내들은 모조리 목이 베어진 상태이다.
“으으음!”
너무도 처참한 모습에 낮은 침음을 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병사들이 이런 겁니까?”
“흐흑! 네. 병사들이 여자들을 겁탈하고, 남자는 죽이고, 집엔 불을 질렀습니다. 흐흑!”
사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려간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려는 듯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서 내려갔다.
“흐흑! 아버지, 아버지……!”
노인의 잘린 목을 든 사내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현수는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시신을 내버려 두면 몬스터들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디그! 디그! 디그!”
금방 무덤 자리가 만들어진다.
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같은 구덩이에 안장했다. 그리곤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차례대로 운반했다.
구덩이가 작지 않았기에 가족 단위로 시신을 안치했다.
“빅 핸드!”
현수는 마법으로 흙을 부어 무덤을 조성했다. 짐승들이 파헤칠 수 없도록 인근의 흙까지 퍼부었다.
“여기선 살 수 없을 것이니 로이어 영지로 가게.”
“흐흑! 네, 고맙습니다. 흐흑! 정말 고맙습니다.”
사내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아내와 아들을 데려오게.”
“흐흑! 네에.”
잠시 후 일가족 셋이 현수 앞에 선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게.”
“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는 셋을 리히스턴 자작에게 맡겼다. 하켄 공작군과 함께 있는 것을 지극히 꺼려 했지만 어쩌겠는가!
“잘 보살펴 주게.”
“네, 로드시여! 걱정 마십시오.”
다시 텔레포트해서 조금 전의 마을로 되돌아온 현수는 빠른 걸음으로 하켄 공작군의 흔적을 따랐다.
가는 동안 두 개의 마을이 더 초토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시신 또한 모두 매장되었다.
시간도 없고 누가 누구의 가족인지 알 수 없어 한 구덩이에 모두 넣고 덮어버렸다.
“이런 나쁜 놈들!”
시신 중에는 열두어 살쯤 된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확인해 보니 모두 겁탈당한 흔적이 남아 있다.
분노한 현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날 무렵 드디어 하켄 공작군의 후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 다른 마을을 에워싸는 중이다.
“크흐흐! 먼저 간 놈들, 지금쯤 신났겠지?”
“그렇겠지! 그나저나 다음 마을에도 계집들이 많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그렇지.”
아르센 대륙은 성비가 대등하지 않다.
몬스터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가 죽은 사내도 많고, 영지전이나 국가 간의 전쟁 때문에 희생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것이다.
아르센 대륙은 어느 마을을 가든 여자의 수가 남자보다 월등히 많다. 대부분 3:1∼4:1 정도인데 심한 곳은 10:1인 곳도 있다.
화전민들이 사는 마을은 규모가 작은 곳도 있지만 제법 큰 곳도 있다.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 마을은 1,000명 정도 되는 큰 곳이라 하였다.
이럴 경우 대개 노인 100명, 아이 200명, 그리고 남자 150명에 여자 550명 정도 된다.
산속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선발대의 숫자는 5,000명이다. 여자 하나당 병사 열 명 정도가 달려드는 상황인 것이다.
선발대가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면 아이와 노인, 그리고 사내들을 먼저 죽인다. 그러는 동안 약탈과 방화, 그리고 집단 겁탈이 벌어진다.
후발대는 이들이 저질러 놓은 흔적을 지우는 역할을 맡는다. 시신은 적당한 곳에 내던지고 약탈한 것들은 챙겨둔다.
다음은 임무 교대이다. 선발대 중 일부 인원은 약탈한 물품을 지시받은 곳까지 운반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는 동안 파악하지 못한 마을이 있는지를 살핀다.
이때 후발대였던 자들은 다른 마을을 섬멸하는 일을 맡는다. 지난 며칠간 이렇게 해서 없앤 화전민 마을의 숫자만 열아홉이다.
오늘까지 포함하면 5,000명 정도가 희생당했다.
베르나르 빈셀 드 하켄이라는 개만도 못한 종자가 매 맞고 문신 새겨진 것에 비하면 너무나 과한 처사이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불만은 없다. 욕구도 충족시키고 파괴 본능도 적절히 누려 보며 생기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 다음은 우리 차례지?”
“그래! 이번엔 우리 조가 먼저이네. 모가지 따는 맛은 없지만 먼저 시식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안 그래?”
“그럼, 그럼! 크흐흐! 기대된다.”
조금 더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상황은 이미 벌어진 듯하다. 하여 마을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였다.
그렇게 10분쯤 이동하자 불타는 목책이 보인다.
이미 상황이 종료된 듯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여기저기 피 흘리며 쓰러진 시신이 보인다.
대부분 목이 베어져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사내이다.
오두막마다 길게 늘어선 줄과 맞닿아 있다.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하켄 공작군이다.
뭐하나 싶어 살펴보니 너무 많은 사내에게 능욕당해 빈사지경에 처한 여인들이 마치 헝겊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낄낄대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여인들이 겪는 고통 따윈 아랑곳 않는 태도이다.
문득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놈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인다.
11살 아이부터 30대까지 약 16만 명이다. 이들은 하루 평균 20∼30명, 많게는 60명의 군인을 상대했다고 증언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결코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는 듯 진저리를 치던 할머니들이 떠오른 것이다.
분노한 현수가 나서며 소리친다.
“모두 멈춰라!”
큰 소리를 냈건만 병사들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
“뭐야, 저건? 얌마, 하고 싶으면 줄을 서!”
“너, 그러다 새치기하면 죽는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며 노려본다.
“모두 멈추라고 했다! 하켄은 어디에 있느냐?”
“저런 미친놈을 봤나. 어디서 감히 하늘 같은 공작님을 함부로 불러? 뒈지려고 작정했냐?”
“얌마! 너 미쳤지? 지금 우리까지 물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엉? 암만 그래도 소용없어. 맨 끝에 가서 줄 서!”
병사들이 와락 화를 낸다. 얕은 수를 부려 먼저 재미 보려 한다고 느낀 때문이다.
현수의 눈에 뜨인 병사들은 모두 허리춤을 풀어놓고 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즉시 덮치려는 의도이다.
“야, 누가 저 새끼 좀 조져! 줄도 안 서고 어디서 감히!”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다. 조선에서 끌고 간 위안부를 괴롭히던 일본군과 겹쳐 보였다.
그 즉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분노가 솟아난다.
“파이어 스톰!”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청난 불의 폭풍이 분다.
공작의 병사들이 모여 있던 곳을 기준으로 엄청난 열기가 뻗어 나간 것이다.
“아아아! 아아악! 아아악! 아악!”
마법 구현이 시작된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살이 익고 숯덩이가 된다.
순식간에 초고온에 노출된 결과이다.
“……!”
새빨간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병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10초 정도 버둥댈 뿐이다. 그리곤 그들의 시신을 능욕이라도 하겠다는 듯 불길이 피어오른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 대한 처벌이다.
멀찌감치 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병사들은 굳어버린 듯 멈춰있다. 그런 그들의 뇌리로 아르센 대륙을 강타한 소문 하나가 떠오른다.
세상에 이런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는 바세른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뿐이다.
라세안에 관한 소문은 번지지 않았다. 이곳 역시 1등만 기억하는 곳이기에 2인자는 소문조차 나지 않은 것이다.
어쨌거나 마탑주는 9서클 마스터이다.
그의 눈 밖에 나면 중간계의 조율자라 하는 드래곤이라도 작살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현수가 헬 파이어가 아닌 7서클 마법 파이어 스톰을 쓴 이유는 마법의 구현 범위를 좁게 가져가려 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