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6
“네에?”
황제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 새파랗게 젊은이에게 공작더러 먼저 인사를 하라고 한 때문이다. 게다가 ‘이 청년’, 또는 ‘이자’라 칭하지 않고 ‘이분’이라고 했다.
제국의 황제가 할 말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불콰하다. 술이 취했다는 뜻이다.
하여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데 아트만 시종장이 먼저 입을 연다.
“두 분 공작님, 그리고 마탑주님, 이분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시며 그랜드 마스터이십니다. 인사하십시오.”
“네? 그, 그랜드 마스터요?”
“네에? 매, 매, 매지션 로드시라구요?”
“뭐, 뭐라고요? 그, 그랜드 마스터에 매지션 로드라구요?”
셋 모두 대경실색하는 표정이다. 셋 중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아렌드이다.
쿵―!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이신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옵니다. 소인은 혈운의 마탑주인 홀리오 아렌드 판 유세입니다.”
아렌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공작이 의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오른손을 왼 가슴에 얹고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쿵, 쿵―!
“닐센 도널드 반 프리쉐가 그랜드 마스터를 뵙습니다.”
“하프만 돌첸 폰 쿠마렌이 그랜드 마스터님을 뵙습니다.”
“세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일어서세요.”
“네, 로드!”
“네.”
“명을 받듭니다.”
셋은 조금 전과 달리 매우 공손한 표정이다. 어전에서 술판을 벌인 일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 상태이다.
술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상황이 빚어져 있어도 된다.
매지션 로드는…….
그랜드 마스터는…….
각각 제국의 황제와 동등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 다란다. 따라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자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이거 맛이 기막힙니다.”
황제는 공작 둘과 마탑주 때문에 잠시 분위기가 쌩해진 것을 서둘러 무마하려는 듯 평소 하지 않던 말을 한다.
현수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쌈을 싸서 셋에게 주었다.
모두의 배가 부를 즈음 현수가 아렌드에게 물었다.
“혈운의 마탑엔 마법사들이 얼마나 있나?”
“7서클은 저 혼자이고, 6서클 셋에 5서클은 열둘, 4서클 89명, 3서클 223명, 그리고 2서클은 517명이 있습니다.”
“총원 844명이군.”
“네, 언제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실상 마탑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다. 1서클은 아예 마법사로 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탑엔 마법사들의 시중을 드는 노예나 하인도 많기 때문이다.
“흐음, 이걸 한번 보게.”
현수가 꺼내 보여준 것은 항온마법진이 그려진 스테인리스 철판이다. 아직 마나석은 박히지 않은 것이다.
“이 마법진은 처음 보는군요. 무엇입니까?”
“항온마법진이네.”
“항온이라 하심은……. 아, 이게 그거군요.”
아렌드는 안력을 높여 마법진을 살핀다. 호기심 많은 마법사 본연의 모습이다.
“잘 안 보이나? 인라지! 인라지! 인라지! 인라지!”
가로세로 10㎝였던 마법진이 단숨에 1.6m로 커진다. 그러자 중첩된 것으로 보이던 것들의 경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공간마다 룬어들이 채워져 있음이 보인다.
“아! 잘 보입니다. 잘 보여요.”
아렌드는 정신없이 마법진의 회로를 살핀다. 항온마법진의 쓰임새는 이곳에서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 마법진을 줄 테니 구멍에 마나석을 박아주게. 마법진을 매일 접하다 보면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을 것이니.”
혈운의 마탑은 마법진에 약하다. 인챈트 마법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있어도 서클 수가 낮아서 이런 마법진은 접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아렌드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얼마든지 주십시오. 주시는 대로 마나석을 박아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양이 좀 많네.”
“그렇습니까? 얼마나 많으신데요?”
“일단은 1억 장이네. 추후 더 필요할 수도 있고.”
“네에? 1억 장이나요?”
대체 그 많은 마법진을 어디에 쓰려느냐는 표정이다.
“용처는 묻지 말게. 아무튼 1억 장 가능하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주시기만 하면 곧바로 작업하겠습니다.”
아렌드가 무조건 허락한 이유는 마법진에 관한 연구를 보다 활발히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네. 조만간 마법진이 새겨진 철판을 더 가져다주지. 우선은 이것을 받게.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서 대략 1,000만 장에 달하는 철판을 꺼냈다.
아렌드는 소중한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받아 챙긴다.
“가급적 빨리 작업해 주게. 그리고 혈운의 마탑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조만간 한번 방문하겠네.”
“아이고, 그러믄입쇼. 만사 제쳐놓겠습니다.”
“고맙군.”
“아닙니다, 로드. 당연한 일입니다.”
아렌드가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참! 이건 마나석이네.”
아공간에 있던 마나석이 담긴 자루를 꺼내놓았다.
본시 최하급이었지만 마나 집적진에 오래도록 놔두어 하급 내지는 중급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아렌드는 조심스레 자루를 받아 열어본다.
“이건……?”
아렌드가 자루에서 꺼낸 것은 큼지막한 수정 원석이다. 마트 보석코너에 장식용으로 있던 것이다.
“아! 그건…….”
현수가 뭐라 말하려 할 때 아렌드가 먼저 입을 연다.
“로드, 이건 유사 마나석 아닙니까?”
“유사 마나석? 여기선 그렇게 부르나?”
“네, 공갈 마나석, 또는 사기 마나석이라고도 합니다. 생긴 건 마나석과 같은데 마나가 담겨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가? 그럼 이렇게 생긴 게 많은가?”
“아이고, 그럼요! 저희 마탑 뒤쪽에 가면 작은 동산만큼 쌓여 있지요. 마나석인 줄 알고 사람들이 가져온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현수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거 처치는 어떻게 하는가?”
“처치 곤란이라 그냥 쌓아두었습죠. 버려야 하는데 그럴 데가 마땅치 않은데다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요.”
“흐음, 알겠네. 조만간 마탑을 한번 방문하지.”
“아! 그래주시면 일생의 광영이지요. 조만간 그때가 오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로드.”
아렌드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진다. 로드가 마탑을 방문한다 함은 그 마탑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탑에 와서 한번 휘둘러보고 가진 않을 것이다.
마법사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질 것이고,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귀중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하여 하나라도 더 각성을 하면 마탑으로선 좋은 일이다. 그렇기에 대놓고 반색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아렌드를 일별하곤 두 공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분 공작님과도 조만간 검을 나누어 봅시다.”
“검사로서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기대되는군요. 그날을 위해 수련에 박차를 가하며 고대하겠습니다.”
둘 역시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련이 기대된다는 표정이다.
다시 술잔을 주고받는 동안 에델만 백작은 곧바로 공작으로 승작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공작 둘과 마탑주가 적극적으로 권한 결과이다.
하켄 공작령은 하켄 백작령으로 찌그러지며 영지의 3분 2를 에델만 공작가에 할양하게 된다.
대신 현수는 책임지고 에델만 공작가의 일원 중 하나를 소드 마스터로 키우기로 했다.
린센 자작과 페일 자작은 서로 에델만 공작가로 파견을 보내달라고 황제를 졸랐다. 속내는 뻔하다. 현수가 가르치는 것을 옆에서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수신호위를 맡을 정도로 신임이 깊었기에 둘 다 가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두 공작도 참관인 자격으로 방문을 청했다.
에델만 백작이 공작으로 승작하게 되면 성대한 파티가 열리게 된다. 이때 모두 초대받을 것이니 그러라고 했다.
황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좋다면서 계속 잔을 비웠다.
술자리가 파한 후 현수는 곧장 로이어 영지로 향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로드!”
“내가 지시한 대로 했는가?”
“네, 공작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물러나고 있습니다.”
리히스턴 자작은 얼른 고개를 숙인다.
“원상 복구는 해주었는가?”
“가능한 것은 다 하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스턴이 알아서 잘했을 것이란 믿음이 간 것이다.
“자넨 공작이 죽은 건 아는가?”
“아, 그랬습니까?”
“그래, 하켄 공작은 죽었네. 베르나르도 죽었지.”
“…그랬군요.”
리히스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하켄 공작이 죽었다는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갑보병들은 모두 철수시켰는가?”
“아닙니다. 아직은 현 위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퇴각하는 병사들과 같이 보내려 대기시켰습니다. 로이어 군과는 접촉한 바 없구요.”
“좋다, 이제 모두 철군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한데 저는……. 참, 메리에게 청혼했습니다. 영지에 당도하는 대로 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자신의 거취를 대답해 달라는 뜻일 것이다.
“잘했군. 결혼하면 로이어 영지로 와라. 이곳과 이실리프령 간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해 놓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리히스턴은 아주 오랜만에 환히 웃었다.
더 깊은 배움을 원했는데 그간은 하켄 공작과 아렌드 마탑주 간의 불화 때문에 이룰 수 없었다.
하켄 공작의 독선을 아렌드 마탑주가 도널드 공작과 더불어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혈운의 마탑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이실리프 마탑과의 인연이 맺어진 때문이다.
“올 때 처가 식구들도 데려오는 거 잊지 말게.”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리히스턴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자네와 뜻이 맞는 마법사들이 있다면 동행해도 좋다. 단, 그들에 대한 신원은 자네가 책임져야 하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리히스턴 자작이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아마도 많은 마법사가 따라오고 싶어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 함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하켄 공작가는 곧 백작가로 바뀔 것이다. 반면 에델만 백작가는 공작가로 승작될 것이고.”
“아……!”
“이제 자네가 할 일은 공작가의 기사 300중 200을 추려내는 일이다. 병사 20,000 중 10,000도 추리고.”
“네? 그게 무슨……?”
“라이셔 제국의 국법에 의하면 백작가는 100명의 기사와 10,000명의 병사만 보유할 수 있다.”
“맞습니다.”
“백작으로 강등되니 넘치는 인원은 국경수비대로 배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장인이 운영하는 영지 이웃에 강한 세력이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사라 하여 다 똑같은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니 강한 자들을 먼저 골라내라는 뜻이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소인, 최선을 다해 마탑주님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이만 물러가도록.”
“존명!”
밖으로 나선 리히스턴이 명을 내리자 중갑보병과 용병들은 찍소리 않고 물러난다. 현수가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때문이다.
신나는 전투와 신명나는 약탈, 그리고 기분 삼삼한 겁탈을 기대했던 병사와 용병들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투덜대거나 발작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