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1
아까 카엘을 만났을 때 고모부가 이실리프 마탑주이며 그랜드 마스터라는 이야길 하고 싶었다. 현수가 말하지 말라는 손짓을 해서 참은 것이다.
“고모부, 오늘 하루 여기서 주무세요.”
“여기서 자라고?”
“네. 그게 관습이에요.”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캠퍼스를 거닐었다.
별다른 일 없이 저녁이 되었고, 이냐시오와 더불어 생도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엔 기사 생도 연무장에서 검법을 전수해 주었다. 본시 하켄 공작의 검법이었던 것을 손질해서 더 강화시킨 것이다. 공격과 방어가 적절히 이루어지는 것인지라 현재의 이냐시오에겐 적합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이냐시오는 피곤했는지 가늘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든다.
“흐음! 이제 슬슬 지구에도 가봐야겠군. 잘 자거라. 내일 아침에 보자. 슬립!”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기숙사 뒤쪽 숲에서 차원이동을 실시했다.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강렬한 마나 유동을 느낀 마법사들이 잠자리를 박차고 총출동한 것이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모른다. 수면 마법 덕에 숙면을 취하고 있던 때문이다. 아르센력으로 12월 9일에 일어난 일이다.
* * *
“휘유! 여긴 덥군!”
킨샤사 저택 옥상에 당도한 현수는 얼른 의복을 갈아입었다. 아침인데도 몹시 덥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침실로 내려가니 연희가 자고 있다. 9일 만에 보는 아내이다.
쪽―!
“끄응, 누구? 어머! 벌써 일어났어요? 지금 몇 시예요?”
“어, 깼어? 아직 새벽이야. 그냥 더 자.”
“아니에요. 자기가 일어났으니 나도…….”
“아냐. 그냥 조금 더 자. 난 산책이나 하고 올게.”
“그럴래요? 그래요, 그럼.”
말을 마친 연희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직 깰 시간이 아닌 것이다. 너무도 사랑스런 모습이기에 또 한 번 이마에 키스하려다 멈췄다. 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을 열고 나가니 사방에서 인사를 한다. 킨샤사 저택은 24시간 경호 중이다.
일일이 손짓하곤 차를 끌고 나섰다. 경호원들이 따라나서려는 걸 만류했다. 꼭두새벽이니 위험하지 않을 거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차를 몰아 마타디 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이실리프 농장의 로고가 그려진 것들을 아공간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인근이 온통 컨테이너 천지이다. 한국으로부터 보내진 각종 장비 및 물자들이 든 것이다.
“휘유! 대단하군!”
잉가댐 공사를 위한 장비들도 많이 있고, 킨샤사와 비날리아 간 고속도로 공사를 위한 것도 있다.
이 밖에 천지약품의 것들도 있지만 이실리프 농산, 농장, 축산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타디 항의 컨테이너 야적장은 현수와 관련된 것들로 거의 꽉 채워진 듯하다.
9장 농장 하나 더 어때?
“으으음!”
이른 새벽이지만 하역 작업은 벌써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침음을 냈다.
갑작스레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 때문이다.
이실리프 농장, 축산, 농산에만 최소 20만 명 이상이 고용될 것이다. 잉가댐 공사와 고속도로 신설 공사도 많은 인부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침음을 내며 입술을 굳게 다문 것이다.
이제 곧 러시아와 몽골에서도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차얀다 가스전 개발 공사와 이실리프 농장이다.
이 밖에 사할린―3과 사할린―4도 순차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재개발 공사도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전화를 꺼내 곧바로 연결했다.
♬∼♪♬∼♩♪∼♪♬
루마니아 국적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도나우 강의 잔물결이 잠시 흐른다.
“아! 전화 늦게 받아 죄송합니다. 박진영 과장입니다.”
“회의 중이에요?”
“전에 지시했던 아제르바이잔 가스전 개발 공사 건으로 자료를 검색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쪽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지시하신 대로 그쪽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90억 달러 융자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쪽 반응은요?”
“아주 호의적입니다.”
“그래요? 그래도 긴장 늦추지 마세요. 참! 수주전에 뛰어든 회사들은 어디 어디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일본, 지나 등입니다.”
“규모가 큰 회사들이겠죠?”
“네, 모두 Big 20 안에 드는 거대 건설사들입니다.”
“박 과장님 생각에 우리가 수주할 확률은 어떻습니까?”
“으음, 분위기상 70%는 넘을 듯합니다.”
“좋아요. 그쪽 실세를 파악해서 보고해 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십니까?”
“여긴 킨샤사예요. 곧 들어갑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오십시오.”
박진영의 태도는 깍듯하다.
통화를 마친 현수는 몇 군데 더 전화를 넣었다. 그리곤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산책 즐거웠어요?”
“그래! 잘 잤어?”
“네, 모처럼 숙면한 거 같아요. 커피 드려요?”
“좋지.”
창가 소파에 앉아 연희를 옆에 앉힌 채 에스프레소 한 잔을 했다.
“나하고 결혼한 거 어때?”
“네? 그게 무슨……? 후회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연희의 표정이 왠지 샐쭉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비위를 맞춰야 한다.
“아니. 행복하냐고 물은 거야.”
“아아! 그거요? 네, 행복해요. 너무 좋아요. 현수 씨랑 같이, 아니, 자기랑 같이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아요.”
부끄러운지 연희가 품을 파고든다. 슬쩍 보듬어 안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긴 입맞춤을 해줬다.
“으으음!”
‘아침 식사는 어떤 메뉴로, 언제 준비하까요?’라고 물으려던 알리사는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리곤 2층으로 오르던 마리나와 세레나를 데리고 내려갔다.
앞으로 최소 30분 이내엔 2층엔 아무도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셋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쩌면 이 저택의 다음 대 주인을 만드는 순간일지 모른다면서 깔깔거렸다. 그러다 본관 시녀장인 엘린 가가바에게 야단을 맞았지만 모두 다 웃는 얼굴이다.
한편 2층에선 알리사의 예상대로 열풍이 불고 있다. 역시 신혼부부답다.
“우와! 이걸 다 장모님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현수는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 전통 한식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갈비찜, 잡채, 간장게장, 도미찜, 백숙, 신선로 등등이다.
“자네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아이구, 무슨 말씀을……. 진수성찬인데 어떻게 입에 안 맞겠습니까? 진짜 잘 먹겠습니다, 장모님!”
현수가 폭풍 흡입을 하는 동안 연희와 강 여사는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식사를 했다.
“오늘 점심은 안나 언니가 차려준다네. 기대하시게.”
“네? 안나 장모님이요?”
“그래. 전통 체첸식을 준비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네.”
“와! 기대되네요.”
쩝, 쩝, 쩝쩝!
현수는 그야말로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었다. 음식 맛이 좋아서이고, 장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젊은 시절 이후 외롭게 지내셨던 분이기에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는 일종의 배려심이 작용한 것이다.
“여기 얼마나 머무실 거예요?”
식사를 마친 후 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을 때 연희가 물은 말이다.
“왜? 빨리 갔으면 좋겠어?”
“치이, 아니거든요. 자기 바쁘잖아요.”
“곧 가야 해. 북한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아제르바이잔에도 가야 하고.”
“거긴 왜요?”
“거기서 석유화학단지 건설 공사를 해보려고. 그걸 수주해서 공사를 해보면 숙천유전 개발에 도움이 될 거 같아.”
“석유화학단지라면 규모가 크잖아요.”
“그래. 150억 달러짜리야.”
“으으, 자긴 정말……!”
연희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이다. 150억 달러를 한화로 환산하면 18조원이다. 이를 어찌 작다 하겠는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길 하니 얄미운 것이다.
연희가 말을 잇지 못하자 현수는 빙긋 웃는다. 이런 반응일 거라 예상한 때문이다.
“리우 건에 대한 좋은 의견은 만들어놨어?”
“그건, 지금 준비 중이에요. 곧 정리해서 드릴게요.”
“그래. 기대되네. 나 기대해도 되는 거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연희가 눈을 하얗게 흘긴다. 놀리지 말라는 표정이다.
“난 자기 능력을 믿어. 그러니까 기대 만빵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되지?”
“쳇! 알았어요. 노력한다니까요. 참, 다이안 음반 나왔어요. 노래 좋더군요.”
“그게 벌써 나왔어? 어디, 어디?”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연희가 노트북을 들고 온다. 그리곤 유튜브에 올려진 ‘지현에게’의 뮤직비디오를 재생시켰다.
잔잔한 전주가 이어지는 동안 푸른 바다가 배경이다. 그러다가 화면이 바뀌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으잉? 이건 지현이잖아.”
“쳇! 언니 맞아요.”
“헐! 어떻게 섭외했지?”
뮤비의 주인공은 지현이다. 본인을 위해 만든 노래이기에 특별 출현했다는 자막이 밑에 깔려 있다.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연희는 나지막한 허밍으로 따라 부른다. 벌써 여러 번 들어본 듯하다.
“이 노래만 듣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요.”
“그래?”
“다음엔 저를 주인공으로 한 노래 만들어주실 거죠?”
“그,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첫 만남’이라는 곡의 가사는 연희를 생각하고 쓴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할 기회를 놓쳤다.
하여 그것도 지현을 위해 쓴 것으로 오해하는 중이다.
하지만 밝힐 수는 없다. 괜스레 마음 상하게 할 일 없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곡은 자기를 위한 거야. 기대해.”
“어머! 그래요? 제목이 뭔데요?”
연희가 반색하며 좋아한다. 그러면서 자못 기대된다는 표정이다.
“제목은 아직 안 정했어. 연희에게로 할까?”
“네? 그건 안 되잖아요.”
일부일처제가 법률로 정해져 있는 한국에서 발표될 곡이다. 잘못되면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우려의 표정이다.
“그럼 ‘사랑, 내 사랑!’은 어때?”
“좋아요, 그건! 호호, 기대돼요.”
“그래, 기대해. 아주 아름다운 선율로 만들어줄게.”
“호호, 네.”
현수는 연희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아디스아바바로 향했다. 아무리 바빠도 둘러볼 것은 둘러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오! 어서 오시게. 반갑네, 반가워.”
현수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한 사람은 기르마 올데 기오르기스 대통령이다.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다. 비아니 아자한 대통령 비서실장과 로마우 바이할 의무장관이다.
“그래, 신혼 재미는 좋고?”
“네에, 그렇죠, 뭐.”
“하하! 좋겠네, 좋겠어. 미녀를 셋이나……! 하하하!”
기오르기스 대통령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에구!”
현수가 겸연쩍다는 표정을 짓자 셋은 더 환한 웃음을 짓는다. 세계적인 거물이 된 현수를 놀리는 기분이 삼삼했던 모양이다.
“공사는 잘되고 있으니 걱정 말게.”
현수가 공항에서 곧장 왔다는 걸 알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