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694화 (693/1,307)

# 694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현장엘 다녀왔다.

한창호 건축사사무소 직원이 반색을 한다. 그의 곁에는 검게 그을린 고강철 씨가 있다.

전에 비해 확실히 표정이 밝다.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면서 예전의 상처로부터 많이 회복된 듯하다.

“아! 사장님!”

“네, 수고가 많으시네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죠?”

“아, 아닙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도 여길 참 좋아하구요.”

고강철은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고 있다.

그런 그의 뒤쪽으로 천지약품 사옥 현장이 보인다.

한국으로부터 긴급히 들여온 건축자재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공사는 에티오피아 건설사가 하지만 감리는 한창호 건축사사무소에서 하니 품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한참 현장을 둘러보는데 리야 아스토우가 환히 웃으며 다가온다.

“오랜만입니다. 성자님!”

“에구, 성자라 하지 마십시오. 남들 오해합니다. 그나저나 할아버진 괜찮으시지요?”

“네, 덕분에 아주 잘 지내세요. 참! 전에 말씀하셨던 커피 묘목 준비되었어요.”

“아! 그래요? 마침 다행이네요.”

잠시 후, 현수는 리야 아스토우가 수집한 각종 커피 묘목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제가 가져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잘 포장해 두겠습니다.”

“네, 현장사무실 입구에 놔두시면 가져갈게요. 그나저나 사람은 많이 모았어요?”

“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가겠다고 하네요.”

“다행입니다. 비날리아와 반둔두 지역에 재배 적합지가 있나 알아봐 주세요.”

“그럴게요.”

리야 아스토우는 환히 웃고 있다. 현수에게 채용된 이후 그야말로 돈벼락을 맞는 중이다.

갑자기 급여가 20배나 늘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고질적이던 빚을 다 갚고도 돈이 남아돈다. 하지만 사치품을 사들이진 않고 있다.

현수 덕에 간신히 가난으로부터 벗어났다.

너무도 지긋지긋했던 가난이기에 또다시 그런 시기가 오지 않도록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느낀 때문이다.

전 같으면 안정된 주거를 위해 집을 사거나 지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천지약품에서 참전용사 모두에게 집을 지어주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32평형에 해당하는 연립주택이다.

생철로 잇댄 좁은 곳에서 살았으니 고대광실처럼 넓은 집으로 여기고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고급자재를 사용하여 짓는 중이기에 모두들 기대가 크다.

아무튼 리야 아스토우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커피 재배 기술자를 섭외했다.

처음엔 믿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월급 많은 일자리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거주할 집까지 준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지약품이 그러고 있다.

참전용사 가족 모두에게 무상으로 한 채씩 분양해 줬다. 그리고 가족 중 1인 이상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이를 취재한 언론은 한국으로 치면 9시 뉴스 첫머리에 이를 보도한 바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은혜 갚는 의리 있는 나라가 되었다.

다음엔 킨샤사에서 천지약품이 벌이고 있는 자선 사업에 관한 보도가 이어졌다. 일종의 시리즈 보도이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일이다.

외국기업인 천지약품이 에티오피아의 약품 시장 전체를 장악하더라도 군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아울러 소매약방이 되기 위한 조건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이를 위해 킨샤사에 소재한 소매약방 사장 몇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생생히 증언해 주었다.

그 결과 소매약방을 개설하면 부자가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의무부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뿐만 아니라 곤다르, 모얄레, 지지가, 디레다와, 악숨, 티야, 랄리베라, 하라르 등 거의 모든 도시에 소매약방이 들어설 것이라 발표하였다.

그리고 소매약방을 개설하기 위한 요건도 알렸다. 하여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열풍이 불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인구는 대략 9,400만 명이다.

2011년 현재 인구 1,000만인 서울엔 5,088개의 약국이 있다. 같은 비율이라면 47,827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경제규모 자체가 다르다. 하여 이보다 적은 10,000개를 목표로 한다.

물론 차츰 숫자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들은 천지약품에서 만들고 의무부에서 검수한 투약지침서에 쓰인 대로 약품을 판매하게 된다.

남용 또는 오용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기준도 있다.

많이 팔아서 많이 남기려고 남용한 경우는 적발 즉시 소매면허 취소이다. 이를 주관하는 곳은 천지약품이 아닌 의무부이다. 구속력이 있는 행정이 되는 것이다.

지침서를 따르지 않은 오용의 경우는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되었을 때 전액 소매약방이 배상해야 한다.

첫 번째는 경고로 그친다. 두 번째엔 경고와 더불어 벌금이 부과된다. 세 번째 적발되면 벌금 부과 및 면허취소이다.

투약지침서에 없는 상황이 발생되면 병원을 찾아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했다. 의사가 없는 지역인 경우엔 의무부에 문의하도록 절차를 정했다.

소매약방 주인이 임의대로 투약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약사가 일정 숫자 이상으로 양성될 때까지 취해지는 임시 조치이다.

어쨌거나 리야 아스토우는 정말 열심히 일해줄 사람들을 모아두었다.

“킨샤사에 가시면 이실리프 농장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걸 가져가셔서 일 처리를 하시면 됩니다.”

현수는 자신의 명함 뒤에 커피 재배 기술자이니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메모를 해서 건넸다.

“알았습니다. 사장님!”

리야 아스토우가 물러간 이후 현장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의도하던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차를 타고 다시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회의 중이다. 오랜 가뭄 끝에 물 만난 고기처럼 생동감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셔츠의 소매를 걷고 머리를 맞댄 채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도 고성이 나오지 않는다.

의견이 다를 수 있음에도 이러는 이유는 기오르기스 대통령이 내각을 자기 뜻에 맞춰 조각한 결과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다. 이들의 롤모델이 한국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 너무도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50년 걸린 일을 자신들은 20∼30년 안에 이루고 싶다고 한다. 한국이 도와주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씩 웃는다. 나이는 먹었지만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현수는 후일을 기약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결과는 전화 또는 이메일로 통보한다고 한다.

아디스아바바를 떠나 한국으로 가는 동안 현수는 많은 것들을 메모하고 생각했다.

점점 더 일이 커져가고 있는데 컨트롤할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두뇌 부족을 절감하고 인재를 찾아보기로 했다.

* * *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리노와 셀다가 벌떡 일어난다.

“잘 있었어?”

둘은 반색하며 꼬리를 흔든다. 야생 늑대였는데 반쯤 개가 된 듯하다.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다고 온몸을 비빈다.

“하하! 녀석들…….”

두 녀석을 껴안고 부벼주었다. 냄새가 나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다. 아마도 지현이 목욕을 시켜준 듯하다. 지현 이외엔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앞치마를 걸친 지현이 환히 웃는다. 그런 그녀의 오른손엔 뒤집개가 들려 있다. 음식을 만들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주곤 기다린 모양이다.

“자기, 왔어요?”

“그래! 별일 없지?”

“그럼요. 많이 피곤하죠? 이리 앉아요.”

현수의 겉옷을 옷걸이에 건 지현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 뒤로 옮겨간다.

“공항에서 바로 온 거예요?”

“응!”

“그럼 피곤하겠네요. 가만있어 봐요.”

말을 마치곤 조곤조곤 어깨와 목을 주무른다.

별로 시원하진 않지만 그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다. 현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늑한 기분이 느껴진다.

오랜 여행 끝에 집에 온 기분이 든 것이다.

“어때요? 시원해요?”

“그럼! 시원하지. 근데 이제 그만해. 자기도 피곤하잖아.”

“아뇨, 전 괜찮아요. 조금만 더 주무를게요.”

“괜찮아. 그렇게 뒤에 있지 말고 이리 와. 한번 안아보게.”

지현이 못 이기겠다는 듯 품에 안긴다.

“나 없어서 심심했어?”

“아뇨. 맞아요. 자기 없어서 그랬어요.”

여자는 참 이상하다. 아니라고 했다가 금방 그렇다고 말을 바꾼다. 그럼에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아직 식사 전이죠?”

“그럼, 자기가 해주는 밥 먹으려고 배고픈데 참고 왔어.”

“정말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지현이 발딱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음식을 차리는 사이에 샤워를 마치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현수는 금방 몰두했다. 할 일이 태산이기 때문이다.

“밥 다 차렸어요.”

“그래? 알았어.”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곤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짹, 짹, 짹―!

창틀에 앉은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현수의 눈이 뜨인다. 지현은 깊은 잠에 취했지만 현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꼬박 샜다. 그럼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그런 것에 좌우될 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팔을 뺐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또다시 자료 검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여러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왜곡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기술된 역사교과서에 관한 기사였다.

찬찬히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현수가 이 기사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친일’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다. 지극히 혐오하는 어휘이다.

“으으음!”

이십여 개의 기사를 살핀 현수는 나지막한 침음을 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마땅히 제거했어야 할 친일파들을 제거하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친일파가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들 중 권력을 쥔 자들이 의도적으로 사회를 한 방향으로 몰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놈들은 가만히 둘 수 없지.”

현수는 친일사관으로 역사교과서를 집필한 자들의 신상명세를 파악했다. 아울러 이들을 비호한 자들 또한 메모해 두었다.

“니들은 지옥도에 머물게 될 거다.”

현수는 친일파들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과 음식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들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어차피 가봐야 하니까.”

악어와 아나콘다들을 몰아넣고는 가보지 않았다.

그곳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자들에 대한 징벌 장소로 골랐으니 이제 가봐야 한다.

기왕에 가는 길이니 그곳에 머물 자들도 데려가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즉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막연하다. 내놓고 친일 행위를 한 자들뿐만 아니라 암중에서 음모를 꾸미던 자들도 데려가야 한다.

그런데 알 방법이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수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이 있다.

얼마 전, 국정원에 동북아참역사재단 관계자들의 명단을 넘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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