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703화 (702/1,307)

# 703

“적어도 100년 동안은 하나의 국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래요? 기럼 법도 만들겠구만요?”

“그렇습니다. 적절한 법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 규칙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길티요. 우리 공화국의 법을 참고하시라요.”

“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이 다가와 얼굴을 익힌다. 현수가 어떤 인물로 성장할지 충분히 감이 오기에 친분을 쌓으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공연이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말처럼 젊은 연주자가 많아 보인다. 그럼에도 실력이 좋은 듯하다.

잠시 시선을 주며 경청하던 현수는 김정은의 건배 제의에 시선을 돌렸다. 이때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린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

“어라, 이 곡은……?”

“김현수 동지가 만든 곡이디요. 듣기 좋습디다. 하하하!”

놀랍게도 연주되는 곡은 ‘지현에게’이다.

말은 안 했지만 요즘 북한 최고 히트곡이 바로 ‘지현에게’와 ‘첫 만남’이다. 정치적 색채가 전혀 없는 서정적인 곡인지라 당에서도 단속하지 않는다.

“에구, 조금 남세스럽네요.”

“무슨 말씀을, 듣기 좋구만요. 곡이 하도 좋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듣습네다.”

“기럼요. 늙은 나도 이 곡을 들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면서 젊어지는 것 같습네다. 하여 매일매일 듣고 있습네다.”

빙그레 웃는 장성택의 말이다.

“에구!”

현수는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 사람이 와서 곡이 좋다고 말하고 물러난다.

북한 내 권력 서열 20위 안에 젊은이는 김정은 딱 하나뿐이다. 나머진 모두 60을 넘은 노인들이다.

그럼에도 모두들 ‘지현에게’를 아는지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다음 곡은 ‘첫 만남’이다.

전주가 나오자 김정은이 몸은 기울이며 속삭인다.

“이 곡은 우리 설주가 좋아하디요.”

“아, 그렇습니까?”

“비슷한 나이인데 왜 나는 이런 걸 작사, 작곡 못하느냐고 핀잔을 들었습네다. 그거이 다 김현수 동지 때문입네다.”

“아이고…….”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웃으며 말하지만 진심이고 사실인 듯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곡도 매우 좋습네다. 참 대단하십네다.”

“네, 어쩌다 보니 악상이 떠올라…….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탄하는 겁네다.”

“네에, 고맙습니다.”

연회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현수에게는 북한 수뇌부들과 두루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는 내내 어펜시브 참 마법을 구현시킬까 말까 참으로 많이 망설였다.

그러기만 하면 뭐든 뜻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았다. 그럴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정 일이 안 풀리면 그때 마법을 쓰면 된다 생각한 것이다.

“휴우!”

“오늘 힘드셨지요?”

연회가 끝난 뒤 현수는 백화원 영빈관 내 숙소로 안내되었다. 북한에서 국가 원수급 예우를 해준 것이다.

커다란 객실에 들어서며 상의를 벗었다. 기다렸다는 듯 테리나가 다가와 옷을 받아준다. 그리곤 넥타이를 푼다.

현수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테리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거절하는 몸짓을 하면 민망해할 것 같아서이다.

하여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대꾸했다.

“그래, 신경을 많이 쓴 날이네.”

모든 대화가 중요했던 날이다.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면 잘될 일도 순식간에 어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목욕물 준비했는데 하실래요?”

현수로부터 테리나라는 애칭을 얻은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는 외국인이다.

따라서 어휘의 선택이 한국인과 다르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 집권 시절(1418∼1450년) 조선의 과학은 전 세계를 압도했다. 그로부터 600년 정도 흐른 현재의 한국 과학은 결코 세계 최고가 못 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흐리멍덩한 숫자 개념이다.

창고에서 감자를 가져오라는 말을 할 때를 예를 들자면 외국인들은 ‘가서 감자 세 개 가져와’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인은 ‘가서 감자 서너 개 가져와’라고 한다.

세 개인지 네 개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된 우리말은 다음과 같다.

한두 개, 두세 개, 서너 개, 네댓 개, 대여섯 개, 예닐곱 개, 일고여덟 개 등이다.

소유에 대한 관념도 희박하다.

열 살 먹은 아이가 쉰 살 먹은 어른에게 본인의 서른다섯 살 어머니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엄마예요.”

딱 세 사람만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라는 말에 열 살짜리 본인뿐만 아니라 쉰 살 먹은 어른도 포함된다.

쉰 살 먹은 어른이 졸지에 서른다섯 살 먹은 어머니를 갖게 되는 상황이다.

영어를 예로 들자면 이런 때 ‘my mother’라고 이야기한다. 절대 ‘our mother’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에서 평균 IQ가 가장 높은 민족으로 평가 받으면서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가 되지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테리나는 외국인이다. 그런데 샤워가 아닌 목욕이란 어휘를 선택했다.

“목욕?”

“네, 월풀 욕조가 있더군요. 피곤할 땐 따끈한 물에 담그는 것도 괜찮잖아요.”

“그래? 그럼 그래볼까? 근데 그거 물 차려면 시간이 꽤 걸리잖아.”

“그럴 줄 알고 미리 받아놨어요.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그래? 고마워.”

욕실로 향한 현수는 옷을 벗어놓고 욕조로 들어갔다. 딱 기분이 좋을 정도의 따끈한 물이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허, 시원하다.”

목까지 물에 담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얀다 가스전으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는 파이프라인 공사는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북한을 통과하는 부분은 남한의 기술자가 북한 주민들을 통솔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들에겐 매월 임금이 지급된다.

2013년 현재, 개성공단 내 북한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1인당 140달러 수준이다. 북한 당국은 이 금액에서 사회보장금(15%)과 사회문화시책금(30%)을 공제한다.

이를 제외하고 근로자가 지급받는 금액은 월 77달러이다.

남한의 급여와 비교하면 형편없이 낮지만 북한 내 다른 근로자들이 받는 20달러보다는 훨씬 많다.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에 동원될 북한 주민들에겐 월 210달러가 급여로 책정되었다. 사회보장금과 사회문화시책금을 빼고 나면 실 지급 금액은 115.5달러이다.

편안한 공장 내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지에서 고된 노동일이 계속될 것을 감안한 금액이다.

“흐음, 개성공단에선 초코파이를 준다는데 우린 뭘 주지?”

근로자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하지 않다.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할 사람들에게 손바닥만 한 초코파이로는 양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 삼겹살 파티를 열어줄 수도 없고, 뭐가 좋을까? 컵라면은 어떨까?’

더운 물만 공급할 수 있으면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컵라면이다. 주문 제작을 의뢰하면 남한에서 팔리는 것보다 양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컵라면 괜찮겠네. 물은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데울 수 있을 테니까. 간식은 그만하면 되었고, 이들에게 항온 의류를 줘야 하나?”

자칫 북한군의 전력만 늘려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항온 의류를 주었다가 어떤 일이 발생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흐음, 파이프라인 공사는 그렇다 치고, 곧바로 아제르바이잔에도 가봐야겠구나. 그전에 먼저…….”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려면 그게 어떤 건지부터 학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한민국 3대 석유화학단지라 할 수 있는 대산, 울산, 여수 석유화학단지를 둘러볼 생각이다.

현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욕실 손잡이가 돌고 있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났지만 현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안전한 곳인지라 긴장을 풀고 있었으며, 여러 상념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욕실엔 수증기를 빼는 팬이 있다. 이걸 작동시키면 습기가 차지 않는다. 그런데 현수는 오늘 처음 이곳에 왔다.

그렇기에 팬을 작동시키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하여 욕실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한 상황이다.

현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석유화학단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 중이다. 이때 느닷없는 음성이 들린다.

“저어, 등 밀어드려요?”

“으읏! 누구? 테리나?”

“네, 저예요. 근데 등 밀어드려요?”

“등? 아, 아니. 괘, 괜찮아.”

거품이 있어 벗은 몸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당황스런 상황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잠깐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얼른 눈을 감았다.

테리나는 현재 하의 실종 상태이다. 어디에서 났는지 알 수 없지만 하얀 와이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다.

진짜 등을 밀어주려 왔는지 손에는 초록색 이태리타월이 들려 있다.

“저어, 테, 테리나!”

“네?”

“좀 나가줄래? 나 목욕 중이잖아.”

“알아요, 목욕하는 거. 그래서 등 밀어주러 왔잖아요.”

“테, 테리나……!”

“몸 좀 일으켜 봐요.”

현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욕조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곤 현수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민다.

“테리나!”

“결혼도 하신 분이 설마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전 순수하게 등만 밀어주고 나갈 거예요. 그러니 협조하세요.”

“끄응!”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이태리타월이 등에 닿는다. 그리곤 능숙하게 한국인처럼 때를 밀기 시작한다.

워낙 일이 많아 사우나를 들를 틈이 없었다. 어디서든 간단히 샤워만 했으니 때가 많이 나올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와! 이 국수! 이건 완전 우동이에요. 호호! 호호호!”

“……!”

아무리 환골탈태하는 바디 체인지를 이루었다 하지만 28일에 한 번 표피가 탈락된다.

따라서 때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왠지 창피하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테리나 같은 외국 미녀에겐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어쨌거나 테리나는 신이 나서 때를 민다. 굵은 면발이 우두둑 떨어질 때마다 호들갑을 떤다.

다 모아서 우동을 끓이면 충분히 1인분이 된다고 한다. 얼마나 많으면 그럴까 싶어 또 한 번 낯을 붉혔다.

등 아래쪽으로 점점 내려가면 허리가 나오고 그 밑은 엉덩이이다. 테리나의 손이 허리 부근까지 내려가고 있다.

“테, 테리나, 그, 그 밑은 내가 할게.”

“어머! 당연하죠. 그럼 제가 현수 씨 엉덩이까지 밀어줄 줄 알았어요?”

“……!”

괜한 말을 한 듯싶다.

“자요, 이제 혼자 밀 수 있죠?”

“그, 그럼!”

때수건을 받아 든 현수가 뻘쭘한 표정을 짓자 테리나가 발딱 일어난다.

“때 잘 미세요.”

말을 마치곤 미련 없다는 듯 나가 버린다.

오랜만에 등을 밀어서 그런지 기분은 개운하다. 그런데 조금 어정쩡하다는 느낌이 들어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신체의 나머지 부분의 때도 밀었다.

마지막으로 발목을 밀고 다시 욕조로 들어갔을 때 또 딸깍거리며 문이 열린다.

여전히 수증기 자욱한 실내이다. 테리나 역시 팬을 작동시키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테리나?”

“네, 저 들어가요.”

말을 마치고 테리나가 들어서는데 조금 전과 다른 듯하다. 하여 시선을 모으려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발가벗은 테리나가 다가온 때문이다.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있지만 보일 건 거의 다 보인다.

“테, 테리나……!”

“저요, 학교 다닐 때 핀란드의 탐페레1) 지방과 에스토니아의 나르바2) 지역을 갔었어요.”

“……!”

대체 뭔 소린가 하는 사이에 테리나는 벌써 욕조 속으로 들어왔다. 물론 수건을 걷어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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