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4
현수는 얼른 뻗었던 발을 움츠리며 대체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거긴 남녀 혼욕을 하더군요. 근데 들어가 보진 않았어요. 괜히 겁이 났거든요.”
“……!”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현수 씨랑은 혼욕을 해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저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거죠?”
“테리나……!”
“현수 씬 아름다운 부인도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물이 참 따뜻해요. 하으음!”
현수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푹 담근다. 그리곤 현수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눈을 감는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라 거품이 꺼져 있다.
하여 눈만 뜨면 테리나의 나신이 보인다. 예상대로 들어갈 곳은 들어갔고 나올 곳을 확실히 나와 있다.
현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을 감았다. 물속이지만 등에서 진땀이 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끄으응!”
나직한 침음을 내곤 탕 속에 있었다. 그런 현수를 개의치 않는 듯 테리나는 제 할 일을 한다. 바디 클렌저로 구석구석 닦아내고, 샴푸와 린스로 머리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 현수의 일물이 반응을 일으키려 한다.
‘안 돼!’
얼른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처음엔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아 삼매경에 빠져들기 어려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자 가능해졌다.
테리나가 나간 후에도 마나 심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물이 미지근해질 즈음 비로소 눈을 떴다.
“휴우! 이제… 끝난 건가? 다행이야.”
두리번거리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수증기 속에 테리나가 있을까 싶어서이다.
다 씻고 밖으로 나가니 테리나는 샤워 가운만 걸친 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오늘도 그때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정원에 밝혀둔 수은등 덕분에 제대로 된 설경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다 하셨어요? 조금 오래 걸리셨네요?”
누구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는 표정이다.
“응!”
짧게 대답하고는 젖은 머리를 말렸다.
“맥주 시원하던데, 한 잔 더 하실래요?”
“그래? 나야 좋지.”
“그럴 줄 알고 꺼내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다가가 보니 이미 안주며 맥주를 챙겨 놨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자 맥주 캔을 따준다.
딱―!
“여기요.”
“고마워.”
꿀꺽꿀꺽―!
“캬아아∼!”
따끈한 물로 목욕하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니 기분이 상쾌하다.
“아까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
“현수 씨가 결혼한 게 너무 아쉬워요.”
무어라 대꾸할 수 없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맥주만 들이켰다.
꿀꺽꿀꺽―!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있으니 좋네요.”
테리나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켠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두고 있다. 힐끔 바라보니 왠지 짠해 보인다.
“내일도 바쁘겠죠?”
“아마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현수 씬 제게 애칭을 지어주신 분이니까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껌벅였다.
‘애칭을 지어준다는 것에 무슨 뜻이라도 있나?’
또 맥주를 마신다. 목이 타는 모양이다. 힐끔 바라보니 애잔한 표정으로 밖을 응시하고 있다.
“테리나! 이제 많이 늦었어. 가서 자.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맞아요. 이것만 비우고 갈게요.”
“그래.”
잠시 아무런 대화 없이 술만 마시는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캔이 비자 테리나가 일어선다.
“제 방은 바로 옆에 있어요.”
“그, 그래?”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몰라 대답한 말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테리나도 잘 자.”
“네.”
테리나가 나간 후 현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왠지 극한의 위기 속에 빠져 있다 헤어난 느낌이다.
남은 맥주를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내내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대지를 뒤덮고 있다.
마나 심법을 더 할까 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왠지 침대가 포근해 보인 때문이다.
잠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음주와 목욕이 신체를 나른하게 만든 결과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창밖의 함박눈은 그칠 줄 모른다. 아마도 밤새 내릴 모양이다.
새벽 3시가 되었을 무렵, 나직한 객실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딸깍―!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그리곤 얇은 슬립 차림의 테리나가 들어섰다. 가슴엔 베개를 품고 있다.
살금살금 나가오더니 슬그머니 침대로 파고든다.
“으읏! 테, 테리나?”
잠자다 뭔가 뭉클한 느낌에 놀라서 깨어난 현수는 곁에 누운 테리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하음, 깨셨어요?”
“테리나가 왜 여기에……?”
“혼자 자려니 너무 무서워서요.”
“……!”
너무도 태연한 표정이기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잘 주무셨어요?”
“나는… 테리나는……?”
“하암! 저도요. 근데 10분만 더 자요, 우리.”
“우리?”
“네. 딱 10분만요. 어서요.”
말을 하며 잡아끈다. 현수가 눕자 기다렸다는 듯 품속으로 파고든다.
“테리나?”
“10분만요. 이렇게 딱 10분만요. 너무 피곤해요. 하으음!”
말을 마치곤 눈을 감아버린다.
뭐라 할 수 없기에 잠시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10분이 엄청 길다.
건강한 사내라면 잠자는 동안 3∼5회 발기된다.
수면 중 발기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신체의 건강 상태를 반영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수는 현재 누구보다도 건강하다. 그렇기에 날마다 새벽 발기 현상이 일어난다. 방금 전에도 그랬다.
그렇기에 자세가 요상하다. 테리나를 마주 안은 자세에서 엉덩이만 뒤로 쑥 뺀 상태이다.
그렇게 10분 넘게 있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슬그머니 몸을 빼려 하면 테리나가 그러지 말라는 듯 품속을 파고든다.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흐른다.
곤욕스런 시간이다. 그런데 테리나는 못다 한 수면을 취하는 모양이다. 나지막이 코까지 곤다.
아르센 대륙에서도 이런 경험을 했다.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와 여러 차례 이랬다.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내인 캐서린 제타 존스의 전성기 때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현수가 본 서양 여성 가운데 단연코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이아 여신의 성녀인 스테이시 아르웬도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곧 아내가 될 로잘린은 오드리 헵번을 닮았다.
이 밖에도 라이세뮤리안의 딸인 다프네와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도 매우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테리나 역시 매우 아름답다.
현수는 저도 모르게 테리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눈꺼풀이 살짝 올라간다. 보석 같은 눈의 시선은 현수의 얼굴에 닿아 있다.
“…고마워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왠지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하여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와락―!
“아!”
테리나가 현수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할 수 없이 등을 다독여 주었다.
“우리… 이제 일어나야 하죠?”
“그래야지.”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
현수는 테리나의 마음이 어떤지 느껴졌다.
하지만 받아들일 순 없다. 지현, 연희, 그리고 이리냐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더 이상은 없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하여 마음을 정리하라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테리나.”
“알아요. 현수 씬 예쁜 신부와 결혼했잖아요. 알아요. 알아요. 안다구요. 흐흑!”
갑자기 눈물바람이다. 대개의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의 변덕에 대응할 능력이 떨어진다. 현수도 그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시간을 보냈다.
“흐흑! 미안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그, 그래.”
테리나가 품에서 떨어져 나간다. 왠지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이래선 안 되는 것이다.
“조금 있다 올게요.”
“그래.”
침대를 빠져나간 테리나가 얇은 슬립 차림으로 나간다. 육감적인 둔부가 실룩였지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일어나 면도와 양치질을 한 뒤 샤워를 했다.
“우와! 맛있겠어요.”
현수를 따라 백화원 영빈관의 식당으로 내려온 테리나가 나지막한 탄성을 낸다.
한국 음식은 오방색이 잘 버무려져 있다.
오방색이란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색이다.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를 의미하는 색이다.
이것들은 각각 간장, 심장, 비장, 폐,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빈관 식당에서 내놓은 음식은 오방색이 뚜렷했다.
현수와 테리나는 맛있고 즐거운 아침 식사를 마쳤다. 테리나의 태도는 어제와 다를 바 없다.
품에 안겨 언제 흐느꼈냐는 듯 밝은 표정이다. 현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속담에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여자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자신을 연모하는 테리나가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싶어 조금은 불안했던 것이다.
“자, 이제 나머지 회담을 하러 가셔야죠?”
“그래, 그래야지.”
현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 드미트리가 동생 표도르와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어제 보지 못한 최철 소좌가 웃는 낯으로 서 있다.
“잠자리는 편안했습니까, 보스?”
“네, 아주 좋았어요.”
드미트리와 인사하며 표도르를 보자 얼른 고개를 숙인다.
“최 소좌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네! 오늘도 김 사장님 덕분에 영빈관 음식을 먹어보았드랬습네다. 정말이지 감사합네다.”
최철 소좌의 말은 진심이다. 말단 소좌가 어찌 영빈관 음식을 먹어볼 수 있겠는가!
송전각 초대소에서 밥 먹은 이야기만으로도 최 소좌는 부대 내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가 모시는 상관들조차 송전각 초대소를 구경조차 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백화원 영빈관이다.
어제 늦게 당도한 뒤 대기하다 이곳에서 쉬었다.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느라 술을 못 마신 것만 빼면 모든 게 최고였다. 아침 식사도 이곳에서 했다.
현수가 있는 곳이 아닌 소식당에서 먹었다. 그 자리엔 드미트리와 표도르도 있었다. 둘도 이곳에서 묵으며 형제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이 온 것이다.
“그래요? 하루 더 묵을 겁니다. 오늘은 같이 술 한잔해야지요?”
“아이고, 그거이 뎡말이십네까? 뎌야 영광이디요.”
최 소좌의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꺾인다. 방금 말한 대로 일생의 광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하, 네. 그나저나 오늘 일정은 어찌 되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오늘은 제1위원장님 집무실로 모실 겁네다.”
“아, 그래요?”
“네, 제가 모시갔습네다.”
“그러시죠.”
현수 일행이 영빈관 밖으로 나가자 검은색 벤츠가 서 있다. 지난번엔 휘파람이었는데 격상된 것이다.
“타시디요.”
“그래요.”
테리나가 먼저 타고 현수가 탔다. 뒤차엔 드미트리와 표도르가 탑승했다.
“대사님께선 곧장 집무실로 가신댔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너무도 친절하다.
“그래요. 갑시다.”
“네, 기럼 모시갔습네다.”
최철 소좌는 현수를 직속상관 모시듯 한다.
눈치가 빨라 현수 곁에 있으면 고속 승진이 가능한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걸 알아차린 때문이다.
3장 그 공사 우리도 끼워주시라요
“어서 오시라요. 잘 쉬셨습네까?”
“네, 덕분에 아주 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원장님께서도 잘 쉬셨습니까?”
“아닙니다. 지난밤엔 못 잤습네다. 가슴이 벅차서리…….”
김정은의 말은 사실이다.
현수가 제시한 여러 청사진 때문이다. 말대로라면 공화국은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만으로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