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0
“얼마죠?”
“167,500달러입니다, 손님!”
“아, 그래요? 제가 운이 좋았군요.”
“네, 축하드려요.”
창구 직원의 얼굴은 웃음을 띠고 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메가 벅스가 있었지만 그건 상대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터뜨린 바 있기에 전 세계 카지노에 이름이 전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그걸 터뜨리면 분명 문제될 듯싶었던 것이다.
“쩝! 2,100만 달러면 얼마지? 252억인가?”
코인을 넣고 당기기만 했으면 당첨된 금액이다.
“흐음, 얼마 안 되는군. 자, 이제 슬슬 가볼까?”
하긴 현수 기준으로 보면 252억 원은 푼돈에 불과하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 딴 돈은 약 2억 원이다.
“후후, 간단히 항공료와 숙박비는 벌었네. 그나저나 내일은 좀 바쁘겠군.”
현수가 뉴욕에 온 이유는 노교수와 토론하기 위함도 아니고 카지노에서 푼돈을 벌기 위함도 아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이 연방준비은행 금고에 보관을 의뢰한 금괴 때문이다.
내일 오전, 뉴욕에 당도할 금괴는 200톤이다. 도착 즉시 확인 작업 후 FRB 금괴보관소로 들어갈 예정이다. 이것 때문에 미국에 왔고, 형식뿐인 일정을 소화시키는 중이다.
“흐음, 조금 걸어볼까?”
늦은 밤이지만 걸을 생각을 한 이유는 퀸즈와 맨해튼을 잇는 루즈벨트 섬을 가볼 생각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도심의 야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이 퀸즈 브릿지에 당도했다.
바닷물의 짠내가 느껴지는 바람이 불고 있다.
매서운 추위를 동반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지만 바디체인지를 겪은 현수에겐 살랑이는 봄바람이나 다름없다.
다리는 제법 길었다. 하지만 맨해튼의 야경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맨해튼에는 확실히 고층 빌딩이 많다. 교통량은 꽤 되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거리엔 사람들이 적었다.
이모저모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뒷골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곳곳에 홈리스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근처를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헤이, 미스터, 날씨가 너무 춥소. 예이거마이스터13) 한잔하게 돈 좀 주시오.”
아무런 기대 없이 그냥 하는 말이다. 사내의 몰골을 보니 오랫동안 씻지도 못한 듯 추레하기 이를 데 없다. 겉보기엔 60대로 보이지만 깨끗이 씻겨놓으면 40대쯤 될 것이다.
“그거 한 병이면 됩니까?”
현수가 반응을 보이자 눈빛을 빛낸다. 잘하면 한잔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사주시겠소?”
“안주도 없이 그 독한 술을 마치고 취했다가 잠들면 동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덜덜 떨다 잠들 생각을 하니 불쌍해서 한 말이다.
“…지금 내 걱정을 해준 것이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갑시다. 한 병 사드리겠소.”
현수가 그리 멀지 않은 편의점을 가리키자 반색하며 일어선다. 추워서 그런지 옷을 여러 벌 껴입고 있다.
“……!”
“일단 가시죠.”
현수가 앞장서고 홈리스가 뒤를 따랐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원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다.
냄새도 나고 언제 강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라 느낀 것이다.
홈리스도 그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현수의 뒤만 따른다. 괜한 문제를 일으키기 싫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이다.
현수는 진열대에서 시바스 리갈 세 병과 햄, 그리고 물과 빵을 샀다. 빈속에 안주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다간 위장이 망가질 것 같아서이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이, 이걸 전부 내게 사주려는 겁니까?”
“기왕에 마시는 술인데 예이거마이스터처럼 싸구려보단 이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어투 자체가 바뀌어 있다. 인정 메마른 도심 한복판에서 오랜만에 접하는 적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갑시다.”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가시죠.”
홈리스가 안내한 곳은 뒷골목에 자리한 낡은 건물의 아래쪽이다. 이곳엔 지하실의 환기와 채광을 위해 조성한 공간이 있다. 누군가 청소를 했는지 더럽진 않았다.
“잠깐만요.”
홈리스가 카트에서 낡은 천을 꺼내 바닥에 깐다.
“앉으세요.”
“……!”
술만 사주고 갈 생각이었기에 잠시 머뭇거렸다.
“더러워 보이지만 깨끗이 헹군 겁니다. 세제가 없어서 얼룩이 덜 지워진 것뿐입니다.”
“더러워서가 아니라 바닥이 차가워 그러지요. 잠깐만요.”
슬쩍 아공간에서 꺼낸 항온마법진을 밀어 넣었다.
“자, 이제 괜찮을 겁니다.”
홈리스는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술과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이틀간 날씨가 너무 추워 보행인이 거의 없었다. 하여 적선을 받지 못해 쫄쫄 굶었다.
그런데 빵과 햄 등이 있다. 당연히 먹고 싶다.
“술 마시기 전에 빵부터 먹으세요. 빈속이니까요.”
현수가 내민 바게트를 받아 든 홈리스는 두말 않고 반으로 자른 후 입 안에 우겨넣는다.
“급히 먹으면 체합니다. 물도 드세요.”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네자 얼른 받아 마신다.
딱―! 찌이익―!
스팸 뚜껑을 땄다. 그리곤 가져온 봉지 위에 털어놓고 먹을 만한 크기로 잘라냈다.
“이것도 같이 드세요.”
“아, 네에.”
우걱우걱! 쩝, 쩝쩝! 우걱우걱! 쩝쩝쩝, 쩝!
후르르륵! 크으음! 우걱우걱! 쩝쩝, 쩝쩝! 꿀꺽꿀꺽!
바게트의 절반과 스팸 하나가 사라지는 데 5분도 안 걸린 듯하다. 배가 고팠기에 술보다 음식이 먼저였던 것이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듯 홈리스의 체취가 느껴진다. 물론 악취이다. 슬쩍 고개 돌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에어 퓨리파잉!”
그러는 사이 물을 마신 홈리스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캬아∼!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배가 부를 터이니 술은 나중에 마시세요.”
“고맙습니다. 그러지요.”
원래 배가 부르면 술 생각이 사라지는 법이다. 홈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바스 리갈을 챙겨둔다. 아직 따지 않은 스팸과 반쪽짜리 바게트도 비닐봉지로 곱게 싸놓는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갈 곳 없어요? 홈리스들을 위한 쉘터 같은데 있잖아요.”
“거긴……. 그냥 여기가 편해서요.”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하다.
“여기 잠시만 있어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사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항온 의류 샘플이다. 등산이나 낚시할 때 입으라고 만든 것인지라 색깔이 요란한 게 흠이다.
“다 벗고 이거 입어요.”
“이 옷을 날 주는 겁니까?”
“그래요. 이거 입으면 춥지 않을 거예요.”
“……!”
현재 걸치고 있는 여러 겹의 옷으로도 추위를 막지 못해 덜덜 떨었다. 그런데 별로 두껍지도 않은 걸 주니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입어보면 알 거예요. 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홈리스가 옷을 벗는다. 냄새가 점점 심해진다.
옷을 벗을 때마다 냉기가 스미는지 덜덜 떤다. 그러거나 말거나 벗는 족족 세탁과 건조 마법을 구현시켰다.
물론 홈리스가 못 보는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다.
“전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월가에 있었죠.”
“월가요?”
“네. 한때는 잘나가는 펀드매니저14)였습니다. 그러다 실수를 하여… 어어!”
“콰당―!”
바지를 벗다 균형을 잃고 모로 쓰러진다.
웃기는 상황이지만 웃지 않았다. 홈리스는 통증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면서도 말을 잇는다.
“그때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래서…….”
참고로 펀드 매니저가 되려면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한다. 그중 하나는 학력이다. 따라서 눈앞의 홈리스는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저조하다.
미국의 국립교육통계센터(NCES)는 2012년 25∼29세 미국 청년의 대졸자 비율을 조사했다.
한국은 진학률 71.3%인데 미국은 33.5%에 불과하다. 하여 버락 오마바가 대국민 호소까지 했다.
제발 자식들 교육에 신경 좀 쓰라고.
그러면서 여러 차례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을 언급했다.
한국이 저만큼 발전한 것의 근본이 교육이었다는 걸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뭐라 하건 먹고살기 바쁘면 자식이 천재 아니라 천재 할아비라도 대학에 보내지 않는다.
심지어 고등학교도 보내지 않는 부모도 많다.
공부를 못하면 학비 들여가며 투자할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지극히 타당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는 자녀가 정신지체 장애를 가졌어도 이를 인정치 않고 학원이며 과외 교습을 강행한다.
당연히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문제는 공부엔 전혀 관심 없는 여고생이 전체의 절반이라는 것이다. 얘들은 공부보다 화장, 연애, 수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다.
사내 녀석들의 경우는 더 높은 비율로 공부에 관심이 없다. 이 녀석들 뇌의 절반은 게임에 할애되어 있다. 이 밖에 술, 담배, 연애 등이다.
물론 안 그런 녀석들도 많다.
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을 벌인다. 한 번이라도 낙오되면 다시는 주류에 편입할 수 없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또한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가장 앞에 있는 출발선을 딛지 못하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살률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잘못된 사회 관습이 만들어낸 비극 중 하나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잘못에 대한 추궁이 한국보다 확실하다.
LA 부근에 ‘아케디아’라는 자그마한 동네가 있다.
살기 괜찮은 이 동네엔 공원이 있다. 그리고 그 공원엔 한국인 노숙자가 머물고 있다.
전직 성형외과 의사로 한때 자신의 클리닉을 운영하던 사람이다.
잘못된 수술은 단 한 번이었지만 어마어마한 의료 보상을 해야 했기에 노숙자로 전락한 것이다.
미국 법원은 10대 소녀 세 명을 2년간 성폭행한 범인에게는 징역 4,060년을 선고했다. 다시는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영원한 격리를 명령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엔 아홉 살짜리 여아를 성폭행한 범인에게 고작 징역 12년이 선고되었다.
모범수로 복역하면 감형될 수도 있고 보석될 수도 있다.
미국과 비교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다.
“근데 그쪽 이름은 뭡니까?”
“윌슨, 윌슨 카메론입니다.”
“여기 혼자 있는 거예요?”
“아뇨. 나하고 같이 일하던 동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 위쪽에서 나처럼 노숙 생활을 하고 있죠.”
“……!”
“그 친구도 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아 나처럼 파산했습죠. 마누라가 있었는데 그때 애들 데리고 떠났습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데요?”
“그 친구와 난 동갑입니다. 올해 마흔한 살이죠.”
한창 발전할 시기이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둘 다 노숙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안쓰럽다.
“아! 그렇군요.”
“그 친구와 난 그놈에게 속은 겁니다.”
“그놈이라니요?”
“상사로 재직하던 놈이에요. 지금은 잘나가고 있겠지요.”
윌슨의 설명이 잠시 이어졌다.
같은 처지인 에머슨과는 대학 동기이다. 둘 다 오스틴에 소재한 텍사스 주립대학 경제학과 출신이다.
졸업 후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처음부터 둘은 승승장구했다.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순조로운 출발을 한 에머슨은 결혼을 했고, 윌슨은 이 꽃 저 꽃 오가며 적절한 배우자를 찾았다.
둘에겐 제퍼슨이란 상사가 있었다. 부하 직원인 윌슨과 에머슨의 승승장구를 시기한 자이다.
그가 파놓은 함정에 둘이 한꺼번에 빠졌고, 둘 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당연히 파산하였고, 노숙자로 전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