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3
“…잠깐만, 남은 건 지현 씨가 좀 해줘.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현수는 지현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그리곤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서재로 들어갔다.
다시 내려온 것은 반시간도 더 지나서이다.
“악보 다 그렸어요?”
현수가 뭘 했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응. 괜찮은 거 같아.”
“다이안 요즘 바짝 뜨고 있는데 더 좋아지겠어요.”
“다이안? 아냐. 이건 윌리엄이라고, 이번에 미국에서 만난 젊은 친구에게 줄 곡이야.”
“윌리엄이요?”
대체 누구를 말하느냐는 표정이다.
“응. 그로모프 교수님의 손잔데 노래를 아주 잘 불러. 내게 작곡을 부탁했거든.”
“아, 그래요?”
“잠깐만, 이거 이메일로 보내고 옷 갈아입고 나올게. 조금 기다려줘.”
“네, 영화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있어서 괜찮아요.”
지현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잠시 후, 현수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걸치고 내려왔다. 손에는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제작한 항온의류가 들려 있다.
밖이 제아무리 추워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지현 씨도 항온의류 입을 거지?”
“그럼요. 요즘 그거 없으면 못 지내요. 얼마나 요긴하게 입는지 몰라요. 자기 덕이에요.”
지현이 또 환히 웃는다.
요즘 서울중앙지검 직원들은 추위를 모른다. 지현으로부터 옷을 한 벌씩 선물 받은 때문이다.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보내온 항온의류를 나눠 준 것이다.
입기만 하면 추위하곤 완전히 아듀를 하는 정말 신기한 옷이다. 그렇기에 사무실 근무가 끝나는 즉시 그것으로 갈아입는다. 아웃도어 용으로 제작한 것이라 근무복으론 적합지 않기 때문이다.
지현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항온의류를 가졌다. 박근홍 사장이 특별 제작한 것들을 보내준 것이다.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겨울용으로 제작하는 여성용 디자인은 모두 67가지이다. 그것을 전부 만들어 보내온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으로 따로 세 박스나 보내줬기에 나눠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권철현 고검장 부부와 외조부도 항온의류 덕을 보는 중이다.
어쨌거나 현수와 지현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의 옷을 입고 대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근거리 경호를 맡은 토탈 가드 요원이 다가온다.
“어라! 현인구 팀장 아니십니까?”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팀장님이 어떻게 여길……?”
내근만 하는 걸로 알았기에 의아하단 표정이다.
“팀장이기 이전에 저도 경호원입니다. 날씨도 추운데 직원들만 고생하는 거 같아서 교대해 주러 나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처럼 상당히 괜찮은 사람인 듯싶다.
“근데 두 분, 어디 가십니까?”
“네, 아내가 영화 구경을 가자고 해서요.”
“아, 알겠습니다. 차를 가져가시나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경호를 하죠.”
말을 마친 현 팀장은 경호 용어로 현수 부부의 외출을 알렸다. 즉시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모두 출동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잠시 후, 현수가 모는 노란색 스피드는 여덟 대의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채 도로를 주행했다.
현수가 탄 차는 각종 마법으로 도배되어 있다.
웬만한 방탄차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탄탄하다.
스트랭스 다이아몬드 스킨,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구현되는 앱솔루트 배리어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전후좌우를 감싼 경호 차량들이 현수의 속도에 맞춰 이동하고 있다.
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현이 운을 떼었다.
“자기야, 저분들 고생하시는데 항온의류라도 어떻게 해봐요. 밖이 엄청 춥잖아요.”
오늘 새벽 서울의 최저 기온은 ―11℃였다. 해가 뜬 이후 온도가 많이 올라갔지만 ―5℃이다.
핫 팩이나 발열 조끼 같은 걸 입겠지만 바람 부는 날 밖에 서 있었으니 반쯤 동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 알았어. 박근홍 사장님하고 통화하게 전화 연결 좀 해줘.”
지현이 현수의 폰으로 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자마자 받는 모양이다.
“네, 회장님.”
“아이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회장님이라니요.”
“하하, 회장님이니까 회장님이라 부른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일요일인데 무슨 급한 일 있으십니까?”
“우미내 우리 집 근처에 저와 아내를 경호해 주는 경호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항온의류를 제공하고 싶어서요.”
“아! 날씨도 추운데 고생하는 분들이네요. 알겠습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부탁이라니요. 회장님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네, 수고 좀 해주세요.”
통화를 마치자 지현이 또 웃는다.
“이분들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 경호하는 분들도 있어요.”
“에구, 잊고 있었네. 다시 통화하기 그러니까 지현 씨가 문자 넣어줘. 그분들에게도 항온의류가 가도록.”
“네, 알았어요.”
극장 근처에 당도하여 주차장에 차를 댔다.
눈에 확 뜨이는 노란색 스포츠카와 여덟 대의 시커먼 경호 차량이 한꺼번에 당도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차에서 내린 현수와 지현은 누가 봐도 선남선녀다.
“우와! 저 사람은? 맞다! 천지건설 김현수 부사장이다!”
“어디, 어디? 어! 진짜다! 대박!”
“우와! 부인, 진짜 미인이다. 안 그러냐?”
“헐! 진짜 김현수다! 찍어! 어서 사진 찍어!”
현수와 지현은 고개를 숙이거나 카메라 렌즈를 피하려는 몸짓을 하지 않았다.
둘의 얼굴은 언론을 통해 수없이 보도되었다. 그 결과 거의 인기 최절정의 연예인 급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얼굴을 알아볼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예매한 표를 발급 받아 입장했다.
탄산음료인 콜라 대신 헛개차를 샀다.
지현의 가방 속엔 영화 보면서 먹으려 만든 쿠키가 들어 있기에 팝콘은 사지 않았다.
둘이 본 영화는 로보캅 2014이다. 실버 슈트를 입은 로보캅의 권선징악에 관한 내용이다.
액션 영화이니 당연히 총 쏘는 장면 등이 많았다.
어릴 때 로보캅을 재미있게 보았다는 지현은 금방 몰입한다. 현수도 같이 보았지만 느끼는 바는 다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무기를 유심히 본 때문이다.
‘흐음! 슈트가 괜찮네. 시간 날 때 전신 아머 마법진 공부를 해야겠군.’
전능의 팔찌 안쪽에 오토 인스톨레이션 아머 마법진을 그려 넣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흐음, 전투기도 덩치가 클 필요가 없는 거잖아. 수직 이착륙이 가능해지면 아무 데나 배치할 수도 있는 거고.’
현수는 앤티그래비티(Antigravity) 마법을 떠올렸다. 멀린이 만들다 만 마법 목록 중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반중력 마법이다.
특정 물질에 이 마법을 구현시키면 질량이 사라진다.
질량이 없다 함은 지구의 중심이 잡아당기는 힘이 제로가 됨을 뜻한다.
당연히 허공에 놓아도 떨어지지 않는다.
참고로, 아무리 커다란 물체라 하더라도 질량이 0이 되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쉽게 들 수 있다.
멀린은 질량 제거 마법부터 시작했다. 그 결과 반중력 마법의 이론은 정립되었다. 실제로 질량이 0이 되게 하여 무거운 바위가 허공으로 솟구치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뒤의 연구가 없다. 그래서 미완성 마법 목록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마법을 완성시키려면 수직 상승하는 속도를 제어하는 기능이 추가되어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좋고 너무 느려도 좋지 않다. 원하는 수준의 속도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일정 고도를 유지시키는 기능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면 태양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이 마법으로 현존하는 전투기를 일정 고도까지 상승시키거나 착륙시킬 수 있게 되면 독도함도 항모가 될 수 있다.
해군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공군도 마찬가지이다.
F―15K나 KF―16 같은 전투기가 수직 이착륙기가 된다면 웬만한 주차장에 내려앉거나 이륙할 수 있게 된다.
작전 운용에 상당한 변화를 줄 수 있다.
KAI에서 개발 중인 KF―2015 또한 대대적인 변모가 가능하다. 엔진을 축소 마법으로 줄이면 부피가 줄어든다.
전투기 내부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주면 현재보다 더 많은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반대로 미사일에 축소 마법을 거는 방법도 있다.
날개를 접는 기술은 이미 있으니 그걸 적용시키면 승용차만 한 전투기도 가능하다.
이게 수직 이착륙을 한다면 어디든 공군을 배치할 수 있다. 새로운 작전 개념 수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흐음! 이건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어. 그나저나 연구소는 탐나네.”
이제 곧 이실리프 아카데미를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이실리프 연구소도 구상하고 있다.
처음엔 이번에 인수한 KAI의 연구소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보안이 취약하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KAI와 퍼스텍, 그리고 세트렉아이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겐 조만간 사원증이 일괄 배부될 예정이다.
이들은 주요 인물로 연구소가 지어지는 대로 이동 배치될 것이다.
“록히드 마틴 정도는 되어야겠지?”
무자비한 총탄세례를 떠올린 현수는 머릿속으로 구상을 시작했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아내와 둘이 있을 때는 집중해 주자는 생각을 하였다. 이실리프 연구소 등에 대한 생각은 털어냈다.
“응?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영화 괜찮았어?”
“네, 재미있게 봤어요. 자기는요?”
“나도 재미있었지. 근데 이제 우리 뭐해?”
둘은 가까운 마트로 이동했다. 나온 김에 장을 본다니 어쩌겠는가!
현수가 밀고 있는 카트엔 굵은 무 세 개와 배추 열 포기가 들어 있다. 김치를 담그려는 것이다.
“그나저나 장 다 보면 자기 먼저 집에 가.”
“약속 있어요?”
“응. 누굴 좀 만나보려 해. 늦지 않게 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 근데 못 도와줘서 어쩌지?”
혼자 김치를 담그려면 손이 많이 가기에 한 말이다.
“배추 절이는 데 시간 걸리니까 자기가 너무 늦지만 않으면 도와줄 수 있어요.”
“알았어. 최대한 빨리 일 보고 갈게.”
식품 매대를 쭉 돌아 필요한 것들을 사서 트렁크에 넣어주었다. 집에 가서 내리는 건 경호원들에게 부탁하라 했다.
“최대한 일찍 갈게.”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먼저 갈게요.”
경호원 중 토탈 가드, 스페츠나츠 팀이 지현을 따라갔다. 나머지 인원도 꽤 많기에 부담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육군, 해군, 공군 참모총장들이 보호해 주겠다고 보내온 인원이다. 다행인 것은 근접 경호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경호원들과 함께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아! 어서 오십시오, 김현수 사장님.”
“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허창식입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은 미국을 왕복할 때 편의를 제공한 항공사 그룹의 건설사 사장이다.
시공능력 평가순위 18위이니 결코 작은 회사는 아니다. 하지만 천지건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천지건설이 너무 큰 때문이다.
상대가 준 명함을 받아 이름을 확인했다.
“자, 올라가시지요.”
“네, 그러지요.”
허 사장의 안내를 받아 이동한 곳은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라운지7)의 룸이다.
창밖 야경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좌석이 있다.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허 사장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현수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다. 어찌 이것을 받고만 있겠는가!
현수는 그런 인품이 아니다. 하여 허 사장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뵙자고 청한 겁니다.”
“그래도요.”
현수의 말처럼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주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본인이 만나달라고 간청한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