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5
“아, 네.”
1서클 취급하는 게 웃겼지만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이제 와 10서클 마스터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한 번만이라도 뵙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말하는 듯한 기분이었는지 나직한 탄성을 낸다.
“참, 판테온 후작가의 장남과 리먼 백작가의 차남, 그리고 레온 자작의 장자와 뉴트면 자작의 삼남, 헤세 남작의 외아들, 갈베리온 남작의 차남, 피아렌 백작의 둘째 딸과 요세핀 자작의 장녀가 못된 짓을 일삼는다는 거 아십니까?”
“네? 아! 이냐시오에게 들으셨군요.”
한국의 학교에 가서 교장에게 돈 좀 있는 집 아이들 이름을 대며 그들이 일진회 소속으로 못된 짓을 한다는 걸 아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네? 그 아이들이요? 설마요.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결코 그런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디서 뭘 잘못 들으신 듯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절대 아닐 테니.”
조사 결과 사실로 드러나면 피해 학생을 불러 입단속하기에 바쁘다.
교장들이 이러는 이유는 소위 ‘학교의 명예’라는 것 때문이다. 인격도 없는 학교 따위에 무슨 명예가 있다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 일을 서슴지 않는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토리나 백작은 다르다.
아느냐 물었더니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데미의 명예 따윈 고려치 않는 모습이다.
한국의 어느 정신 나간 교장과는 사뭇 다르다.
“그 녀석들이 조직적으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징계하지 않지요?”
“아카데미의 원장으로서 그래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부분 때문에…….”
한국과 아르센이 다른 점은 사회 구조뿐만이 아니다. 국가가 경영되는 사회 체제도 확연히 다르다.
토리나 백작이 악행을 문제 삼지 못하고 볼 때마다 타이르기만 하는 이유는 사건을 공론화시킬 경우 피해 학생의 부모가 또 다른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판테온 후작가의 장남 카엘 판테온 드 라이센은 이냐시오 에델만 드 로이어를 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이걸 문제 삼아 카엘을 징치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학칙에 의하면 퇴학이다.
지구로 생각해 보면 판테온 후작가에서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킨 카엘에게 벌을 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아르센 대륙에선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냐시오라는 존재 때문에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생겼다며 거꾸로 로이어 영지를 상대로 영지전을 벌인다.
힘이 셀수록, 작위가 높을수록 이럴 확률이 대단히 높다.
토리나 백작이 아카데미 원장이면서도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다 더 큰 문제가 발생될 소지가 있기에 힘이 있어도 투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이런 걸 눈치챘다. 그렇기에 완전히 공론화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악행을 벌인다.
“그래서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냐시오가 괴롭힘을 많이 당한 건 알지만 이레나 상단에 피해가 갈까 싶어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장님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듯하군요. 하여 그 녀석들에게 제가 약간의 훈계를 가하고자 합니다. 혼 좀 내줘도 되는지요?”
“그건… 휴우! 네, 너무 심하지 않는 한도에서, 그리고 다른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정도에서 그쳐주십시오.”
토리나 백작은 어쩔 수 없이 허가를 할 수밖에 없다. 이냐시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 알기 때문이다.
고모부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현수가 외국인이라 생각한 때문이기도 하다. 아르센 대륙에서도 딸은 출가외인으로 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라이셔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르센 대륙 전체에 똑같은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판테온 후작은 상당한 힘을 가진 귀족이다.
그런 그라도 멀리 떨어진 미판테 왕국 같은 곳에 가면 최하위 귀족인 남작도 정중히 대해야 한다.
하인스는 외국의 귀족이다. 따라서 판테온 후작이 보복할 수 없으니 허락한 것이다. 실제론 악동들의 나쁜 버릇이 이 기회에 싹 고쳐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뼈를 부러뜨리거나 아이들에게 상처 입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원생들이 다치지 않는다니 마음이 놓인다. 기껏해야 말로 혼내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아카데미가 아름답습니다. 이곳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죠? 우리 제국과 조금 다르네요.”
“아! 그렇습니까?”
원장의 얼굴이 확 달라진다.
골치 아픈 주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고 하인스가 다른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아르센 대륙엔 네 개의 제국이 있다.
라이셔, 카이엔, 그리고 크로완과 카시온이다. 카이엔과는 전쟁 중이니 크로완, 또는 카시온 제국의 귀족일 것이다.
둘 다 라이셔와 대등한 국력을 가진 거대 국가이다.
현수의 작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사고를 쳐도 판테온 후작이 함부로 징치하진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아카데미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원장으로서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에, 우리 아카데미는 크게 나눠 마법학부와 기사학부, 그리고 행정학부가 있습니다. 이 밖에 정령학부가 있기는 한데 정령사들이 워낙 귀해 현재 인원이 겨우 셋입니다.”
“아! 정령학부도 있군요.”
정령은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신령스러운 기운이고, 요정은 불가사의한 마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존재라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실리프 마법서에 쓰여 있기를 요정은 정령이 분화하여 실체화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숲의 요정 아리아니는 정령의 일종이다.
아무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리아니는 정령왕과 대등한 존재이다.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아왔고, 드래곤의 가호를 입은 바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아리아니와 대화를 하고 그녀의 실체까지 보았다.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지만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존재이다.
게다가 켈레모라니의 비늘이 현수의 심장 부위로 스며들 때 아리아니의 마나도 스며들었다.
본인도 모르는 일이지만 현수는 최상급 정령사에 버금갈 정령력을 얻은 것이다.
어쨌거나 토리나 백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아카데미는 초대 황제께서 설립하신 후…….”
한참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간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규모와 커리큘럼8), 그리고 시스템 따위를 확인한 것이다.
유서가 깊어서인지 생각보다 규모도 컸고 학습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그런데 왜 메모를 합니까? 크로완 제국에도 우리 못지않은 아카데미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내 영지에 아카데미를 설립하려고요.”
“네? 일개 영지가 아카데미를 가져요?”
토리나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카데미는 돈을 벌어들이는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써대는 집단이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다는 결과가 없다면 존재해선 안 될 기관이다.
따라서 많은 돈이 든다. 규모를 작게 한다 하더라도 일개 영지가 감당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놀란 표정으로 진심이냐는 뜻으로 바라본다.
“제 영지의 영지민 숫자가 좀 많아서요. 인재를 뽑아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볼까 하는 겁니다.”
“그래요? 대체 영지민의 숫자가 얼마나 많기에 아카데미까지 생각하는 겁니까?”
어느새 둘은 보폭을 맞춰 같이 걷고 있다.
현수가 토리나 백작의 물음에 답을 하려던 순간 둘을 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 판테온 후작의 장남 카엘 판테온 드 라이센과 리먼 백작가의 차남 대니얼 리먼 폰 루네란이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며 현재는 룸메이트이다.
“이봐, 대니얼!”
“왜?”
“저기 저치 말이야. 어제 이냐시오 옆에 있던 놈 아니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난 그 자리에 없었는데. 뭐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기억력 하난 끝내주잖아.”
“그치? 내 기억이 틀린 적 별로 없지?”
“그래. 뭐든 한 번만 보면 최하 절반은 기억하잖아. 근데 저 사람은 왜? 원장님하고 친분이 있나보네.”
“그러게. 그래서 이냐시오 녀석이 그랬나?”
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어제의 일이 생각난다.
아카데미 정문 근처에서 혼자서 뻘짓을 하다 엎어졌다. 일어나 보니 코피가 흥건했다. 속된 말로 쪽팔려 미칠 뻔했다.
그게 다 이냐시오를 따라온 저자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엘의 시선엔 독기가 서려 있다.
“두고 보자. 평민 주제에 감히……! 대니얼, 너희 집 기사들 지금 어디 있니?”
“황금철벽 기사단원? 지금 아카데미 밖에 천상의 휴식처란 여관에 묵고 있어. 그들은 왜?”
“몇 명만 내가 좀 쓰자. 불러줘. 흐음, 세 명이면 되겠어. 되도록 강한 자들로 골라줘.”
카엘은 토리나 백작과 대화하는 현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언제 불러주면 돼?”
“아침 식사 하고 나서. 생도 식당 뒤쪽으로 오라고 해.”
“오케이!”
대니얼이 대답하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조금 전엔 카엘이 흔들어 깨워서 대체 뭔가 하고 창밖을 바라본 것이다.
이런 줄 모르는 현수는 토리나 백작의 물음에 대꾸한다.
“제 영지민의 숫자는 대략 일만 명 정도 됩니다.”
“네에? 인구가 겨우 일만밖에 안 되는데 아카데미를 세운다고요?”
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표정이다.
“인구야 차츰 늘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대비하는 거죠.”
“아, 네에. 알겠습니다.”
토리나 백작과 현수의 대화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많은 것을 메모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에, 아침 식사는 생도 식당에서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토리나 백작과 헤어진 후에도 천천히 걸어 아카데미 전부를 살펴보았다.
6장 결투를 신청한다!
“고모부, 언제 나갔다 오셨어요?”
“네가 하도 코를 골아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여 산책 좀 했지. 몸은 좀 어떠냐? 견딜 만하지?”
현수의 말에 이냐시오는 팔을 휘둘러본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래? 그럼 나가서 어제처럼 수련해.”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상황이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나중엔 검이 무거워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수련을 또 하라니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다.
“네?”
“매일 아침 수련을 해라. 하루도 거르지 말고. 대강대강 해서는 안 된다. 수련을 마치고 나면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알았느냐?”
“…네, 알았습니다.”
이냐시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 든다. 그리곤 기숙사 뒤쪽 테라스로 나갔다.
자세를 잡고는 전력을 다해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음식 맛이 괜찮네. 많이 먹어.”
“네, 고모부.”
이냐시오는 몹시 힘든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다. 아침 수련이 너무 격해 근육통이 심한 때문이다.
바디 리프레쉬 마법으로 풀어주면 금방 풀리겠지만 이런 고통도 견디는 수련이 있어야 하기에 내버려 둔 것이다.
현수는 다소 거친 곡물 가루로 만든 빵을 스튜에 찍어 먹으며 사방을 살폈다.
생도와 수행원, 또는 가족이 대화를 하며 식사 중이다. 그러던 중 카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째려보았으나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냐시오와 검법에 관한 본격적인 대화를 하려는데 카엘이 다가왔다.
“어이, 거기.”
“거기? 지금 날 부른 건가?”
“그래, 거기.”
“넌 아직 애고 나는 어른이다. 애가 어른에게 대화를 청할 땐 이런 무례를 범하면 안 되지. 집에서 이렇게 가르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