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8
이때 황제의 입이 또 열린다.
“제국의 검이었던 하켄 공작과 그의 차남의 목숨은 지금 대수련장 중앙에 서 계신 그랜드 마스터이자 이실리프 마탑주이인 매지션 로드께서 친히 끊으셨다.”
“……!”
이번엔 현수에게 시선이 쏠린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의구심을 품지는 않았다.
소드 마스터는 결코 그랜드 마스터를 이길 수 없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이는 31명의 소드 마스터와의 대련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라이세뮤리안의 자식들이 아닌 적으로 만난 상태였다면 드래고니안 성체 31명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님은 곧 퍼거슨 에델만 드 로이어 공작의 영애인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 공녀의 부군이 되실 분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경스럽게도 장내가 술렁거린다. 발표가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빅뉴스이기 때문이다.
“뭐? 진짜?”
“우와! 대박이다! 이제 우리나라 엄청 안전해지겠네.”
“그랜드 마스터이시자 매지션 로드께서 공녀님의 남편이 되신다니… 우와! 진짜 대박이다, 대박이야.”
잠시 어수선해졌지만 황제는 이를 제지토록 하지 않았다. 대신 뜸을 들일 뿐이다.
“우리 라이셔 제국은 이실리프 마탑과의 친분을 매우 중시하는 바이다. 하여 그 뜻으로 공녀의 오라비이자 차기 공작이 될 에머럴 에델만 드 로이어에게 백작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황제는 현수에게 직접 작위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것이 없다. 공작보다도 한 끗발 높은 공왕위를 줄 수도 없다. 황제보다 아래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황제 자리를 선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고심 끝에 작위 하나를 더 주기로 했다.
퍼거슨 에델만이 죽으면 장자인 에머럴이 공작위를 물려받는다. 그때 본인의 백작위를 아우인 일루신에게 물려주게 된다. 한 가문에 고위 귀족 둘이 탄생하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보다 끈끈한 유대관계가 될 것이다. 당연히 제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것이다.
장내에 운집한 사람들은 황제의 이런 계산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런 걸 보면 라이셔 제국 사람들은 참 똑똑한 듯하다.
“와아아아! 에델만 공작가 만세!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와아아아!”
대수련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군벌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보유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 공녀의 결혼은 축하의 의미로 황실에서 주관하기로 한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로부터 이레를 임시 국경일로 선포하는 바이다.”
“와와와!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이번 만세 소리는 주로 평민 쪽에서 터져 나왔다. 귀족들은 노는 게 다반사지만 평민들은 하루 종일 일에 묶여 산다.
그런데 이레나 푹 쉬게 되었으니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온통 함성이 터져 나올 때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있다.
판테온 후작 쪽 사람들이다. 후작은 이번 사건의 장본인인 카엘을 노려보는 중이다.
세상에 아무리 건드릴 사람이 없어도 그랜드 마스터에 매지션 로드이며 이실리프 마탑주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파멸의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엘은 이런 사람에게 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모욕하고 결투까지 청했다. 조선시대 같으면 석고대죄를 청해도 용서를 받을까 말까 한 일이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하필이면…….”
“……!”
카엘의 나이 열여덟이다. 어찌 보면 어리지만 알 거 다 아는 나이이다. 그랜드 마스터가 어떤 무력을 가졌는지, 매지션 로드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 다 안다.
본인도 마법사이다. 매지션 로드를 보면 무조건 고개부터 숙여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감히 10서클 대마법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그것도 개인 차원이 아니라 가문이 동원된 상태이다. 엄청난 실수가 분명하다. 어쩌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후작의 꾸지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어휴, 저걸……. 끄응, 미치겠네.”
후작은 좌불안석이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정치 싸움이라면 다른 귀족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 세를 불리면 대항할 만하다.
실제로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어떤 귀족도 편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귀족 대부분이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익히기 때문이다.
검을 익혔다면 그랜드 마스터를 존경해 마지않고, 마법을 익혔다면 매지션 로드에게 복종해야 한다.
행정 관료들은 힘이 없으니 편들어줘도 소용없겠지만 그들은 현자를 숭상하기에 결코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8서클만 넘어도 대륙의 현자 소리를 듣는데 10서클이면 거의 신선이나 산신령급이다.
한편, 판테온 후작만큼이나 놀라고 있는 사람이 또 있다.
아침에 같이 아카데미를 거닐며 이런저런 충고를 했던 토리나 백작이다.
1서클 풋내기인 줄 알았는데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매지션 로드라니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오전 내내 로드와 함께 있었다니……!”
이 세상 어떤 마법사도 가질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몽땅 마법 익힐 때 어려운 것 있으면 찾아오라는 소리로 때웠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세상에 맙소사! 세상에 맙소사! 세상에 맙소사!”
토리나 백작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
이때 현수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헤이글의 얼굴에서 진땀이 흘러내린다.
장시간 무릎을 꿇은 관계로 쥐가 난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털고 일어날 수는 없다. 하늘같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검을 뽑으라고 했으니 용서 받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시선을 집중시킬 때 황실근위대장이 또다시 일갈한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
관중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또 어떤 파격적인 일이 있을 것인지 궁금한 때문이다.
“나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은 라이셔 제국과의 친분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내 처가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긴말 해봐야 모양새만 빠진다.
그렇기에 말을 멈춘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다.
“헤이글 경, 일어나게.”
“아닙니다. 제 분수도 모르고 그랜드 마스터인 하인스님께 검을 뽑은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네 검에 눈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네 죄는 이미 사해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라.”
“마, 마스터…….”
명에 따라 벌떡 일어나고 싶으나 다리에 쥐가 나 저린 상태이다. 그렇기에 그럴 수 없어 오만상을 찌푸렸다.
“바디 리프레쉬!”
샤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저린 현상이 싹 사라진다.
“일어나라. 나를 위해 길 안내를 해주겠는가?”
“시켜만 주십시오. 일생의 광영입니다.”
헤이글은 얼른 기사로서의 예를 갖춘다.
“이냐시오, 이제 슬슬 가도 되겠지?”
말을 하곤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데 이냐시오가 반응하지 않는다. 넋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이다.
황제까지 나타나 일이 이토록 크게 벌어지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이냐시오, 가자.”
“네? 아, 네. 그, 그럼요.”
헤이글이 앞장서고 현수와 이냐시오가 나란히 따랐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마탑주님 덕에 이런 발표를 할 수 있어 좋았을 뿐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존대하지 않던 황제가 말을 높이고 있다. 고위 귀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 결과이다.
그때 이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란 의견이 개진되었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랜드 마스터 겸 매지션 로드는 그러고도 남을 존재라 생각한 것이다.
황제로부터 존대를 받으니 더 잘해줄 것이란 기대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기도 하다.
“세피아 공주님, 아니, 황녀님이시죠. 오랜만입니다.”
“네? 아, 네에. 그동안 안녕하셨죠? 그땐 제가 실례를 많이 했습니다.”
세피아와 현수의 대화 내용을 들은 황제가 어찌 된 영문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둘이 만났다는 것만 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래, 꼭 말해다오.”
하나 남은 혈육이라 그런지 황제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세피아가 근위대를 불러 현수를 공격하려 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이 될지 볼 만할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래서 그랜드 마스터이자 매지션 로드가 분노했다면,
라이셔 제국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 심한 피해로 말미암아 전쟁 중인 카이엔 제국에게 먹혀 버릴 수도 있다.
당연히 혼날 일이고, 세피아 황녀는 황제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그래도 울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았다는 게 너무도 다행이기 때문이다.
“참, 갔던 일은 잘 마무리되었는지요?”
“네,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수가 감사의 뜻을 표한 이유는 황제가 드러내 놓고 장인 편을 들어줬다는 것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 근위기사들 사이로 다가선다.
“폐, 폐하!”
“오! 토리나 백작.”
어느새 다가온 토리나 백작의 얼굴엔 진땀이 흐르고 있다. 현수의 얼굴을 어찌 볼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물론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에 다가온 것이다.
“폐하, 저희 아카데미엔 어떻게……?”
“오늘 여길 오면 볼 만한 구경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 왔소.”
“아……!”
토리나 백작은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이때 황제가 두리번거린다.
“그런데 판테온 후작과 그의 아들이 보이지 않는군. 어디 있는지 찾아오라.”
“네, 폐하!”
가까이 있던 근위기사가 서둘러 뛰어간다.
“어찌 되었건 대결이었으니 패자의 사과는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뭐……!”
현수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굳이 사과 받자고 한 일이 아니다. 처조카인 이냐시오가 아주 편안하게 아카데미 수학을 마치게 하려는 일종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이때 황제의 시선이 뒤에 있던 이냐시오에게 미쳤다.
“오! 네가 이냐시오 에델만 생도인가?”
“네, 폐하. 이냐시오 에델만 드 로이어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일생의 광영이옵니다.”
이냐시오가 제법 그럴듯한 폼으로 기사의 예를 갖춘다.
“하하! 그래, 열심히 배워 꼭 제국의 검이 되도록 하라. 너에 대한 기대가 크다.”
“폐,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냐시오의 다소 고풍스런 말에 주변 귀족들이 웃는다. 과도한 긴장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때 근위기사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통로를 내준다. 다가오는 이는 판테온 후작과 그의 장남, 그리고 헤이글이다.
“폐하, 소신 판테온, 제국의 하늘을 알현하옵니다.”
“소신, 카엘, 감히 제국의 하늘을 뵙습니다.”
“기사 헤이글, 폐하의 용안을 알현하옵니다.”
판테온 후작의 얼굴은 조금 전에 비해 10년은 늙어 보인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만든 결과이다.
카엘은 바지 앞부분이 젖어 있다. 현수가 검강을 뽑아내던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것이다.
헤이글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 하늘같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검을 뽑으라 했던 자신의 안목이 너무 원망스러워 눈알을 뽑아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후작가에서 매지션 로드이자 그랜드 마스터인 하인스 마탑주께 결투를 청했다. 직접적인 무력 투사는 없었지만 짐은 이미 승패가 갈렸다 여긴다. 후작의 의견은 어떠한가?”
“폐, 폐하, 저희 후작가의 잘못이 너무 크옵니다. 부디 작위를 거두시고 소신의 목을 치소서. 아울러 소신의 일가붙이 전부를 농노로 내치소서.”
그랜드 마스터이자 매지션 로드를 잘못 건드려 자칫 국가적 재앙을 빚을 뻔했음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
한편, 카엘의 낯빛은 더 창백해진다.
황제가 부친의 뜻을 받아들이면 졸지에 아비를 잃게 되고 귀족이라는 허울은 사라진다. 게다가 농도가 되어 평생 남의 부림을 받고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