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9
하나뿐인 누이는 농노가 되면 뭇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니 넋 나간 표정이다.
판테온 후작은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렇기에 가장 강력한 처벌을 내려달라는 말로 선수 쳤다. 이렇게 해야 죄가 조금이라도 덜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흐음! 후작의 뜻이 이러하구려. 마탑주의 뜻은 어떠합니까? 원하시는 대로 처결토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웃는 낯이다. 쉽게 넘어가자는 의미일 것이다.
카엘이 잘못했지만 판테온 후작은 주요한 국가 전력 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대놓고 용서하자는 말은 못하는 것이다.
“후작께서 이렇듯 겸손하시니 가문에 대한 처결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다만…….”
현수가 중간에 말을 끊기자 판테온 후작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본인이 뜻하던 대로 하자고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입니까?”
어서 말을 이어보라는 뜻으로 황제가 반문한다.
“토리나 백작께서 말하길 생도로 재적하는 동안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아카데미의 학칙이라 하더군요.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황제를 비롯한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두들 한때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카엘은 리먼 백작가의 차남, 레온 자작의 장자, 뉴트먼 자작의 삼남, 그리고 헤세 남작의 외아들, 갈베리온 남작의 차남, 마지막으로 피아렌 백작의 둘째 딸과 요세핀 자작의 장녀와 더불어 다른 생도들을 괴롭혔습니다.”
“……!”
현수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일부는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방금 전 언급된 인사와 관련된 자들이다.
“이들은 아카데미의 학칙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금품을 갈취했고, 다른 생도들로 하여금 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수의 말을 들은 황제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카데미에서 암흑가 폭력조직들이나 벌일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황실근위대장! 가서 마탑주께서 언급하신 생도와 그의 아비들을 즉각 대령하라!”
“네, 폐하!”
“황실근위대는 들어라! 지금 즉시 마탑주께서 언급하신 인사들을 체포하여 압송한다!”
“네! 지엄한 어명을 받잡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국가 반역 사건이 있을 때에도 체포당할 때면 저항하거나 반항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심기를 건드린 대상이 본인이 가장 되고 싶은 화후에 이미 올라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황제의 앞에는 조금 전 언급된 생도와 그의 부친들이 끌려와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조금 전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일부 생도로 인한 불협화음이 인다는 이야길 들었다.”
“폐, 폐하!”
한 발짝 나서며 깊숙이 허리를 숙인 이는 오늘의 결투를 주관했던 리먼 백작이다.
그의 곁에는 대니얼 리먼 폰 루네란이 부들부들 떨며 서 있다.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심히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하다. 마탑주께서 모처럼 우리 제국을 방문하셨는데 못 보여 드릴 꼴을 보여드린 것이다.”
“……!”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 모두들 묵묵부답이다.
“하여 너희에 대한 처결을 마탑주께 일임하려 한다. 이의 있는 자 앞으로 나서라!”
“……!”
모두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대니얼의 바지가 젖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공포로 인한 실뇨 현상이 빚어지는 중이다.
나중에 대니얼의 부인이 될 요세핀 자작의 장녀 세실리아 역시 속옷이 젖고 있다. 드레스 하의가 풍성하게 보이게 하려 고래수염을 덧대었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래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있는 듯하다.
“좋다, 너희가 모두 동의했으니 마탑주께 너희에 대한 처결을 일임한다.”
말을 마친 황제가 두어 발짝 물러선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다.
모두의 시선이 현수에게 쏠린다. 과연 어떠한 처벌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카데미는 배움터이다. 이곳에선 검법과 마법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까지 배워야 할 곳이다. 그런데 아비의 권세를 믿고 자식들이 악행을 저질렀다. 나는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
“꿀꺽!”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 또한 과도한 긴장이 빚어낸 현상이다.
“바세른 산맥 아래 테리안에는 나의 영지가 있다. 이실리프 자치령이라 하지. 악행을 저지른 생도 여덟 명은 그곳으로 옮겨져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이셔 제국을 떠난다는 것이다.
처벌 기간에 관한 언급이 없었으니 부모형제, 일가친척, 친지들과의 생이별을 의미할 수도 있다.
털썩―!
카엘이 가장 먼저 주저앉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때문이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다.
털썩―!
뒤를 이른 건 피아렌 백작의 둘째 딸이다. 이들 둘 역시 훗날 결혼하게 될 운명이다.
“곧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갈 것이니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도록!”
“아,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판테온 후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들이 끌려가서 어떤 고초를 얼마나 오래 받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황제의 분노까지 샀기에 최하가 작위 강등, 아카데미 퇴학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오늘의 결투는 이제 끝이오. 모두 해산하시오.”
“……!”
관중석이 썰물 빠지듯 비워진다.
황제 일행은 귀궁했고, 현수와 이냐시오는 토리나 백작의 안내를 받아 아카데미 원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판테온 후작 등 여덟 명의 귀족과 그들의 자식만 남겨졌다. 후작의 앞엔 카엘 등이 쓰러져 있다.
각자 아비의 발에 걷어 채인 결과이다.
“이 바보 같은 놈! 어휴! 저걸 자식이라고! 끄응!”
판테온 후작의 말을 받은 이는 리먼 백작이다.
“대니얼, 감히 마탑주님의 조카를 상대로……. 어휴! 내가 미친다, 미쳐! 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깝다.”
여덟 명의 귀족은 이구동성으로 자식들을 꾸짖었다.
카엘을 비롯한 여덟 명은 유구무언이다. 자칫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로드이신 줄 모르고 감히……. 정말 죄송합니다.”
토리나 백작의 허리가 120°쯤 굽혀진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하지 않은 내 탓이 더 크니 괘념치 마세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토리나 백작이 허리를 펴며 다시 굽실거린다. 마법사에게 있어 매지션 로드란 거의 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실리프 자치령에서 아카데미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백작에게 운영을 맡기고 싶습니다.”
아침의 대화를 통해 토리나 백작의 심성을 파악하였기에 스카우트하려는 것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떻게든 이실리프 마탑에 가보고 싶었다. 정체되어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운의 마탑주 아렌드에게 여러 번 도움을 청했지만 깨달음을 주지는 못했다. 마법사의 깨달음이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계기로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5서클과 6서클은 차이가 매우 크다.
카이엔 제국과 전쟁 중인 이때 6서클 마법사가 하나 더 있다 함은 큰 도움이 된다.
하여 아렌드 마탑주도 몹시 안타까워했다.
8장 위기! 위기!
“가, 가겠습니다. 하게만 해주시면 성심을 다해 아카데미를 만들어내겠습니다.”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군요. 좋아요. 갈 때 같이 가십시다. 미리 준비를 해두세요.”
“물론입니다. 곧바로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감사하군요.”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곧 저의 주군이 되십니다. 그러니 하대하여 주십시오, 로드.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아무튼 준비해 주게.”
“네, 로드!”
토리나 백작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런데 가족은 없나?”
“…네, 마법을 익히느라 가정을 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흐으음! 알겠네.”
토리나 백작과 헤어진 현수는 혈운의 마탑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로드!”
“며칠 전에 줬던 건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현재 약 오백만 개가 완성되었습니다. 시간을 더 주시면 곧 완성해 올리겠습니다.”
불과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상당량이 되어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으려 하다 말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꽤나 진했던 것이다.
“바디 리프레쉬!”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다크서클이 스르르 줄어든다. 마법은 현대 의학보다도 더 효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드……!”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잠을 못 잔 거지?”
“그, 그게…….”
지난 며칠간 혈운의 마탑주 홀리오 아렌드 판 유세 후작은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마탑에 속한 6서클 3명, 5서클 12명, 4서클 89명, 3서클 223명, 그리고 2서클 517명도 그러하다.
심지어 아직 마법사로 쳐주지도 않는 1서클 마법사 884명 또한 한숨도 못 잤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마법사의 시중을 들어주는 종자나 하녀들 역시 총동원되어 마나석 박는 작업을 해야 했다.
아무렇게나 대강대강 끼워 넣어선 안 되는 일이다. 안력을 돋운 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진척이 늦을 수밖에 없다.
“말을 하게.”
“로드로부터 받은 이후 지금까지… 죄송합니다. 더 빨리 끝마쳤어야 하는데… 사람을 더 동원해서라도…….”
현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만하게. 내 생각이 짧았어.”
“로, 로드……!”
현수가 실망해서 그런다 생각했는지 아렌드 후작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진다.
‘흐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대륙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하면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나 하나 편하자고 죄 없는 사람들을 혹사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아렌드는 후작이다. 공작 바로 다음 계급인 만큼 평민들이 보았을 땐 하늘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말 한마디에 며칠 동안이나 쉬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래 서클 마법사들은 어떠하겠는가!
“로드, 제가 사람들을 더 동원하여 맡기신 일을 완수해 내겠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아렌드 후작은 거듭해서 고개를 조아린다.
“해야 할 일이 맡긴 것만 있는 건 아니네. 내 아공간엔 마법진 1억 장이 더 있네. 조만간 5억 장 정도가 더 추가될 상황이고. 이걸 소화해 낼 수 있겠나?”
“네? 5, 5, 5억 장이요?”
혈운의 마법에 속한 마법사의 수효는 1서클 884명까지 포함하여 1,728명이다. 종자와 하녀들까지 다 포함하면 대략 4,000명 수준이다.
5억 장을 4,000명이 나눠서 처리한다고 계산해 보면 1인당 125,000장씩을 책임져야 한다.
마나석 하나를 끼우는 데 1분가량 시간이 소모된다. 이럴 경우 87일 정도 소요된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배설을 위한 시간도 없으며, 잠잘 시간도 없이 작업했을 때의 일이다.
먹고, 자고, 씻고, 쉬어가며 일을 하면 최소 150일은 걸린다. 5개월가량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탑이 어떻게 이런 일만 할 수 있는가!
라이셔 제국은 현재 전쟁 중이다. 고위마법사들은 전쟁터로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