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1
스르르―!
어둠 속에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나타난다. 고도의 수련을 거친 어쌔신인 듯하다.
달이 없어 어두웠지만 소리 없이 이동하여 용병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리곤 목에 박힌 단검을 회수했다.
검신이 좁고 양쪽의 날이 아주 예리하게 갈린 기형단검이다. 용병의 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곤 조심스레 일루신의 곁으로 다가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자이다. 아까 브론테 왕국 백작을 따라왔던 자와 몸집이 같다.
일루신은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어쌔신은 일루신의 심장 부위를 가늠하고 단검을 곧추세웠다. 이제 힘주어 누르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한다.
일루신으로선 자다가 비명횡사하는 위기의 순간이다.
“이잇!”
번쩍―! 파지지지직―!
“캐애액!”
털썩―!
일련의 상황은 삽시간에 일어났다.
어쌔신의 단검이 심장으로 파고들려는 그 순간 일루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번개였다.
자연적인 번개는 1m당 전위차가 5×10²Volt이다. 이것에 맞으면 사람의 몸은 약 300Ω짜리 전기 도체가 된다.
번개를 맞아 사람이 죽는 이유는 호흡이 정지하거나 심장박동이 멈추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몸속의 전류에 의한 에너지, 즉 ‘전류×전압×시간’의 양이 몸무게에 비해 일정량을 넘을 때에 일어난다.
물론 전류의 비율이 낮아 치사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후유증 없이 회복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쌔신은 번개에 맞았다.
비도 오지 않았고, 실내에서 맞았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마법이다.
어쌔신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던 순간 일루신은 벌떡 일어났다. 너무도 강렬했던 불빛과 비명에 놀란 것이다.
그런 그의 목에는 자그마한 펜던트 하나가 매달려 있다.
현수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헤어지면서 주고 간 것이다.
어린 시절 로시아에게 아주 살갑게 굴었다는 오라비이다. 하여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아티팩트를 주었다.
지금처럼 위기 상황 때 라이트닝 마법이 구현되도록 마법이 인챈트된 것이다.
“헉!”
서둘러 불을 밝힌 일루신은 죽어 있는 어쌔신과 용병을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바, 바, 밖에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어? 집사! 집사!”
일루신이 고함을 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거리며 일단의 무리가 다가온다.
만일을 대비하여 근처 방에서 쉬고 있던 경호용병들이다.
우당탕탕―! 탕탕탕탕―!
복도를 딛는 소리가 요란하다.
벌컥―!
“지부장님! 허억!”
문을 열고 들어선 용병은 어쌔신과 용병의 시체를 보고 당혹성을 터뜨린다.
그리곤 즉시 검을 뽑아 들고 예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살핀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지, 지부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몰라. 자고 있었는데 비명 소리에 놀라서 깼어. 일어나 보니 이래.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평소의 일루신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와중에 용병과 어쌔신의 시체를 살핀 용병이 다가선다.
“지부장님, 어쌔신이 침입하여 호세를 죽이고 지부장님께 해코지를 하려다 라이트닝 마법에 직격된 것 같습니다.”
“라, 라이트닝?”
“네. 시체의 피부에서 화상이 발견되었으며 붉고 회색인 나뭇가지 모양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라이트닝 마법이 맞습니다.”
“그럼 벼락이 떨어졌다는 거야? 여긴 실내인데?”
현수가 준 것이 아티팩트라는 걸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혹시 마법이 인챈트된 물건이 있습니까?”
“마법이 인챈트된 물건? 아티팩트를 말하는 건가? 내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아, 어쩌면…….”
목에 걸린 펜던트를 살피니 색깔이 변한 듯하다.
“어라? 이거 보라색이었는데 왜 자주색이 되었지?”
“그거 혹시 아티팩트 아닙니까?”
용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거야. 매제 될 사람이 준 거니까.”
“매제요? 그분이 마법사이신가요?”
“그래.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시지.”
“네? 누, 누구요? 바, 바, 방금 이, 이,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용병들 모두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너무도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것이다.
이때 일루신은 펜던트를 쓰다듬고 있다.
‘고맙네, 매제.’
현수의 얼굴을 떠올린 일루신은 어쌔신의 시체를 수색하라 명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달랑 단검 한 자루만 있을 뿐이다.
“어쌔신의 시체는 적당한 곳에 묻게. 호세의 유족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장례식을 준비하게.”
“네, 알겠습니다.”
“휴우!”
모두가 물러가자 일루신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근데 누가 보낸 거지? 으으음!”
어쌔신을 보내 죽이고 싶을 정도라면 상대에게 대단한 잘못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러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상거래 이외엔 아무런 술수도 부리지 않았고, 남의 거래를 중간에서 가로챈 바도 없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쌔신이 죽이러 왔다.
잘못된 주소를 받은 게 아니라면 목표물은 자신이다.
일루신은 이맛살을 좁혔다. 그러는 내내 펜던트를 쓰다듬는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경호용병들은 일루신을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실리프 마탑주를 매제로 두었다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 * *
“네? 성녀님이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고요?”
“네, 그래서 걱정입니다.”
머리 허연 페룸 신관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에게 있어 성녀는 받들어 모셔야 할 존재이기도 하지만 딸이나 손녀 같기도 하다.
그런 성녀가 기절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상태인지라 나날이 말라간다.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이지만 그 이전에 인간인지라 놔두면 굶어죽을 것이다.
기절하자마자 마법을 썼다. 어웨이크, 컴플리트 힐, 그리고 리커버리 마법까지 썼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특별한 상처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막고 있는 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9장 이제 소원 들어주세요.
“페룸 신관님, 성녀님을 뵈어야겠습니다.”
“네, 제가 모시지요.”
황제의 귀빈이기 때문에 선선히 받아들인 게 아니다. 신전에도 눈과 귀가 있다. 수많은 신자가 그 역할을 한다.
하여 가만히 있어도 세상 돌아가는 풍문 정도는 듣는다.
그중 가장 쇼킹한 건 하인스 백작이 그랜드 마스터이며 매지션 로드이고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것이다.
황제 부럽지 않은 신분인 것이다.
어느 한 방면으로도 끝에 오르기 힘들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두 방면의 극에 올라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존재이다.
페룸 신관은 사내에겐 관심조차 없던 성녀가 왜 외국인인 하인스 백작에게 그토록 마음을 줬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왜 의식을 잃은 채 누워만 있는지도 안다.
매듭을 지은 사람은 하인스 백작이다. 그걸 풀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도 하인스 백작이다. 그렇기에 사내들이 들어가선 안 될 성녀의 처소로 안내하는 것이다.
현수가 안내된 곳은 흰색 석조건물이다. 이곳은 성녀가 머무는 성녀전이다.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기도실과 성녀 집무실, 그리고 침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녀님은 저 안에 계십니다.”
“네, 페룸 신관님.”
말을 마친 페룸 신관이 성녀전 시녀에게 눈짓을 하자 모두들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딱 하나 남은 시녀가 현수를 성녀의 침실로 안내했다. 그리곤 그녀 역시 물러났다.
페룸 신관의 지시라도 받은 모양이다.
‘전음으로 지시했나?’
이곳에 와서 시녀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는 현수의 오해이다.
신전은 엄숙하고 조용한 곳이어야 한다. 하여 신전에 머무는 사람들은 수화(手話)에 능통하다.
다시 말해 손짓으로 지시했던 것이다.
삐이꺽―!
신전이라 하지만 현대식 경첩이 없으니 마찰음이 들린다.
성녀전이 가이아 여신에게 봉헌된 이후 이곳은 어떠한 사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일전에 현수가 왔던 곳은 성녀전 초입에 있는 집무실이다.
그곳은 황제, 또는 백작급 이상 고위 귀족들을 만날 때 사용된다. 현수는 황제에 버금갈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이다.
문이 열리자 곧바로 약간 떨어진 곳에 다른 문이 보인다.
정교한 조각으로 치장되어 있는 아름다운 문이다.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든 게 분명하다.
왼쪽엔 가이아 여신의 고상이 세워져 있다.
드나들 때마다 기도를 하는지 두툼한 포단이 깔려 있다.
통로의 오른쪽엔 커다란 거울이 있다. 물론 현대식 거울은 아니다. 매무새를 가다듬으라는 뜻인 모양이다.
거울의 좌우엔 성녀의 의식용 예복들이 걸려 있다. 지구로 치면 드레스 룸 정도 되는 듯하다.
삐이꺽―!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된 문을 여니 망사 비슷한 천으로 만든 커튼이 쳐져 있다.
이걸 한쪽으로 젖히니 커튼이 쳐진 침상이 보인다.
“흐음!”
나지막이 헛기침을 했다. 깨어 있으면 기척이라도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고요하다.
“허음!”
또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살며시 커튼을 젖혔다.
“……!”
누워 있는 성녀를 보곤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며칠인데 너무 말라 있다.
“……!”
침상의 곁엔 시녀들이 앉는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으니 성녀의 파리한 옆모습이 보인다.
“성녀님…….”
무어라 말을 하겠는가!
자존심 다 버리고 열두 번째 여인이라도 되겠다며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내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해서 이런 건가?”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면 그것 이외엔 이유가 없다. 신의 가호를 받는 성녀이니 질병 따윈 있을 수가 없다.
지병도 없는 여자가 갑자기 혼절을 해서 코마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이유밖에 없다.
그것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뿐이다.
성녀가 다른 이유로 심리적 안달을 할 게 없기 때문이다.
“성녀, 내 어디가 좋아서 자존심까지 버리고 그런 것입니까? 성녀처럼 아름다운 분이 또 어디에 있다고.”
이 말은 사실이다. 스테이시 아르웬이란 이름을 가진 성녀는 누가 봐도 극상의 미인이다.
이런 미인이 정실도 아닌 첩실의 자리, 그것도 12번째 자리를 달라고 애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녀, 어서 정신을 차리세요. 이러다 죽습니다.”
현수는 슬쩍 성녀의 교구를 흔들었다. 하지만 헝겊 인형처럼 흔들릴 뿐이다.
거의 반시간 동안 이런저런 독백을 하며 깨어나게 하려 애를 썼다. 그러다 문득 한의학을 떠올렸다.
한의사 자격증은 없지만 그에 준하는 지식은 갖추고 있다.
시침 경험도 제법 많다. 테세린을 떠나 나후엘 영지까지 가는 동안 줄리앙과 용병들을 상대로 침을 놨었다.
하여 침을 꺼내 코 바로 밑 인중혈에 시침했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반응이 없어 내관혈과 화경혈, 그리고 화주혈까지 시침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으으음! 안 되는 건가?”
마법으로도 안 되고 한의학으로도 안 된다.
잠시 고심하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누가 볼까 싶었던 때문이다.
“와이드 센스!”
최소 30m 내에는 아무도 없다. 성녀전 시녀들 모두 밖에서 대기하는 듯하다.
“추나요법이면 될까?”
추나란 한의사가 수기법을 통해 환자를 시술하는 것으로 한의학의 외치법에 속하는 것이다.
경혈, 근막의 압통점, 척추 및 전신의 관절 등을 조작하여 인체의 생리, 병리적 상황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안마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읽었던 의서 내용을 떠올린 뒤 조심스레 성녀의 전신을 주물렀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인지라 웬만하면 흥분하거나 음흉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