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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742화 (741/1,307)

# 742

하지만 현수의 호흡은 고르다. 치료 행위 이외엔 아무런 상념도 없는 상태이다.

15분에 걸친 추나요법을 정성껏 시전했건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으음! 소용이 없군. 이것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절 상태를 벗어나게 할 묘안을 떠올렸으나 마땅하지 않다.

“성녀, 대체 왜 이러십니까? 성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내와 맺어져야 합니다. 나는 성녀의 상대로 부족함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왜…….”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곤 아름다운 성녀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만나서 밀어를 속삭인 것도 아니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같은 데서 담소를 나누지도 않았다.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함께한 친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듯 마음을 불편하게 하니 조금은 밉기도 하다.

“성녀님이 밉습니다. 왜 나를 좋아해서……. 나보다 나은 사내들이 널리고 또 널렸는데 왜 나를 택해서……. 열두 번째 자리도 좋다구요? 성녀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자리로 가려 합니까?”

어차피 기절한 상태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음성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이럴 이유가 없잖아요. 어휴!”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성녀전 밖으로 나갔다. 페룸 신관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다.

“성녀님은 어찌 되었습니까?”

“마법으로도 의술로도 다 안 됩니다. 여러분의 신께 빌어보십시오.”

“벌써 했지요. 저희 모두 날마다 성녀님이 쾌차하시길 빌고 있습니다.”

고개 숙인 페룸 신관의 허연 머리카락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자신 때문에 모두들 고생하고 있다 느낀 것이다.

“……!”

뭐라 할 말이 없기에 입 다물고 있었다.

“곧 성녀님의 쾌차를 위한 기도 시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저도요?”

“네, 하인스님이 마법사라는 건 알지만 성녀님을 많이 아끼셨잖습니까?”

“제가요? 아, 네. 그, 그럼요.”

현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럼 가시죠.”

얼떨결에 페룸 신관의 뒤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섰다.

정결을 의미하는 흰색으로 꾸며져 있다. 크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성녀와 신관들만 들어오는 곳인 듯싶다.

“이곳은 원래 성녀님께서 신탁을 받으실 용도로 지어진 겁니다. 그런데 한 번도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지요.”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원형으로 지어진 이 축조물의 중심엔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사람 크기의 두 배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누구의 솜씨인지 알 수 없지만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로도 선이 곱고 정교하다.

대지의 여신은 다소 풍만한 여인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는 얼굴이다.

“백작님께서는 그쪽 포단을 쓰시지요.”

성녀를 제외했을 때 가장 높은 신관이 페룸인 듯 기도를 집전하며 여러 의식을 행한다.

현수는 말없이 포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질색할 모습이다.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기도를 해서 성녀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이깟 무릎이야 열 번도 더 꿇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성당에서 분향할 때 쓰는 향로 비슷한 것에 무언가를 넣고 태운다. 금방 연기가 솟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캐하거나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하 향을 맡은 것 같다.

“……!”

대체 무엇일까 하는데 페룸 신관이 기도문을 읊는다.

자애롭고 넉넉하신 가이아 여신이시여!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오며 더없이 경애하나이다.

이제 당신이 보살피는 땅을 딛고 사는 종자들이 간구하오니 저희의 기도를 들어 너그러이 허락하소서.

경애하옵는 가이아 여신이시여!

당신의 사랑을 점지 받은 성녀께서 깊은 혼절 속을 헤매고 있나이다. 부디 긴 잠에서 깨어나 예전처럼 저희와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더없이 고마우신 여신이시여!

성녀께 다시 한 번 은총을 내리시어 세속에서의 삶이 끝나지 않게 하여 주시오소서.

당신 덕에 늘 풍성한 수확이 있음을 깊이 감사드리나이다.

페룸 신관의 음성은 낮고 장엄했다. 기도문은 길지 않았고 발음은 정확했다.

많이 늙었음에도 발음이 새거나 더듬거리지도 않았다.

더없이 진솔한 모습으로 기도문을 낭독한 페룸은 방금 드린 기도문이 적힌 양피지를 가이아 여신의 고상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곤 다 같이 절을 하려는 순간이다.

성전 중앙에 놓인 가이아 여신 고상이 빛남과 동시에 부드러우면서도 장엄한 음색이 흘러나온다.

나의 사랑하는 종자들아, 들어라!

너희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들여 내 딸을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너희 중에 내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는 나를 아프게 하는 자이니 내 뜻을 깊이 헤아리길 바라노라.

여신의 말이 잠시 끊긴다. 그러더니 고상으로부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줄기줄기 뿜어진다.

파아아아앗―!

빛의 줄기 중 가장 굵고 환한 것이 곧장 현수에게 닿았다. 그리곤 여신의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내가 간택한 내 딸의 배우자!

선택 받은 인간이여!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누리며 살지니 내 딸을 잘 보살펴 내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라.

나의 뜻에 따를 때 네 세상에도 나의 힘이 미치리라.

파아아아아앗―!

다시 한 번 강렬한 빛이 뿜어진다.

그리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씻은 듯 사라졌다. 너무도 강렬했던 빛인지라 갑작스런 어둠에 모두들 눈을 비빈다.

그러나 딱 하나, 눈을 비비지 않는 사람이 있다.

“……!”

현수이다. 머릿속을 파고든 여신의 음성으로 인해 온몸에서 느껴지는 전율11) 때문이다.

“너는 내가 간택한 내 딸의 배우자! 선택받은 인간이여!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누리며 살지니 내 딸을 잘 보살펴 내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라. 나의 뜻에 따를 때 네 세상에도 나의 힘이 미치리라.”

현수는 방금 들은 여신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

이때 가장 먼저 시력을 찾은 페룸 신관이 나직한 탄성을 지른다.

“아! 저 찬란한 광휘! 오! 신이시여!”

현수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전신에서 빛이 뿜어 나오는 중이다. 여신의 고상으로부터 뿜어진 빛과 같은 것이다.

여러 번 바디 체인지를 겪어 노폐물도 없고, 뒤틀린 곳도 없으며, 손상된 부위도 없고, 기능이 약해진 장기도 없다.

그런데 지금 또 한 번의 바디 체인지가 진행되고 있다. 신성력에 의한 것이다.

원래 별문제가 없는 몸이었기에 속도가 매우 빠르다.

푸쉬쉬―!

땀구멍을 통해 빠져나간 것들은 즉시 증발해 사라졌다. 하지만 악취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오오! 가이아 여신이시여! 아……!”

뒤늦게 눈을 뜬 나머지 신관들 역시 현수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에 탄성을 낸다.

이때 페룸 신관의 나직한 호통이 터진다.

“가이아 여신께서 친히 점지하신 성군이시다! 모두 경배하라! 경배하라!”

“아아! 내 인생에 이런 광영이 있다니! 여신이시여!”

모든 신관이 현수를 향해 극고의 예를 표한다.

아르센 대륙에는 여러 신의 신전이 있다.

바다의 신도 있고, 전쟁의 신도 있으며, 불의 신, 물의 신 등등 숫자만 해도 20이 넘는다.

다른 신전의 성녀들은 평생 독신으로 신만 모시며 살지만 가이아 여신은 다르다. 그렇기에 성녀도 혼인을 할 수 있다.

성녀의 배우자는 성군(聖君)이라 친해진다.

결혼하여 성녀와 합방하면 추기경급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되고, 금슬이 좋을수록 더 진한 신성력을 갖는다.

성군은 성녀와 더불어 경배의 대상이며 교황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라이셔 제국의 전통은 성군에게 후작의 작위를 부여하고 평생 안전을 보장한다. 반역만 아니면 어느 누구도 성군의 영지를 상대로 영지전조차 걸 수 없다.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 교황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부에게 모든 권력을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성군이시여!”

현수가 눈을 뜨자 페룸 신관이 나직이 외쳤고, 모든 신관이 동시에 고개를 조아린다.

“…성군이라니요?”

“성녀님께 먼저 가보시지요.”

“…그렇군요. 가봅시다.”

현수가 몸을 돌리자 신관들이 우르르 뒤를 따르려 한다.

“어허! 성군이 되시어 처음으로 성녀님께 가는 길이시다. 모두 물럿거라!”

페룸 신관의 일갈에 모든 신관들이 몸을 멈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오늘 성녀전에서 첫날밤의 의식이 치러질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성녀께서 깨어나셔서 정식으로 발표하기 전까진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이곳에서 여신께 감사 기도를 드리도록 하라.”

“……!”

“잊지 마라. 이 신전이 지어지고 처음으로 여신의 신탁이 있으셨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疏忽)히 다뤄선 안 될 것이다. 알겠는가?”

“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페룸 신관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이 시간부터 이곳은 더없이 성스러운 곳이다. 신관 이외의 출입을 엄히 금한다. 아울러 앞으론 이곳의 청소는 신관들이 맡는다. 알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신관 중 하나의 말이다. 페룸의 말처럼 시녀들이 드나들다 여신의 고상이라도 깨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은 사서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여라.”

“알겠사옵니다.”

페룸 신관이 젊은 신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있을 때 현수는 성녀전에 당도했다.

현수가 발을 들여놓자 아까처럼 모두가 물러간다.

한번 와본 곳인지라 거침없이 침상까지 다가갔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성녀님…….”

말을 이으려던 현수가 얼른 입을 다문다. 눈꺼풀은 덮여 있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대략 5분이다.

반짝―!

성녀의 눈이 떠진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아, 하인스님. 방금 신탁을 받았어요.”

며칠을 굶어서 그런지 힘이 없는 듯하다.

“바디 리프레쉬!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르릉―!

마나가 성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체내로 파고들어 빠른 속도로 기력을 회복시켰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네, 괜찮은 거 같아요. 저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누워 있으니까 좀 이상해요.”

침대에 누운 채 대화하는 게 어색한 것이다.

현수가 손을 내밀어 성녀를 앉게 했다.

“저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예요?”

“조금 됐어요.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 거예요?”

“네, 백작님이, 아니, 마탑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아님 하인스 백작님이라 부를까요?”

“편한 대로 불러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성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하인스님이라 부를게요. 괜찮죠?”

“그러세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인스님.”

“네.”

“전에 저와 약속했던 거 기억해요?”

“약속이요?”

“네, 남아일언중천금이란 말까지 하면서 했던 약속이요.”

“아, 그거요?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현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의 눈빛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그때 약속하기를 종자 개량 작업이 성공리에 끝나면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 했어요. 근데 종자 개량 작업은 성공한 건가요?”

“그럼요.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당연히 그렇지요.”

최초의 기대치는 지구의 수확량의 두 배였다. 그런데 밀의 경우는 6.25배나 늘었다.

이 밖에 벼는 5.8배, 보리 2.7배, 콩과 녹두, 옥수수 5.5배, 팥 4.3배, 고구마 4.2배, 감자 4.1배, 커피 3.1배, 파인애플 3.0배, 바나나 2.8배가 최종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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